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콜린 헨리 윌슨은 영국의 저술가이다. 그는 노동 생활을 전전하면서 엄청난 독서량을 축적하고, 거기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삼아 비평서 <아웃사이더>(1956, 한국어판 범우사 펴냄, 1997)를 내놓고 일약 스타가 되었다. 그는 이른바 '앵그리 영맨'의 일원으로 분류되었다가 인생의 부침을 일찌감치 경험했지만, 오히려 그 이후부터 그 자신의 이론을 꾸준히 밀고 나아가 관련 서적을 다양하게 발표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이 바로 작년(2013년) 이다.
그의 저서는 크게 두 종류이다. 비평서와 소설. 비평서가 다룬 주제들을 보면 얼핏 그의 관심사가 아주 다양하며 주제 간 연관성이 적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를 테면 그는 소위 오컬트 분야, 연쇄살인, 문학, 세계의 불가사의 등 독특한 소재로 꾸준히 글을 썼다. 이를 두고 콜린 윌슨이 영리하지만 조잡한 괴짜 저술가였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그가 말년에 이르러 초기의 명민함을 잃은 건 사실이지만, 단순한 괴짜라는 표현은 지나친 폄하일 것이다.
사실 그의 출세작 <아웃사이더>는 알베르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과 궤를 같이하는 저술이며, 방향은 조금 독특할지언정 그의 다른 저작들도 목표만은 그 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즉 그는 카뮈와 마찬가지로 '현대의 인간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다른 저작들 역시 거의 대부분 같은 문제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아웃사이더>에서 암시한 결론에서 그리 많은 걸음을 떼지 못한 채 신비주의와 초자연현상에까지 발을 내딛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잠든 채 살고 있다.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런데, 깨어난 상태란 무엇인가.' 콜린 윌슨은 그 한 마디를 하고 싶어 길고 지루하기까지 한 원고들을 쌓아올리고, 종국엔 그다지 훌륭한 답을 내놓지 못한 셈이다. 그가 나름 결론이라고 제시한 것들 가운데 일부는 다소 엉뚱하거나 유사과학적인 주장들과 맞닿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에 소개하게 된 <정신기생체>(김상훈 옮김, 폴라북스 펴냄)가 있다. 이 작품은 형식적으로 보자면 2100년까지 내닫는 SF이다. 하지만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듯이 전반적으로 러브크래프트의 여러 작품에서 분위기를 빌려 온데다가, 고딕 소설과 호러 소설에 스팀펑크 풍까지 뒤섞어 놓았을 뿐더러 이어지는 사건과 설명이 아무런 논리적 필연성 없이 늘어서 있다 보니 일반적인 독자들이 익숙한 현대 SF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띤다.
줄거리는 아주 간단하다. 주인공인 길버트 오스틴은 (작품이 발표된 1967년에서 바라보자면 미래의) 고고학자이다. 그는 친구이자 학자인 카렐 바이스만이 갑자기 자살했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워하고, 그의 유고들을 떠안게 된다. 하지만 카렐의 원고에는 놀라운 사실이 적혀 있었다. '정신기생체'가 오래 전부터 인류의 생명력을 빨아먹고 있으며, 그 착취에서 벗어난다면 인류가 억눌려있던 진정한 능력을 발휘하고 제대로 진화를 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길버트는 친구의 주장이 맞다는 증거를 발견하고, 자신에게 내재된 힘을 캐내는 동시에 동료들을 모아 정신기생체들을 무찌르는 대장정에 나서게 된다.
그렇게 본다면 콜린 윌슨에게 SF라는 형식은, 그리고 이 작품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인류는 잠든 채 살고 있다'가 '미지의 생명체가 우리 눈을 가리고 있다'로 (알기 쉽게) 대체되었을 뿐이다. 문제를 대상화하면 그 다음엔 무찌르는 일만 남는다. 하지만 우리의 무의식을 장악하고 있는 괴물을 어떻게 무찌르면 좋을까. 인간이 그보다 더 큰 힘을 갖추면 된다. 콜린 윌슨은 다른 저작을 통해 이른바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훈련을 통한 각성'을 요구한 바가 있는데, 본서에서 그 각성은 초능력이라는 장치로 등장한다.
SF의 관점에서 본서를 재단하자면 칼을 댈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작품 내에 등장하는 '생명력'에 관해서는 별 다른 설명이 없고, 공동무의식을 언급하면서 카를 구스타프 융을 인용하는 것만으로 발뺌을 하고, '광자 돛으로 작동하는 우주선'과 환각을 이용해 세계 대전을 막기까지… 게다가 이 모든 사건들은 마치 철사로 바느질을 한 파티용 옷처럼 조화를 이루지도 못한다.
하지만 조금만 시선을 달리하면 <정신기생체>는 (작가가 유명 호러물의 분위기를 그대로 가져왔음에도) 유쾌함을 획득한다. 콜린 윌슨은 SF라면 응당 거부해야 할 유사과학적 설정을 작품 안으로 모조리 끌어들인다. 고대 문명, 생각의 전환만으로 기본 물리 법칙 따위는 '원자 단위로' 부숴버리는 초능력 등… 다시 말해 요즘의 용어를 빌자면 이 작품은 컬트 SF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것이다. 따라서 콜린 윌슨의 '신실존주의'가 무엇인지 관심을 가져본 독자라면 한층 더 크게, 호의를 가지고 웃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실존주의가 마블 코믹스에서 볼 법한 각종 요소들과 버무려지는 광경을 보고 있자면 한편으론 마음이 후련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안쓰러운 생각이 들게 된다. 아마도 그는 여러 작가와 작품과 세상과 인류 전체를 비난하거나 질책하기보다는 격려하고 돕고 싶었을 것이다. 본서의 주인공인 길버트 오스틴처럼. 길버트는 일사천리로 문제를 해결하고 인류를 구원했지만, 콜린 윌슨이 그런 목적에 일조를 했는지는 아마 사람에 따라 다르게 대답할 것이다.
그러니 독자분들께서는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본서를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소설은 반평생에 걸쳐 인류가 정신적 진화를 획득하는 길을 추구했던 작가가 SF의 형식을 일부 빌려와서 만든 무협지에 가깝다. 이 작품을 집필할 당시의 콜린 윌슨은 아직 초기의 명민함을 유지하고 있었는지 곳곳에서 번뜩이는 통찰도 엿볼 수 있다. 거기에 더해 '인류를 지배하던 미지의 존재'라는 전통적인 SF 요소가 곁들여져 있으니, 잘만 하면 세 가지 요소를 책 한 권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노파심으로 덧붙이거니와, 이 작품 때문에 SF는 유사과학까지 무제한 포용한다는 오해는 하지 말아주셨으면 한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둘 사이의 경계에 대해서도 장광설을 늘어놓아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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