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유명한 역사학자 E. H. 카(Edward Hallett Carr)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 사회 근현대사 해석은 '대화'가 아닌 '갈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친일파 문제, 대한민국 정통성 문제, 교학사 교과서 왜곡 문제 등 굵직하고도 해묵은 논쟁은 모두 '근현대사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와 맥을 같이 하며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다.
숙명여대 이만열 명예교수, 그는 평생을 역사학계에 몸담아 왔다. 그리고 단호하게 얘기한다.
"우리나라는 식민지근대화론이 아니라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통해서 자유를 확보했고, 이 자유가 인간의 창의성을 자극하면서 경제적인 열매로서 산업화도 이뤄졌다. 산업화를 통한 민주화가 아니라 민주화를 통한 산업화다. 여기에 그 민주화와 창의성을 담보한 것이 바로 자유다. 자유는 무한한 가능성이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분단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매카시즘적 '종북몰이'를 서슴지 않는 사람들과 작금의 현상에 대해 이만열 교수는 허탈해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나는 종북주의자로소이다'라고 커밍아웃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렇게 함으로써 '종북'이라는 말 자체를 희화(戱畵)화시켰으면 좋겠다. 그러면 지금까지 입에 거품을 품고 '종북'을 외치는 자들이 오히려 머쓱해질 때가 오지 않겠나."
엄혹한 군사독재였던 시절, 민주화의 불꽃은 늘 청년들로부터 시작됐다. 청년들이 시대의식을 공유하고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끝없는 경쟁과 승자독식으로 청년이 아파야 하는 것이 당연시되어버리고, 살아남기 위해 스펙 쌓기 전쟁에 뛰어들어야 하는 피로한 세대가 되었다. 이만열 교수는 젊은 청년들에게 시대의식을 가지고 입을 열기를 당부한다.
"젊은이들이 먼저 정의로운 나라와 옳은 의를 구하는 일에 힘쓰고, 역사 의식을 통한 시대 의식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래야만 직장 문제와 장래 문제가 해결된다. 지금처럼 알알이 다 흩어진 상태에서 연대가 없고 정의를 세우는 일에 힘쓰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고 싶다."
- 1938년 남한도 북한도 아닌 식민지 조선인으로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 유소년기 1945년 식민지 해방과 1948년 남북분단, 1950년 6.25 한국전쟁과 영구분단 등 한반도 격정의 순간을 다 겪었다. 어릴 때 이야기가 궁금하다.
일제 강점기 말에 태어나 1945년 초등학교 1학년 때 해방됐다. 그때까지는 시골에서 자라 특별히 민족교육을 받은 적 없고 우리 역사에 대해서도 별로 들은 것이 없었다. 해방될 무렵부터는 기억나는 게 많은데, 8월 15일 해방되던 날, 마을 어르신들이 흰옷을 입고 나와 손에 대한민국 국기를 들고 "만세, 만세!"하면서 기뻐했다. 그 광경이 눈에 선하다. 면사무소 앞에 신사(神社)가 있었는데, 해방의 기쁨을 만끽한 지 얼마 안 돼 신사를 불태웠다. 그때야 우리나라에 큰 변화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원래 우리 집안은 할머니 때부터 예수교를 받아들여 교회에 다녔다. 어릴 때 다니던 교회는 할머니, 아버지, 삼촌들이 힘을 합쳐 세운 교회였다. 개울가의 큰 자연석을 이용해 만든 참 아름다운 교회였다. 그러나 일제 말, 교회에 대한 핍박이 심해져 문을 닫았다. 나는 학교에서 민족의식을 배웠다기보다 교회 주일학교에서 우리 민족의 고단한 역사를 배웠다고 자부한다. 주일학교에 다니면서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했는데, 우리 역사와 관련한 설명에 감명 깊은 역사적 교훈을 얻었다.
애굽(Egypt)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한 모세, 골리앗과 싸워 승리한 다윗,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는 삼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지만 자기 조국을 향해 열심히 기도한 다니엘 등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러면서 은연중에 이스라엘을 혹독하게 부리던 애굽이 우리를 압박하는 일본으로, 골리앗은 일본군으로 생각하게 됐다. 어린 마음에 애국심 같은 것이 조금씩 생겼다. 이때 가지게 된 나라 사랑의 마음이 평생 떠나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그때 주일학교에서 그런 역사의식을 가르쳐 준 선생님들을 고맙게 생각하고 존경한다.
