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근 대량의 중국 소설들이 번역 출간되고 있다. 노벨상 수상작가 가오싱젠(高行建)과 모옌(莫言)의 작품을 비롯해 한국 독자에게 가장 환영받는다는 <허삼관 매혈기>(최용만 옮김, 푸른숲 펴냄)의 위화(余華), 그리고 영화 <홍등>의 원작자로 잘 알려진 쑤퉁(蘇童), 베이징의 왕숴(王朔)와 톄닝(鐵凝) 그리고 류전윈(劉震雲), 상하이의 왕안이(王安憶)와 쑨간루(孫甘露), 산둥(山東)의 장웨이(張煒) 등의 대표작이 거의 모두 출간되었다.
그 가운데 후난(湖南) 출신 작가 한사오궁(韓少功)의 ‘심근(尋根) 선언’(1984)에서 비롯된 ‘심근문학’도 주목을 요한다. 이들은 개혁개방시기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전통으로부터 정체성과 뿌리 찾기를 시도했는데, <폐도>의 자핑와(賈平凹), <백록원>(임홍빈 옮김, 한국문원 펴냄)의 천중스(陳忠實), <아이들의 왕>(김태성 옮김, 물레 펴냄)의 아청(阿城)이 이 계열에 속한다. 심근문학의 범주를 조금 넓히면 지청(知靑)문학과 소수민족 문학까지 포함할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작품이 출간되었으니 이른바 ‘중국소설 붐’이 일어날 만도 한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한국 작가의 중국 관련 기업소설이 위세를 떨치고 있다. 2013년에 시작된 <정글만리>(조정래 지음, 해냄 펴냄) 붐은 금년에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노벨상 수상 작품을 포함한 중국 소설이 한국 작가의 기업소설의 위세에 기를 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왜일까? 정녕 한국 작가의 수준이 중국 작가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기 때문에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일까? 그런 식으로 해석하자면, 왜 한국 작가는 노벨상 프로젝트 운운 하면서도 노벨상 문턱을 넘지 못하는 것일까?
물론 그것은 완벽한 텍스트가 아니다. 백년간의 격절을 뛰어넘어 문득 우리에게 닥쳐온 중국을 이해하고 논하기 위한 출발점일 뿐이다. 우리는 <정글만리>가 제공한 정보를 토대로 중국이라는 두터운 텍스트를 해부하고 재구성해야 할 것이다.
해부와 재구성을 위해서는 학습이 필요하고, 소설은 유용한 학습 도구 가운데 하나다. 소설 읽기가 취향에 영향을 받는다면, 중국 소설은 아직도 한국 독자들의 취향과 접맥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 문학과 관련된 독서 대중의 취향은 <삼국연의>와 <수호전> 그리고 <서유기> 등에 머물러 있는데, <정글만리>가 이들과 공유하는 것이 바로 장회체(章回體) 장치다. 연속극처럼 매 편 마지막에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을 배치하고 그 다음 편을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장치가 장회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정래는 뛰어난 작가적 후각으로 장회체라는 장치를 터득해 응용하고 있는 셈이다.
포스트사회주의 중국에 대한 인식을 심화 확대시키기 위해서는 중국 소설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필요하다. 서두에서 거론한 여러 작가들은 개혁개방 이후 급변하는 중국을 이해하는 데 더 할 나위 없는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다. 안내를 잘 받기 위해서는 안내자의 스타일을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 중국 작가들은 한국 작가들과도 다르고 기타 외국 작가들과도 다른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파악하는 것은 일정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고, 또 다른 수준의 중개자(moderator)가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번역자라는 중개자의 도움을 받아, 소설가 옌롄커를 중국 사회의 안내자로 소개해 보려 한다.
2.
게다가 2008년 <풍아송>이 출간된 지 몇 년 되지 않아 수십 편의 평론과 연구논문이 나왔다는 사실로 이 작품에 대한 중국 내 평가를 짐작할 수 있다. 문(文)의 전통이 승(勝)한 중국이고 우리 인구의 30배 가까운 규모를 자랑하기에 단순 비교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 해도 100편에 가까운 평론과 논문은 <풍아송>을 괄목상대하게 만든다.
