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분들과 유족들에게 깊이 사죄합니다. 어이없고 기막힌 이 나라를 더 이상 방관하지 말고 혁파할 것을 함께 다짐합니다.
경북 선산(善山)고을은 신라의 불교 최초도래지이면서 조선시대 영남사림(嶺南士林)의 산실이었던 유서 깊은 곳입니다.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는 싱그러운 5월 유람(제8강)으로, 선산고을을 찾아갑니다. 2014년 5월 25일(일요일) 당일로 진행합니다. 선산은 명산 금오산(金烏山)이 낙동강 변에 부려놓은 아름다운 고을로, 지금의 구미시(龜尾市) 일원입니다. 상주시, 김천시, 칠곡군, 군위군 등과 인접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지난해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8강 답사지인 선산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백두대간이 태백산과 소백산을 높이 일구고, 죽령(竹嶺)과 조령(鳥嶺) 그리고 추풍령(秋風嶺)을 지나 덕유산(德裕山)에서 솟구쳤다가 남으로 산줄기의 뻗침을 이어가는데 한 지맥(支脈)이 동북으로 거슬러 올라 김천 대덕의 수도산(修道山)이 되더니, 여기서 세 갈래로 나누어집니다. 한 줄기는 동남으로 합천의 가야산(伽倻山)이 되고, 또 한 줄기는 서북으로 충청, 전라, 경상 삼도의 경계점에 삼도봉(三道峰)이 되고, 나머지 한 줄기는 북으로 금오산(金烏山)이 되었으니 금오산이 낙동강 변에 부려놓은 고을이 선산(善山)으로 지금의 구미시(龜尾市)입니다.
선산고을의 산줄기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북서쪽과 남동쪽으로 길게 뻗어 있는 형세로 북서쪽 산줄기에는 동쪽에 비봉산(飛鳳山)이 선산읍치구역(善山邑治區域)을 품었고, 서남쪽에 금오산이 구미공업단지와 구미시를 품었고, 남동쪽 산줄기에는 동쪽에 석벽(石壁)의 천생산(天生山)이 인동읍치구역(仁同邑治區域)을 품었고, 동북쪽에 냉산과 청화산이 신라불교최초도래지 해평(海平)고을을 품고 있습니다.
금오산의 원래 이름은 대본산(大本山)이었으나 고려시대에는 산세의 아름다움이 중국의 오악(五嶽) 중 하나인 숭산(崇山)에 비겨 손색이 없다 하여 남숭산(南崇山)이라 불렀고, 황해도 해주의 북숭산(北崇山)과 더불어 2대 명산으로 꼽혔으며 조선시대에는 단풍이 아름다워 달리 소금강(小金剛)이라 불리며 영남팔경(嶺南八景)의 하나로 손꼽혀 왔습니다.
명산 금오산
금오산이라는 명칭은 어느 날 이곳을 지나던 아도(阿道)가 저녁놀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금오산이라 이름 짓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이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금오(金烏)는 옛날부터 해 속에 사는 세 발 달린 상상의 새로서 태양 또는 해의 정기를 뜻하는 동물인 삼족오(三足烏)를 일컫는 것입니다.
금오산은 그 산자락을 드리운 곳마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보여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립니다. 선산에서 보면 봉우리가 붓끝 같아 필봉(筆峰)이라 하여 문사들이 많이 나왔고, 인동에서는 귀인이 관을 쓰고 있는 모습 같아 귀봉(貴峰)이라 하여 고관이 많이 배출되었고, 개령에서는 도둑이 무엇을 훔치려고 노려보는 모습 같아 적봉(賊峰)이라 하여 큰 도적이 많이 나왔다고 하고, 김천에서는 노적가리같이 보여 노적봉(露積峰)이라 하여 부자들이 많았다고 하며, 성주에서는 바람난 여인의 산발한 모습 같아 음봉(淫峰)이라고 하여 관비(官婢)가 많이 났고, 성주 기생이 유명한 것도 이 때문이라는 말도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금오산 아래 박정희(1917∽1979) 전 대통령의 생가 터는 풍수지리적으로 ‘까마귀가 까치집을 빼앗아 앉아 있는 형국(烏首鵲奪形)’이라고 하는데 까마귀는 원래 집을 짓지 않고 까치가 집을 지어놓으면 빼앗아 삽니다. 박정희가 5·16쿠데타를 일으켜 까마귀가 까치집을 빼앗듯이 결국 학생들의 피의 대가로 무너뜨린 이승만 독재정권을 5.16 쿠데타로 하루아침에 가로챘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선산읍치구역의 주산(主山)인 비봉산은 풍수지리적으로 봉황이 두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로 날아가려는 비봉형국(飛鳳形局)이라 합니다. 동쪽의 교리 뒷산과 서쪽의 노상리 뒷산이 봉황의 양 날개이며 옛 군청 뒷산 봉우리가 몸통과 목으로, 봉황이 날개를 편 채 입으로 군청을 물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어 봉황이 날아가지 않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비보책(裨補策)을 마련하였습니다.