해방 직후, 나라를 찾은 기쁨이 컸지만 동시에 좌우대결로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내가 살던 곳은 비록 남쪽 시골이었지만 좌우대결로 비극적인 경험을 했다. 자고 나면 간밤에 어느 동네 구장(동장)이 죽창에 찔려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면 돌아간 분을 위해 면민들이 모여서 장례식을 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우리도 거기에 참석시켰다. 이런 걸 보면서 어렴풋이 '무엇 때문에 서로 죽여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고장에서 일제 강점기 때 대학을 나온 사람 중 몇몇은 몸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가거나 집에 있더라도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고 은인자중(隱忍自重)했다. 당시 들리는 말로, 그들은 소위 '빨갱이'라고 했다. 아이들 사회에서도 그 집 애들을 약간 경계하는 분위기도 없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 초등학교 6학년이 됐을 때 6.25 전쟁이 터졌다. 여름방학이 되기까지 학교 선생님을 통해서 들은 이야기는 '우리 국군이 잘 싸워 승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나고 보니, 당시 이승만 정권은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거짓 정보를 계속 유포했던 것이다. 여름방학 한 달이 채 안 돼 마산에서 진주로 가는 화물열차가 미국 군인과 탱크를 가득 싣고 바쁘게 움직였다. 며칠 뒤, 포 소리가 들리고 집 앞 도로변 개울에 미군이 포대를 설치했다. 부모님은 내게 동생과 생질을 데리고 경상남도 의령 자형 댁으로 피난시켰다. 그날, 합천과 의령을 거쳐 함안 쪽으로 후퇴하는 국군 패잔병을 많이 목격했다. 한 달 이상 객지에서 어려운 피난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과 3.8선 이남에 있던 사람들이 많은 고생을 했지만, 남쪽에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에게도 전쟁에 대한 아픈 상처가 있었고, 나 또한 그렇다.
아버지는 6.25 전쟁 전, 당시 낙동강 유역에서 유행하던 간디스토마에 걸렸다. 그런데 전쟁이 터지자, 약을 구하지 못해 1년 반 만에 돌아가셨다. 막내 자형은 서울에서 대학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당시 같이 있던 분 말에 의하면, 삼각산 임마누엘 수도원에 은신하던 중 친구 고자질로 납치돼 지금까지 소식을 모른다. 사촌 형 중 몇 명도 6.25 전쟁에 참전해 전사했다.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삼촌 두 분이 눈물을 흘리며 자식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전쟁의 아픔은 우리 민족 전체의 아픔이다.
- 어릴 때 목회자의 길을 가려고 했었다고 들었다. 어릴 때 꿈을 바꿔 역사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가 있나.
경상남도 마산에 있는 숙모 댁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숙모님은 신앙생활을 굉장히 열심히 하셨다. 숙모님은 내게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항상 강조했다. 그때는 어린 마음에 '나의 길은 목사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성(聖)과 속(俗),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인간의 삶과 신앙의 삶 등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전도하며 목사가 되어야만 성스러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다른 것은 다 속된 일이라고 가르쳤다.
지금 생각하면 잘못된 가르침이다. 하나님이 모든 영역을 다스린다면 모든 일은 다 하나님 일로 귀결되는데, 어떻게 목사가 되는 것만이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자연스레 목사가 되려면 신학교에 가야 한다고들 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고학년이 될수록 주변에서 신학교로 바로 가는 것보다 일단 대학에서 공부한 후, 신학교에 가는 게 좋겠다고 권유했다. 앞으로는 대학을 나온 목사가 필요할 것 같다고도 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때 한 녹색 색약 판정을 받고, 의대 진학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결국 신학 공부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철학, 역사, 종교학에 관심을 갖게 됐고 결국 역사학을 선택했다. 역사 공부를 하면 철학이나 종교학도 어느 정도 소화할 수 있을 것이며 신학 공부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대학에 와 보니,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은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기대했던 그런 학문이 아니었다. 실망도 많이 했지만, 철학·종교학을 기웃거리며 '앞으로 신학 공부를 하려면 서양사 공부를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대학 1·2학년을 보냈다.