옌롄커를 따라 다니는 수식어는 다양하다. 번역본 말미의 ‘옌롄커 연보’를 따르면, “서사에 자아를 개입”했다는 평가부터 “영웅주의와 이상주의 서사에 대한 반기”, “영혼에 대한 탐색”, “농민의 아들”, “부조리 서사”, “노골적(hard-core) 리얼리즘”, “서사를 지속시키는 원동력은 고통과 자학”, “고통의 용기 있는 수용”, “근원 탐색”, “민족의 정신사이자 영혼의 종교사, 생명의 속죄사”, “부조리 현실주의”, “중국에서 가장 쟁의가 많은 작가”, “글쓰기의 반도(叛徒)”, “신실(神實)주의”, “신성 모독”, “불량한 창작 경향” 등 각양각색 평가가 즐비하다. 그리고 루쉰문학상, 라오서문학상, 백화상, 상하이 우수소설상 등 수많은 문학상을 수상하고 세계 각국의 유명대학에서 강연과 문학포럼도 수없이 다녔다.
위의 수식어들을 찬찬히 훑어보면 그가 단순하게 문자를 희롱하는 작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이전 수준의 외침과 탄식으로는 현재 중국의 괴이한 현상에 대응할 수 없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포르노적인 상상력’을 발휘해 황당함으로 현실의 황당함을 묘사하고, 현실 체제에서 불청객인 욕망과 악성(惡性)을 두드러지게 묘사했다. 신체의 왜곡과 변형 그리고 색정화는 그의 상용 수법이다. 그리고 눈물이 아니라 웃음이 그가 호소하는 독서효과다. 그러나 그 웃음은 때론 과도해 엽기적이기도 하다.
3.
옌롄커는 이 소설을 자신의 ‘정신적 자전’이라 일컫는다. 주인공에게 자신의 이름자 하나를 주어 양‘커’(楊‘科’)라 명명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옌롄커는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대학과 시골에 대해 쓰고 있다. 원제를 ‘귀향’이라 한 것은 바로 시골 출신의 지식인이 기를 쓰고 베이징의 유명대학 교수가 되어 적응하려 했지만, ‘수치와 억압 속에서 자아존재의 자리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썼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 과정은 순탄치 않다. 주인공이 베이징에서 겪었던 것과 고향에 돌아와 겪은 일들은 그 구조에서 일맥상통한다.
<풍아송>의 서사를 주도하는 주인공 양커는 농촌에서 왔고 베이징대학으로 보이는 칭옌(淸燕)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최고학부의 교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비하와 자기연민이 가득하며 자만과 허영의 습성을 가지고 있다. 그는 또한 몽상과 광상에 빠져있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용기는 결여되었다. 그의 의식은 애매하고 항상 피동적이다. 몇 차례 주도하려 발버둥을 쳐보지만 번번이 무시당하고 좌절당한다.
소설은 칭옌대학에서 시작한다. 주인공 양커는 <시경> 전문가로, 막 <시경>에 관한 전문저서의 원고를 마치고 집에 돌아간 날 부인과 부총장의 간통 장면을 목격한다. 그러나 양커는 화도 내지 않고 두 사람 앞에 무릎 꿇고는 “제발 다음부터 그러지 마라”고 부탁한다. 이런 양커의 태도는 독자를 당황하게 만든다. 사실 양커가 간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정부(情夫)가 자신이 상대할 수 없는 권력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름 작은 꾀를 내어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 하지만, 결국 학교에서 쫓겨나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다시 그곳에서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간다.
요즘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에서 말하는 마음은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체화된 마음(embodied mind)’이다.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은 마음도 일정한 조건이 충족되면 다시 표현되곤 한다. 양커의 욕망은 그의 비루한 잉여적 성격으로 인해 잠복해 있다가 엽기적으로 배설되곤 한다는 측면에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소시민의 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옌롄커는 한국 독자들에게, 21세기 중국은 공산독재와 짝퉁천국으로 얼룩져 있는 ‘짱꼴라’의 나라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말하는 듯하다. 갖가지 인간들이 각자의 수준에서 온갖 일을 벌이며 왁자지껄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다양한 모습은 우리와 겹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우리의 중국 학습은 또 중개자의 매개를 거쳐 새로운 안내자를 찾아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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