우선 봉황이 날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산 아래의 마을 이름을 ‘망장(網場)’이라고 하였고, 산 이름을 ‘황산(凰山)’이라 하여 수컷인 봉(鳳)에게 암컷인 황(凰)을 짝지어 주었으며, 봉황이 대나무 열매를 먹고 날아가지 못하도록 사방에 ‘죽장(竹場)’이라는 마을 이름을 붙여 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봉황은 본래 다섯 개의 알을 낳으므로 선산 앞들에 봉황의 다섯 알을 상징하는 다섯 개의 조산을 만들어놓아 봉황이 이 알을 품고 영원히 선산 땅에 깃들라는 바람이었는데 다섯 개의 알 중에서 네 개는 경지 정리로 없어지고 하나만 남아 있습니다.
선산의 지형은 이처럼 산줄기는 대체로 서북쪽으로부터 동남쪽을 향하여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물줄기는 낙동강이 김천 대덕산에서 발원하여 해평(海平) 앞 넓은 들을 적셔주고 흘러온 감천(甘川)을 받아 안아 구미시의 중앙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관통하며 흐르고 있습니다.
해평(海平), 교통의 요충지
특히 해평 지역은 낙동강 동쪽의 분지로 경상도의 중앙에 위치하여 남해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육로, 남해에서 안동까지 연결되는 수로, 경상도 감영인 대구와 중요한 요충지인 경주, 상주, 안동, 성주, 김천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어 육상 교통로의 중요한 거점이면서 또한 낙동강 유역의 해상 교통로였으므로 일찍부터 창(倉)이 설치되어 물자 수송의 요충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평(海平)이라는 지명처럼 넓고 비옥한 평야 지대를 이루고 있어 선산 지역 물자 공급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선산은 이처럼 교통의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국방의 중심지역이기도 하여 유사시 방어의 거점이 되는 금오산성(金烏山城)과 천생산성(天生山城)이 있었고, 통신 시설로는 석현봉수, 남산봉수가 있었으며, 교통 시설로는 왕래하는 관료나 사신들을 접대하고 공문서를 전달하며 관의 물자를 운반하던 찰방(察訪)의 지휘를 받는 역참(驛站)이 있었습니다.
금오산성은 처음 쌓은 연대가 문헌상에 있지 않아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고려 후기 왜구들이 내륙 깊숙이까지 빈번히 쳐들어와 인명을 살상하고 노략질을 일삼자 선산, 인동, 개령, 성주 백성들이 금오산에 피난하여 왜구들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성을 쌓았고 그 이후 군병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으며 이곳에 군량과 무기를 비축해 두었던 군창(軍倉)까지 두었다고 합니다.
금오산성은 해발 976m의 험준한 금오산의 정상부를 둘러싼 내성과 북쪽의 계곡을 두른 외성의 이중으로 된 석축산성(石築山城)으로, 금오산의 절벽과 급경사를 이룬 정상부와 북향의 교각능선을 이용하여 포곡식(包谷式)으로 구축되어 있습니다. 북쪽 외성에는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계단식의 높은 기단이 구축되어 있고 길이가 외성 약 3,700m, 내성 2,700m이며 높이는 지세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북문 근방은 약 3m, 험준한 절벽은 1m 정도입니다.