당시에 학생이나 교사는 군 입대를 연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왕 갈 것, 얼른 갔다 오자'고 생각하고 대학 2학년 때 입영했다. 대학을 다니다 왔다고, 6사단 공병 대대 대대장실 당번병으로 근무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같이 근무하던 선 중위가 자신이 사단 정훈교육을 맡게 됐는데, 국사 강의를 하게 됐다며 국사 교육 교안을 만들어 오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2학년을 마칠 때까지 국사는 이병도 박사의 '국사개설', 그것도 절반 이상을 휴강한 강의 밖에 들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강의안 만드는 것을 못하겠다고 했더니, "S대학 다니다 온 놈이 그것도 못해"라면서 온갖 모욕을 줬다. 당시에는 여간 기분이 나쁘지 않았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그의 말이 옳았다. 대학을 다니다 왔으면 으레 역사는 좀 알아야 하고, 역사를 공부하려면 서양사가 먼저가 아니라 국사부터 공부해야지 국사도 모르면서 서양사를 한다는 게 말이 안 됐다. 더군다나 '한국에서 목사가 되겠다는 놈이 역사 공부를 한다면서 자기 나라 역사를 공부하지 않고 무슨 서양사를 공부한다고 하나' 싶어 심한 가책이 들었다. 군을 제대하자마자 마음을 고쳐먹고, 복학 후 2년 동안은 국사 과목 강의를 많이 들었다.
- 그래도 끝내 신학을 했다고 들었다.
대학을 졸업 후, 신학교를 갈 생각이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당시 내가 속한 고신교단 학교는 부산에 있었는데, 신학교에 가려면 부산으로 내려가야만 했다. 가장 보수적이라는 고신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공부할 신학도 교단신학 외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고신파가 얼마나 보수적이었는가 하면, 주일에 버스를 타거나 음식을 사서 먹는 것이 불가능했다. 일례로 대학 사학과에서 한 학기에 한 번씩 고적답사를 가는데, 보통 주일날을 끼워서 갔다. 나는 8학기 동안 이 답사에 한 번도 참여하지 못했다. 그 정도로 철저하게 보수적이었다.
보수는 지키는 무슨 가치가 있어야만 보수인데, 당시는 이런 외형적인 것을 보수라고 했으니 맹탕이었던 셈이다(웃음). 의식도 없이 형식만 맹종했던 것이다. 부산에 내려갈 용기가 없던 마당에, 취직돼 대학원부터 진학했다. 그럴만한 이유도 있었다. 예순 살 넘은 노모가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기만을 기다렸고, 동생도 세 명이나 있었다는 것이 지금의 내 변명이다.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친 후에도 부산행을 망설이다 대학 강사로 학교에서 강의하다 보니 자연스레 신학공부와 목회자가 되는 길에서 멀어졌다. 어릴 때 목사가 되겠다고 마음으로 서원도 했는데, 계속 마음의 부담이 있었다.
그러던 중 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시기가 왔다. 1980년 전두환 정권 초기 학원을 안정시킨다며 비판적인 교수들을 대학에서 내쫓았는데, 겁이 많은 나도 거기에 끼었다. 전국적으로 약 80명 정도 됐다. 학생 간부들도 학교에서 내쫓겼다. 뿐만 아니라 신문, 방송사에서도 정부에 비판적인 기자들을 내쫓았다. 그동안 신학 공부를 했다. 그러나 교회법에 따른 목사 안수는 받지 않았다.
- 일제 치하 '신사참배' 문제는 기독교계에서 민감한 사안이었다. 기존 역사학계는 목회자들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종교적으로만 한정시켰는데, 얼마 전 손양원 목사 중동고 명예졸업 세미나에서 "목회자들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가장 적극적인 민족주의 운동이다"라고 했다. 어떻게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민족운동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는가.
내가 했던 말을 정확하게 되풀이하자면, '기독교의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는 민족운동적 성격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 자체를 '민족운동'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일제는 1931년에 만주사변, 32년에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졌던)상해사변, 37년에 중일전쟁에 이어 41년에는 태평양전쟁으로까지 확대시켰다. 전쟁을 위해서는 일본 본토뿐만 아니라 대만, 조선 사람들까지 옥죄어 전시체제를 강화해야 했다. 이런 체제에서 당시 식민지 조선의 말과 글, 역사를 말살했고 더 나아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그들은 이것을 '황국신민화' 정책이라 했지만, 사실상 ‘민족 말살’ 정책이나 다름없었다. 신사는 일본의 국조신인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를 위시한 당시 현존한 천황도 숭배의 대상이었다. 일본은 전쟁 무사들을 포함해 일본을 위해 죽은 사람들도 신으로 모시고, 신사에 참배하라고 했다.
