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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의 동성애, 세종의 반응은…

[낮은 한의학] 문종의 건강학 ②

조선 왕의 건강을 살펴보는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전 대구한의대학교 교수)의 '낮은 한의학' 연재가 매주 수요일 계속됩니다.

이상곤 원장이 조선 왕의 건강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당시 왕들의 모습이 오늘날 현대인의 그것과 아주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왕들은 산해진미를 섭취하였지만 격무와 스트레스, 만성 운동 부족 등으로 건강 상태는 엉망이었습니다. 이 원장은 "왜 왕처럼 살면 죽는지를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현대인의 바람직한 건강 관리법을 알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번 연재의 주인공은 문종입니다. 알다시피, 문종은 조선 초기 나라의 기틀을 확실히 잡은 세종의 뒤를 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불과 2년 만에 세상을 뜨고, 단종이 그 뒤를 이었죠. 조카 단종을 왕에서 끌어내린 '비정한 삼촌' 세조의 얘기는 우리가 아는 대로입니다. 이런 비극 탓인지, 문종은 '병약한' 또 '무능한' 이미지가 컸습니다.

하지만 문종은 건강이 나빴던 세종의 사실상의 정치 파트너였습니다. 세종 말기에는 건강이 나빠진 아버지를 대신해 아예 왕 노릇을 대신하기도 했지요. 즉, 세종의 태평성대는 세종 혼자만의 업적이 아니라 문종 그리고 그 둘의 후원을 받았던 일군의 선비들의 합작품이었던 셈입니다.

만약 문종이 그렇게 빨리 세상을 뜨지 않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또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은 오늘 이런 상상을 부추깁니다. <편집자>

(☞관련 기사 : 문종의 건강학 ① 세종은 왜 단종의 비극을 막지 못했나?)

등창은 종기로 대표되는 옹저의 한 부분이다. 옹저가 생기는 원인에 대해 <동의보감>은 이렇게 설명했다.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자기의 뜻을 이루지 못하면 흔히 이 병이 생긴다."

문종은 조선의 역대 왕 중 드물게 장자 계승의 원칙을 지킨, 정통성에 문제가 없는 왕이다. 그의 스트레스 원인은 바로 부인에게 있었다. 그는 세 번이나 홀아비가 됐던, 개인사가 불행한 왕이었다.

실록은 세종 11년 7월 20일 문종의 첫 부인 휘빈 김 씨를 폐비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문종은 상호군 김오문의 딸과 결혼했다. 김오문은 태종의 후궁인 명빈 김 씨와 남매지간으로 인척 관계였다.

"내가 전년에 세자를 책봉하고, 김 씨를 누대 명가의 딸이라고 하여 간택하여서 세자빈을 삼았더니, 뜻밖에도 김 씨가 미혹하는 방법으로 써 압승술(주술을 쓰거나 주문을 외어 음양설에서 말하는 화복(禍福)을 누르는 일)을 쓴 단서가 발각되었다. 과인이 듣고 매우 놀라 즉시 궁인을 보내어 심문하게 하였더니, 김 씨가 대답하기를 '시녀 호초가 나에게 가르쳤습니다' 하므로 곧 호초를 불러들여 친히 그 사유를 물으니, 호초가 말하기를 '거년 겨울에 주빈(主嬪)께서 부인이 남자에게 사랑을 받는 술법을 묻기에 모른다고 대답하였으나, 주빈께서 강요하므로 비(婢)가 드디어 가르쳐 말하기를 "남자가 좋아하는 부인의 신발을 베어다가 불에 태워 가루를 만들어 가지고 술에 타서 남자에게 마시게 하면 내가 사랑을 받게 되고 저쪽 여자는 멀어져서 배척을 받는다 하오니, 효동 덕금 두 시녀의 신을 가지고 시험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했는데, 효동 덕금 두 여인은 김 씨가 시기하는 자다. 김 씨는 즉시 그 두 여인의 신을 가져다가 자기 손으로 베어내 스스로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이나 하여 그 술법을 써보고자 하였으나 그러한 틈을 얻지 못하였다고 한다. 호초가 또 말하기를 '그 뒤에 주빈께서 다시 묻기를 "그 밖에 또 무슨 술법이 있느냐"고 하기 에비가 또 가르쳐 말하기를 '두 뱀이 교접할 때 흘린 정기를 수건으로 닦아서 차고 있으면 반드시 남자의 사랑을 받는다' 하였습니다."

▲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세종(한석규). ⓒKBS

두 번째 부인은 조선왕실 최초 동성애 스캔들의 장본인인 세자빈 봉 씨다. 창녕 현감을 지낸 봉여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았는데, 궁중의 여종 소쌍과 동성애를 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세종 18년 10월 26일 기록은 이렇다.

"내가 중궁(왕비를 높여 이르던 말)과 더불어 소쌍을 불러서 그 진상을 물으니, 소쌍이 말하기를, '지난해 동짓날에 빈께서 저를 불러 내전으로 들어오게 하셨는데, 다른 여종들은 모두 지게문 밖에 있었습니다. 저에게 같이 자기를 요구하므로 저는 이를 사양했으나, 빈께서 윽박지르므로 마지못하여 옷을 한 반쯤 벗고 병풍 속에 들어갔더니, 빈께서 저의 나머지 옷을 다 빼앗고 강제로 들어와 눕게 하여, 남자와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희롱하였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실록에는 봉 씨의 죄목이 질투심이 많고 아들을 낳지 못했으며 남자를 그리는 노래를 불렀다고 적혀 있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동성애는 지금도 터부시하는 이들이 많다. 조선 초에는 이보다 훨씬 더 심했을 것이다. 세종도 자신의 며느리가 저지른 죄목을 차마 입에 담기 부끄러웠을 것이다.

세 번째 세자빈은 권전의 딸로, 딸을 낳은 후궁이었다. 권 씨는 마침내 아들을 낳는다. 세종은 원손을 얻은 기쁨에 대사면령을 내린다. 그런데 사면령을 발표하는 교지 읽기를 마치자마자 의전용 촛불인 대촉이 갑자기 땅에 떨어졌다. 암시였을지 모르지만 권 씨는 아들을 낳은 바로 이튿날 세상을 떠난다.

세종은 곧바로 동궁전을 헐어버린다.

"궁중에서 모두 말하기를, '세자가 거처하는 궁에서 생이별한 빈이 둘이고, 사별한 빈이 하나이니, 매우 상서롭지 못하다. 마땅히 헐어버려 다시 거기에 거처하지 말게 하자'고 한다."

세 번이나 홀아비 신세가 된 문종이 느꼈을 심적 고통과 답답함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문종은 유교 원리주의자에 가까웠다. 기쁨과 슬픔을 밖으로 표현하지 않고 스스로 삭였으니 그 마음속의 화가 종기로 분출된 건 아닐까. 세종이 승하한 사흘 뒤인 2월 20일 문종의 증세는 악화일로를 걷는다.

전일 난 종기가 낫지 않았는데, 또 종기가 발생했다. 황보인, 정인지 등은 여막(궤연 옆이나 무덤 가까이에 지어 놓고 상제가 거처하는 초막)살이와 빈객 접대를 하지 말라고 극구 말린다. 아버지의 장례임에도 종기의 증세가 심해 회복을 가늠하기 힘들었다는 방증이다.

즉위년 3월 17일과 22일, 4월 6일, 5월 4일의 기록을 보면 종기에 딱지가 앉으면서 아물어가자 문종은 세종의 빈전으로 가려 하고 승지와 대신들은 만류하면서 옥신각신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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