금오산성 안에는 폭포가 있는 계곡과 연못, 우물이 많았고 각종 건물이 있었으나 모두 폐허가 되었으며 내성창(內城倉), 대혜창(大惠倉) 등의 창고와 진남사(鎭南寺)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부근에는 도선암(道詵庵), 금오서원(金烏書院), 길재사(吉再祠) 등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내성과 외성의 문과 암문(暗門), 금오정(金烏井)이라는 샘, 그리고 마지막으로 산성을 고쳐 쌓은 기록을 담고 있는 <금오산성중수송공비(金烏山城重修頌功碑)>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천생산성은 금오산성과 더불어 낙동강을 끼고 동서로 마주하면서 칠곡의 가산산성(伽山山城)과 연결되는 국방의 요충지로서 천생산은 정상이 일자봉(一字峯)으로 생김새가 특이하여 하늘이 내셨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그 모양이 함지박을 엎어놓은 것 같아 경상도 사투리로 방티산이라고도 부릅니다.
천생산성에 삼국시대의 신라 고분군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부터 산성이 축성되었거나 사용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그 후 산성은 폐성되었다가 임진왜란 이후 수축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천생산성은 산정식(山頂式) 산성으로 석성인 내성과 토석 혼축(混築)의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성의 둘레가 약 1,298m이며 북쪽의 외성 둘레는 약 1,322m입니다.
하늘이 내신 산성 천생산성(天生山城)
성내에는 4개의 못(池)과 남문지(南門址), 북문지(北門址), 동문지(東門址), 암문지(暗門址), 수구문지(水口門址)가 남아 있으며 장대(將臺), 산성창(山城倉), 군기고(軍器庫)와 만지암(萬持庵)이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역(驛)과 원(院)은 국가의 명령과 공문서의 전달, 변방의 긴급한 군사 정보 및 외국 사신 왕래에 따른 영송과 접대, 그리고 공공 물자의 운송 등을 위하여 설치된 교통, 통신기관으로 흔히 우역(郵驛), 역관(驛館)이라고도 하였습니다. 고려시대에 원(元)나라 참적(站赤)제도의 영향을 받아 실시된 역참제도는 군사, 외교뿐만 아니라 행정적인 측면에서도 중앙집권적인 사회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육상에는 육참(陸站)을 설치하여 주로 역참(驛站)이라 하였고, 해상이나 강변에는 수참(水站)을 설치하여 수로와 육로를 연결하였으며, 때로는 통행인을 검문하는 관방(關防)의 구실도 하였는데 선산고을에 설치된 것은 구며역(仇旀驛), 삼림역(上林驛), 연향역(延香驛), 안곡역(安谷驛), 양원역(楊原驛) 등이 있었습니다.
원(院)은 고려 및 조선시대 공용으로 출장하는 관리 및 빈객들의 숙박소로서 공용으로 여행가는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각 지방 고을의 요로나 인가가 드문 곳에 설치하였는데 선산고을에는 사가원을 비롯하여 25개의 원이 있었습니다.
구미 지역은 역사적으로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서쪽과 동쪽에 위치한 선산(善山)과 인동(仁同)이 중요한 행정구역이었습니다.
선산 지역에서는 초기 국가의 흔적은 찾을 수 없지만, 삼국시대에 들어서는 백제와 신라의 영토 확장으로 인한 각축장이 되었다가 점차 신라의 영역에 편입되어 일선군(一善郡)이 설치되었고 일선군은 614년(진평왕 36)에 사벌(沙伐, 지금의 경북 상주시 사벌면)과 감문(甘文, 지금의 경북 김천시 개령면)에 있던 상주(上州)의 주치소(州治所)가 이동해 오면서 일선주(一善州)로 개편되었습니다.
