김명곤. 문화부 장관 이력보다 <서편제>로 더 알려진 배우이자 연출가인 김명곤 씨의 인생은 파란만장하다. 대학 시절 박초월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웠고, 민중극에서 맹활약했던 그는 권위주의 정권에 찍히기도 했다.
이후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1993)에서 주연을 맡으면서 '대중 배우'의 반열에 올랐고, 2000년부터 2005년까지 국립극장장을 지냈다. 2006년부터 문화체육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던 그는 최근 다시 연출가로서 야심작을 내놨다. 5월 공연을 앞둔 뮤지컬 <오필리어>다.
<오필리어>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햄릿의 '여친' 오필리어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창작 뮤지컬이다. 마침 올해는 셰익스피어 탄생 45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왜 하필 셰익스피어였으며, 왜 하필 '오필리어'였을까?
리어왕과 바리공주가 만난 <우루왕>
지난 4월 25일 박인규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이사장과 만난 자리에서 김명곤 연출가는 "우루왕을 만들면서 셋째 딸 코딜리어에게 꽂혔다"고 말했다. 리어왕이 가진 남성성의 어리석음, 광기, 그로 인한 죽음을 구원할 여성은 코딜리어라는 것이다.
여기에 한국 캐릭터 '바리공주'가 등장한다. 아버지의 생명을 구하려고 저승을 여행하는 바리공주와 코딜리어의 이미지가 묘하게 겹쳤다. 바리공주가 생명수로 아버지를 구해주고 씻김굿으로 아버지의 영혼을 천도하는 '우루왕'은 그렇게 탄생했다.
우루왕이 대성공을 거둔 이후 그는 차기 작품으로 햄릿을 구상했다. 물론 고민도 많았다. 햄릿을 다룬 작품은 전 세계적으로 너무 많았다. 햄릿을 어떻게 다르게 변주할 것인가? 눈길은 "조연급이지만 재해석할 여지가 많은 캐릭터"인 오필리어에게 갔다. 특히 "복수, 살육, 광기의 남성성을 오필리어를 통해 극복한다"는 모티브에 주목했다.
하지만 대본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적지 않은 노력이 들었다. 중세의 가부장적인 세계관으로 만들어진 희생적 여인상인 오필리어를 현대에 맞게끔 변주해야 했다. 원작의 그늘을 벗어나는 데만 5~7년이라는 세월을 또 보내야 했다.
"오필리어는 중세의 가부장적인 세계관으로 만들어진 희생적인 여인상이었어요. 만약 오필리어가 21세기에 살았다면 과연 그런 선택(죽음)을 할 것인가? 거기부터 의문이 생겼어요.
그런데 원작에서는 이야기의 모든 중심이 햄릿에 쏟아져 있는 거예요. 대본을 만들어 다른 사람에게 대본을 보여주면 '제목은 오필리어인데, 여전히 햄릿 이야기'라고 하는 거예요. 지금은 햄릿과는 굉장히 다른 스토리이지만, 셰익스피어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데 어려웠습니다."
오필리어가 21세기에 살았다면?
<오필리어>의 기본 줄거리는 원작 <햄릿>과 비슷하다. 햄릿과 오필리어가 서로 사랑했으며, 햄릿의 아버지는 숙부에게 살해당한다. 햄릿은 복수를 위해 미친 척하고, 오필리어의 아버지인 폴로니어스를 왕이 된 숙부로 착각해 죽인다. 다만 작품의 관점은 철저히 21세기를 사는 현대의 오필리어의 시선으로 옮겨진다.
"원작의 캐릭터와 오필리어의 캐릭터는 달라요. 햄릿한테 '오빠, 오빠'라고 부르고, 아빠가 뭐라고 하면 아빠한테 대드는 말괄량이에 싸움 잘하는 캐릭터에요. 20대 여성들의 세계관을 대변하는 인물로 바꿨어요."
그는 "20대 여성인 오필리어가 바라본 햄릿과의 사랑, 미친 햄릿의 모습은 다르다"며 "오필리어는 왕국에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해하지만, 햄릿은 위험하기 때문에 오필리어가 캐고 드는 걸 말린다"고 설명했다. 오필리어는 갈등을 겪는다.
"편무가가 '아침 막장 드라마 같다'고 하더군요. 여자가 결혼했는데 남편 집안에 비밀이 있죠.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시어머니가 남편 삼촌과 결혼하고, 남편은 친정아버지를 죽여요. 막장 드라마 같죠.(웃음)"
그는 "현대에 걸맞게 세트나 분위기도 일부러 모던하게 꾸렸다"고 덧붙였다. 물론 분위기를 '젊게' 바꾸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20대 젊은 여성 각색가의 도움을 받았죠. 그 친구 감각으로 보는 오필리어는 어떤지 참고하면서 계속 손질했어요. 젊은 스태프들에게도 대사를 고쳐도 좋다고 했어요. 그들의 언어와 정서로 만들어진 것 중에 좋은 것들은 '이거 당첨'이라고 해서 연습실에서 즉흥적으로 대사를 고쳤어요."
"우리 시대에는 여성의 힘이 필요해"
그럼에도 이 작품의 근원적인 열쇳말은 '생명과 치유, 사랑'이다. 여기서 <우루왕>의 문제의식과 <오필리어>가 만난다. 김 연출가는 "여성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힘, 긍정적인 에너지가 우리 시대에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생각은 그의 인생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과 힘을 주신 분이 어머니이고, 판소리를 통해서 예술 세계를 보살펴준 스승이 박초월 여성 명장이며, 아내와 딸도 있다"고 말했다.
"내가 가졌던 세계는 거칠고 남성적인,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면이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이 작품도 죽음을 넘어선 생명, 복수를 넘어선 사랑 이야기입니다."
특히 작품 가운데 가장 애착이 가는 장면으로 햄릿과 오필리어가 부르는 이중창을 꼽았다. 햄릿은 '죽느냐 사느냐'로 노래를 부르고, 오필리어는 '복수냐 사랑이냐'로 노래를 부른다. 그는 "햄릿이라면 복수를 택했을 텐데, 오필리어는 다른 선택을 한다"고 설명했다.
고전을 통해 오늘날 한국 사회를 이야기하다
그동안 그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외에도 여러 고전들을 재해석하는 작업에 매진해왔다. 첫 작품은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을 각색한 <아버지>라는 작품이었다. 현대 한국의 아버지가 주인공이 됐고, 청년 실업과 비정규직 문제를 다뤘다. 원작의 색깔은 거의 줄어들었다.
김 연출가는 "창작도 중요한 작업이지만, 잘 만들어진 명작들에 도전해서 재창작하는 것도 한편으로는 중요한 작업이라고 본다"며 "구성이나 인물이 어느 정도 검증된 만큼, 고전은 내가 완전히 새로운 요리를 만들기에 좋은 틀"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셰익스피어뿐만 아니라 괴테, 그리스 로마 시대 희비극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며 "기회가 있으면 이 고전들을 내 방식으로 재해석한 작품을 만들겠다는 꿈이 있다"고 말했다. 특히 다음에는 괴테의 <파우스트>에 눈길이 간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연극은 '예술의 원형'으로 존경받는 전통이 있는데, 요즘은 연극으로 먹고살 수 없으니 연극계에 유능한 인재가 남기 어려운 구조인 게 마음이 아프다"며 "해마다 한 편씩은 작품을 쓰거나 연출하고 싶은데, 그럴 수 있는 환경만 되면 여한이 없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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