내가 신사참배반대투쟁을 민족운동과 관련시킨 것은 두 가지 관점에서다. 첫째는 신사참배가 민족말살 정책의 일환이었다면 거기에 반대한 것은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에 저항한 셈이다. 따라서 민족말살 정책에 투쟁한 신사참배반대투쟁은 민족주의 운동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한글운동과 관련해 최현배·김윤경·이희승·이윤재 선생 등이 한글수호운동으로 옥고를 치르는 등 죽임을 당했는데, 이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다만, '민족운동적 성격을 부여할 수 있다' 정도로만 말한 이유는 신사참배를 반대한 이들이 신사참배반대투쟁을 민족운동이라고 표방하면서 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종교적인 이유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경 십계명 중 1,2계명에 나오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해서 신사에 참배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당시 신사참배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민족주의적 성격이 굉장히 강했다. 주기철 목사는 남강 이승훈 선생이나 조만식 선생으로부터 철저한 민족주의 교육을 받았다. 거창 지역 주남선 목사는 젊을 때 3.1운동에 앞장섰던 사람이었고 후에 국내에서 만주 독립군 자금을 모금하는 일을 했다. 그도 나중에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목사가 돼 신사참배문제가 터졌을 때 반대투쟁 선봉에 나섰다.
둘째는 손양원 목사와 관련해 볼 때 신사참배 반대가 일본의 국체를 부정하는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당시 신사참배 반대투쟁을 한 다른 사람들은 검사나 경찰 심문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은데 비해, 손양원 목사 자료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손양호 목사 외 다른 사람들은 주로 평양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자료를 구하기 힘들거나 기록이 망실됐을 가능성이 있다.
반면, 손양원 목사는 서울·광주·청주 교도소에서 3년 이상 심문을 받았다. 심문의 내용을 보면 손양원 목사의 입장은 분명하다. 당시 일본은 천황을 '현인신(現人神)'이라고 하면서 숭배했는데, 손양원 목사는 '어떻게 인간을 신이라고 할 수 있느냐'며 부정했다. 일제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헌법에 나온 국체(國體)를 부정한 것이다. 물론 손양원 목사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신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지극히 종교적인 입장에서 부정한 것이지만, 그들에게는 이는 국체를 부정하는, 지금으로 말하면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이었다. 일본의 국체를 부정했다는 점에서 이보다 더 큰 '민족운동'이 있을 수 있을까? 이보다 더 강력한 '독립운동'이 있을 수 있을까? 교회사(史) 연구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잘 하지는 않지만, 이제 죽을 나이가 돼서인지 이런 말을 하게 된다(웃음).
- 여러 강의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 친일파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책임이 교회 안에서 친일 잔재청산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한국 교회가 친일파청산에서 간과한 것이 무엇인가.
일제하에서 신사참배를 했던 사람들이 해방 이후 여러 변명을 하며 회개하지 않았다. 마땅히 '그때 본인들이 인간적으로 나약해서 넘어졌다'고 고백하고, 교회와 교우(敎友)에게 용서를 구한 뒤 자기의 거취를 분명히 해야 했다. 하지만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른 사람들은 한국 교회가 신사참배한 죄를 회개하는 의미에서 적어도 3개월 동안 설교도 하지 않고 자숙하며, 3개월 후 교회의 결정을 따르겠다고 제안했다. 이 정도가 최소한의 제안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한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제안을 거부했다. 그들은 오히려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신사참배를 했다며 자기변명에 열을 올렸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끝까지 내려놓지 않은 셈이다.
일제 강점기 말, 한국 교회의 친일행위는 신사참배로 집약될 수 있다. 신사참배 후 교회에 가미다나(神棚, かみだな) 같은 신단(神壇)을 만들어 숭배하기도 하고, 교회 종을 헌납하기도 했으며, 급기야는 국방헌금을 강요하기도 했다. 당시 교회의 타락을 이해하기 전에는 해방 후 옥에서 나온 사람들이 왜 그렇게 철저하게 회개운동을 외쳤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해방 이후 신사참배 반대투쟁을 한 사람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생겨난 교단이 '고려파'다. 옥에서 나온 성도를 중심으로 한국 교회 개혁을 외치다 기득권 세력에서 밀려나 세워진 교단이다. 그들이 세운 학교가 부산의 고려신학교다.)
만약 당시 교회가 내부의 친일문제를 제대로 정리했다면, 어떤 효과가 있었겠나. 종교의 영적 힘을 가지고 우리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본다. 교회가 사회를 향해 "우리가 이렇게 친일잔재를 청산했으니 우리 사회도 친일잔재를 청산합시다!"라고 외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친일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함으로써 한국 사회를 향해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벙어리가 됐다. 해방 정국에서 교회가 예언자로서 친일청산을 외쳤어야 하데, 외칠 영적 능력이 없어진 것이다.
- 오늘날 기독교가 심하게는 '개독교'라는 비판까지 받고 있다. 신앙인으로, 역사학자로 기독교의 변천사를 지켜본 입장에서 안타까운 심정일 것 같다.