일선군의 모례(毛禮)의 집에 눌지왕 때에는 묵호자(墨胡子)가, 소지왕 때에는 아도(阿道)가 와서 불교를 전하기도 하였으며 후삼국시대에 들어와서 이곳은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되었는데, 907년(효공왕 11) 견훤(甄萱)이 일선군과 그 남쪽 10여 성을 점령하여 후백제가 경상도 북부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936년(태조 19) 후백제와 고려의 군대가 선산읍 동쪽 일리천(一利川)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는데 이 전쟁에서 패퇴한 후백제군은 황산(黃山) 탄현(炭蜆)까지 도망갔으나 그곳에서 신검과 두 동생, 장군 부달, 소달, 능환(能奐) 등 40여 명이 생포되었으며 태조는 이들 중 능환을 제외하고 모두를 위무하고 처자식과 함께 상경(上京)할 것을 허락하였고 능환은 신검 즉위의 주모자로 처벌함으로써 마침내 후삼국의 통일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후삼국 통일의 현장
이렇듯 고려가 후백제에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이곳의 호족 일선 김씨의 시조인 김선궁(金宣弓)과 해평 김씨의 시조인 김훤술(金萱術) 등 지략이 뛰어난 장수가 태조를 도와 냉산에 성을 쌓고 싸웠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이때 쌓은 산성을 숭신산성이라 하며 이후에 이 두 가문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명문가문이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 개편 때 선주는 선산군으로 개명되었고 선산군은 2년 뒤 주민이 1,000호 이상이 되어 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갑오개혁 직후인 1895년에 23부제가 실시되자 선산군이 되어 대구부에 속하였다가 다음 해에 13도제의 실시에 따라 3등군으로서 경상북도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인동지역은 삼한시대에는 진한(辰韓)에 속하였는데, 진한의 12개 소국 가운데 군미국(軍彌國)의 관할 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5세기쯤 신라가 이 지역에 대하여 위무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3~4세기쯤 신라에 흡수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려시대에는 인주목(仁州牧)이 되었으며 그 이후로 인동(仁同)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고 인동현의 동쪽에 있었던 옥산(玉山)에서 따서 별호를 옥산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인동현은 1018년 경산부(京山府, 지금의 성주)의 속현이 되어 고려 말까지 계속 유지되다가 1390년(공양왕 2) 처음으로 감무(監務)가 설치되어 독립 행정단위가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 개편 때 인동현은 현명을 그대로 유지한 채 각기 군수, 현감이 파견되었고 1604년(선조 37)에는 도호부로 승격되었는데 선산과 칠곡 사이의 작은 현에 불과하던 인동이 도호부라는 높은 품계를 받은 것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1552∽1617)가 천생산성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기 때문입니다. 1978년에는 구미읍과 인동면을 통합하여 구미시로 승격하면서 선산군에서 분리되었고 1995년에 선산군이 구미시에 통합되어 오늘날의 구미시가 되었습니다.
선산은 고려 말에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가 낙향하여 후진 교육에 전념한 지역으로, 관학 교육기관인 선산향교, 해평향교와 사설 교육기관인 금오서원, 월암서원, 낙봉서원, 무동서원, 송산서원이 설립되어 지방 자제를 교육하였을 뿐만 아니라 역대 수령들이 교육에 관심을 기울이고 명망 있는 학자가 제자 양성에 노력한 결과 선산에서는 많은 유학자가 배출되었습니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학통을 이어 받은 해평 길씨 야은 길재는 고려 멸망 후 더 이상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 선산으로 돌아와 후학을 가르쳤으며 선산 김씨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부자(父子)가 그의 학통을 계승하면서 선산은 15세기 영남사림파 형성의 중심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 말에 성주, 선산 등지 토성들의 상경종사(上京從仕)가 활발해지자 재경관인(在京官人)이나 혹은 다른 고을 출신의 사족들이 대거 선산 지방으로 모여들었습니다.
특히 선산은 조선 개국 이후 초기 60년 동안 문과에 합격한 인원이 36명에 이르며, 장원, 부장원이 연이어 나온 지역으로도 유명했는데 이들 중에 장원 혹은 부장원으로 합격한 사람이 6명이었고, 집현전 학사 출신도 5명이나 되었으며 2품 이상 재상급(宰相級) 고위 관료는 10명에 달했습니다.
영남 인재의 반이 선산에서 났다
그리고 왕조 교체기에 길재를 비롯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파 성리학자들과 세조(世祖)의 등극을 반대하는 사류들이 선산 지방에 운집하여 이른바 ‘영남 인재의 반이 일선(一善, 선산)에서 났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선산 지방이 당시 성리학의 중심지로 간주되었습니다.
특히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높은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조선 선조(宣祖) 20년(1587)에 인동현감(仁同縣監) 류운룡(柳雲龍)이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를 세웠는데 비 앞면에는 중국의 명필 양청천(楊晴川)의 글씨인 ‘지주중류’란 네 글자가 음각되어 있고, 뒤편에는 예조판서 류성룡(柳成龍)이 ‘지주중류’의 뜻과 그것이 후학들에게 주는 교훈을 적은 ‘야은 선생 지주비 음기(冶隱先生砥柱碑陰記)’가 음각되어 있습니다.
‘지주중류’라 함은 중국 황하(黃河) 중류에 있는 석산(石山)이 마치 돌기둥처럼 생겨서 혼탁한 물 가운데 있으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고려 왕조에 절의를 지킨 길재를 은유한 것으로 원래의 비석은 홍수로 매몰되고 지금의 것은 정조(正祖) 4년(1789)에 다시 세운 것입니다.
이러한 충절의 정신은 후대까지 이어져서 계유정란(癸酉靖亂)에 반대한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와 이맹전(李孟專)의 유허비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유명 조선 단계 하선생 유허비(有明朝鮮丹溪河先生遺墟碑)’는 세조(世祖) 때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었던 하위지의 굳은 충절과 절개를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비로서 하위지는 세종(世宗) 20년(1438)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 요직을 거쳤습니다만 세조가 단종(端宗)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하자 1456년 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김질(金質)의 배신으로 탄로나 참형을 당했으나 숙종(肅宗) 때 억울함이 풀어져 충렬(忠烈)이라는 시호와 함께 이조판서로 증직되었습니다.
‘이맹전 유허비(李孟專遺墟碑)’는 계유정란 때 항거했던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이맹전(李孟專)의 유허비로 1778년 선산부사가 세운 것으로, 이맹전은 세종(世宗) 9년에 문과에 급제,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를 거쳐 정언(正言), 소격서령(昭格署令), 거창현감(居昌縣監) 등을 역임했으나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거짓으로 “눈이 어둡고 귀가 멀었다”고 하며 벼슬을 버리고 은둔생활을 하다가 일생을 마쳤습니다.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으로 채택된 성리학은 16세기 후반에 접어들자 사림 세력의 정계 장악과 함께 정치적으로는 동서분당(東西分黨), 학문적으로는 영남학파(嶺南學派)와 기호학파(畿湖學派)로 분열되었는데 영남학파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퇴계(退溪) 이황(李滉), 남명(南冥) 조식(曺植)에 의해 형성된 학통을 말합니다.
영남학파의 분파
영남학파는 15세기 후반 김종직을 영수로 한 영남사림파(嶺南士林派)와는 달리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과 예학(禮學)을 바탕으로 한 사변적인 성리학을 더욱 중시하였으며,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에 대칭되면서 학문적으로는 주리론(主理論), 정치적으로는 동인(東人)의 입장을 고수하였고 이황과 조식은 을사사화(乙巳士禍) 이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동서분당(東西分黨) 이전에 일생을 마치면서 각기 경상좌도(慶尙左道)와 경상우도(慶尙右道)를 대표하여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인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를 형성하였습니다.
영남학파는 1575년(선조 8) 동서분당 때 퇴계와 남명의 문인이 함께 동인 편에 섰으나 뒤에 기축옥사(己丑獄死)를 계기로 동인이 다시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분당되어 퇴계 문인은 주로 남인, 남명 문인은 주로 북인 편에 서게 되면서 두 학파는 서로 학문적 입장과 정치적 성향을 달리하게 되었습니다.
정인홍(鄭仁弘)의 북인세력이 집권하는 선조 말에서 광해군 대까지는 남명학파가 다소 득세하였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정인홍이 처형됨으로써 지리멸렬하게 되어 남명학파의 일부는 경상좌도의 퇴계학파로, 일부는 서인(西人) 편으로 전향하였고 나머지 일부 세력은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가담함으로써 마침내 노론(老論) 정권으로부터 철저한 보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남인 유성룡(柳成龍)과 북인 정인홍의 치열한 남북 대결로 경상좌도와 경상우도의 유림이 크게 분열되자 퇴계와 남명 두 사문을 출입했던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산음(山陰, 지금의 산청) 출신 동계(桐溪) 정온(鄭藴)과 함께 경상도의 유림을 화합하는 데 크게 힘을 기울였으며 특히 퇴계와 남명의 학통을 계승한 정구와 장현광(張顯光)이 선산과 이웃인 성주(星州), 인동(仁同) 등을 기반으로 성장하면서 17세기부터는 점차 경상좌도와 경상우도의 구분이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선산의 읍치구역에 남아 있는 선산객사(善山客舍)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지방 수령이 부임할 때와 초하루, 보름날에 대궐을 향해 예를 행하며, 왕명으로 파견된 관원들의 숙소로 사용하던 곳으로, 18세기에 지금의 선산초등학교 자리에 건립된 후 1914년 현 위치로 옮겨져 선산면사무소로 사용되다가 1987년 내부를 개조하여 향토사료관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선산향교는 조선 초기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나 당시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고 그 후 선조(宣祖) 33년(1600)에 부사 김용(金涌)이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를, 인조(仁祖) 원년(1623)에 부사 심륜(沈倫)이 명륜당(明倫堂)과 동재(東齋), 서재(齋) 등을 새로 지었으며 명륜당이 앞에, 대성전이 뒤에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입니다.
선산향교와 인동향교
인동향교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 사이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후 선조(宣祖) 34년(1601)에 안태동의 옥산 북쪽으로 옮겼다가 다시 인조(仁祖) 12년(1634)에 옥산 서쪽 인의동으로 옮겼는데 다시 도심 확장으로 1988년에 현 위치로 옮겼으며 명륜당, 대성전, 동재와 서재, 등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금오서원은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충절과 학문을 기리기 위하여 조선 선조(宣祖) 3년(1570)에 금오산에 세워졌는데 선조 8년(1570)에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고 그 후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1602년 현 위치로 옮겨 새로 지었으며 길재 외에 김종직, 정붕(鄭鵬), 박영(朴英), 장현광(張顯光) 등의 위패를 함께 모시고 있습니다.
낙봉서원(洛峰書院)은 김숙자(金叔滋), 김취성(金就成), 박운(朴雲), 김취문(金就文), 고응척(高應陟) 등 5인을 모시고 추모하는 곳으로 조선 인조(仁祖) 24년(1646)에 건립되었고 정조(正祖) 11년(1787)에 사액서원이 되었으나, 서원철폐령에 따라 고종(高宗) 8년(1871)에 철폐되었다가 그 후 다시 지어 복원하였습니다.
동락서원(東洛書院)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조선 효종(孝宗) 6년(1665)에 제자들이 건립한 것으로 숙종(肅宗) 2년(1676)에 사액서원이 되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32년 사당을, 1971년에는 부속건물을 복원하였습니다.
장현광은 문신이자 성리학자로서 선조(宣祖) 9년(1576)에 재능과 학덕으로 천거되어, 1602년 공조좌랑(工曹佐郞)과 형조좌랑(刑曹佐郞)을 역임하고 공조참판(工曹參判), 형조참판(刑曹參判)을 거쳤는데 그 이후 일체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오직 학문과 제자 양성에만 몰두하였습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키고 군량미를 모아 전장에 보냈으나 삼전도(三田渡) 굴욕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동해안 입암산(立岩山)으로 들어간 지 반 년 만에 별세하였습니다.
이 지역에서 명문으로 등장한 선산 김씨, 해평 윤씨, 인동 장씨 등의 사족(士族)들은 규모가 큰 가옥을 조영(造營)하고 명승지에 누정(樓亭)을 지어 사족 간의 유대를 도모하면서 많은 유적을 남겼는데 전통가옥으로는 해평의 쌍암고택과 북애종택, 누정으로는 인풍루, 봉하루, 찰미루, 낙남루, 채미정, 매학정, 여차정, 노자정, 월파정, 운경정, 군자정, 낙서정, 공북정 등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산은 불교가 신라로 전해진 최초도래지로서 수많은 사찰이 창건되었는데 대표적 사찰로는 도리사, 수다사, 옥림사, 진남사, 대둔사, 미봉사 등이 남아 있습니다.
불교가 신라에 전래된 경로에 대해서는 해로(海路)로 남해를 통해 한반도의 동해안 연안 지방에 직수입되었다는 설과, 육로(陸路)로 433년 나제동맹(羅濟同盟)으로 중국 남조(南朝)의 불교가 백제를 통해 신라에 전래되었다는 설, 고구려 문화가 육로로 전해질 때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육로의 경우 조령(鳥嶺) 혹은 계립령(鷄立嶺)을 넘어 일선(선산)을 거쳐 경주로 유입되는 경로와, 죽령(竹嶺)을 넘어 영주, 안동 등지를 거쳐 경주로 이어지는 경로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신라도래지
신라는 내물왕 대에 고구려 광개토왕의 도움으로 왜를 물리쳤으며, 실성왕과 눌지왕 즉위에도 고구려의 영향력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아 여러 전래 경로 중에서 고구려를 통한 육로일 가능성이 가장 큰 데, 5세기 초 눌지왕 대에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죽령을 통한 경로보다는 계립령을 통해 일선을 경유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사로국(斯盧國)이 소국들을 정복할 때 상주의 사벌국(沙伐國)으로 진출한 예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사로국이 사벌국으로 진출할 때 일선지역을 경유하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데 그렇다면 신라는 사벌국으로 진출하기 이전부터 이미 일선 지역에 상당한 기반을 확보해 놓았을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불교의 신라 유입 경로는 고구려를 통한 계립령(鷄立嶺)을 거쳐 일선 지역을 경유한 경로가 가장 유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일선 지역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눌지왕 대의 아도(阿道)와 모례(毛禮)에 대한 여러 기록들은 신라의 불교 전래와 관련하여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습니다.
‘아도화상사적비(阿道和尙事蹟碑)’에 모례를 어른이나 부자를 뜻하는 장자(長者)라고 불렸으며 소와 양, 수천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모례는 일선 지역에서 상당한 지위와 경제적 부를 누리며 신라에 불교를 전도하러온 고구려 승려들을 숨겨주고 거처까지 마련해준 후견인으로서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선 지역이 고구려에서 신라 경주로 가는 길목임을 감안하면 모례는 일찍부터 고구려의 문물을 접한 것으로 추정되며 더 나아가서 모례는 신라 왕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신라의 초기 통치방식은 지방호족을 통한 간접 지배 방식이었으므로 지방호족세력과 왕실의 교류가 활발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아도가 모례의 집에 있다가 왕실에 진출했다든가 왕실에서 배척되었을 때 숨은 곳도 모례의 집이었다는 사실은 모례가(毛禮家)와 왕실이 밀접한 관계였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게 합니다.
도리사(桃李寺)는 신라 눌지왕(417∼458)때 모례의 집에 머물면서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파하던 아도화상이 불교 포교를 위해 경주에 다녀오다가 냉산 동남쪽 기슭에 겨울인데도 복숭아[桃]꽃과 오얏[李]꽃이 만발하여 있음을 보고 그곳에 절을 짓고, 그 이름을 도리사라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도리사 극락전(極樂殿)에는 17세기에 향나무로 만들어진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조사전(祖師殿)에는 아도화상의 초상화가 봉안돼 있고, 극락전 앞뜰에는 모전석탑(摸塼石塔) 모양의 화엄석탑(華嚴石塔)이 서 있으며 화엄석탑 옆으로 난 쪽문으로 나가면 아도화상이 도를 닦았다는 좌선대가 높이 1m에 한 평 남짓한 규모로 멀리 굽이치는 낙동강과 넓은 해평 들판을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으며 뒷산에는 숭신산성 터가 남아 있습니다.
도개리 마을 중앙에는 신라 최초의 불교 신자인 모례(毛禮)의 집에서 사용한 것으로 전해지는 깊이 3m 정도의 우물이 있는데 모례는 고구려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신라에 불교 전파를 위해 왔으나 탄압이 심해지자 자기 집에 굴을 파고 숨겨주었으며, 후에 아도가 왔을 때도 자기 집에 3년 동안 머슴살이하면서 머물게 했다고 합니다. 이 우물과 도리사(桃李寺)는 신라 불교의 전파를 알려주는 유적으로 신라 불교의 성지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고을학교 제8강은 5월 25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07:00)-선산읍치구역(죽장사 5층석탑/하위지 유허비/선산객사/선산향교/금오서원 11:00)-일선군신라불교최초도래지(모례네 우물/낙산동 3층석탑/도리사/낙봉서원 12:30)-점심식사 겸 뒤풀이(14:00)-인동읍치구역(동락서원/인동향교/지주중류비/길재묘 15:00)-구미읍치구역(이맹전 유허비/채미정/금오산성 16:00)-서울(19:00 예정)의 순입니다.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긴팔 긴바지), 모자,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 제8강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점심식사 겸 뒤풀이비,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 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 주십시오. 고을학교 카페(http://cafe.naver.com/goeulschool)에도 놀러오세요.^^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고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 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 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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