친일 행위로 기득권을 잡은 세력은 이후에도 '교회를 이렇게 이끌어가도 되는 구나'라며 교회 이권화(利權化) 작업을 계속했다. 개혁의 목소리, 소수의 목소리가 교회 안에서 없어져 버렸다. 거기에 교회를 키우기 위해서 온갖 세속적 방법을 동원했다. 이런 문제 모두가 꼭 친일잔재 청산과 관련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회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큰 책임이 있다. 신사참배를 회개하고, 바른 목회 활동에 나선 사람들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해방 후 특히 한국 교회가 양적 성장을 추구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터져 나왔다. 그것이 오늘날 기독교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고 있다.
양적 성장을 추구하던 시기에 한국 교회가 저지른 많은 잘못 가운데 하나만 지적하겠다. '복(福)'과 관련된 문제다. 그들은 요한 3서 2절에 나온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는 말을 '예수 잘 믿으면, 돈 잘 벌고 건강하게 된다'고 풀이하면서 '3박자 축복'이라고 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예수가 가르친 '복'과는 달랐다.
예수가 마태복음 5장에서 팔(八)복을 이야기할 때는 △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 △ 애통해 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 △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다,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이 있다, △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복이 있다, △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 △ 평화를 만드는 자가 복이 있다,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다. 여기에 추가해 사도행전 20장에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예수가 가르친 '복'을 비틀어서 세상 사람들이 즐겨 찾는 복으로 만들어 버렸다. 돈 잘 벌고 건강해지는 것을 복이라고 한 것이다. 무교(巫敎)에서 구하는 복과 다를 것이 없게 됐다. 신자들이 교회에 와서 이런 복을 구하고 있으니, 예수가 말하는 '복'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런 복으로 유혹하면서 신자를 기복적인 신앙으로 끌어가고 있다. 결국 외적으로는 교회가 성장하는 것처럼 보여도 영적으로는 침체돼 버렸다.
한국 교회 운영 메커니즘이 자본주의와 대형교회 중심이 된 것 또한 지적하고 싶다. 목회자의 목표가 '어떻게 하면 교회를 키우고 교인을 수적으로 늘리는가'에만 있다. 여기에는 성숙보다는 성장이 우선이었다. 그런 존재양식이 물질적 왕국을 형성하고 교권(敎權)을 형성한다. 이것이 한국 교회를 어지럽히고 교회의 영성을 그르치고 있다. 기업을 경영하듯이 한국 교회를 경영하느라, 예수의 복음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졌다. 교회와 지도자의 세속화는 각종 스캔들로 뒤범벅이 되었고, 세상으로부터 '개독교'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교회가 정화(淨化)되어야 하는데, 이런 식이면 그럴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한 사회에서 종교의 타락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 사회 전체를 동반 타락시키는 법이다. 걱정할 단계를 넘어서고 있다.
- 2003년부터 교육부 산하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으로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관여했다. 민족문화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당시 국사편찬위원회는 지원 예산 반환을 추진했고, 반대 측에서는 '살생부'라며 소송을 벌였다. 결국 법정 공방 끝에 승소해 2009년 11월 8일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됐다.
나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반대할 아무런 명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같은 견해를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에게 제출하고 다른 위원들에게도 알렸다. 그 뒤, 국사편찬위원장이 됐다(2003년 6월부터 2006년 8월까지 역임).
친일인명사전은 내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 되기 전,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 위원장으로 추진하던 것이었다. 당시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1∼2년 내 인명사전을 내자고 논의했는데, 살펴보니 문제가 많았다. 그래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료를 더 수집해서 정확한 근거를 갖고 편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전이 출간되면, 이름이 거론된 이들의 후손들이 틀림없이 법적 대응을 할 것이기 때문에 정확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중요했다. 또 사전에는 '이 사람은 이렇기 때문에 친일파다'라고 설명할 필요는 없고, 다만 '이런 자료에 의해 그 사람의 행적에 이런 기록이 있다'는 정도로만 서술하자고 했다. 그가 친일파인지 아닌지는 제시된 자료에 의해 독자가 판단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실제로 현재 친일인명사전을 보면, 사전편찬위원회가 정한 기준에 따라 그 기준에 해당하는 사람을 사전에 올리되 '이 사람이 이래서 친일파다'라고 기록하지 않고 '아무개가 언제 났으며, 어디서 무슨 일을 했다'는 것만 제시해 놨다. 그렇다 보니, 후손들도 인물에 대한 서술을 가지고는 항의할 수 없다. 다만, 사전에 기록된 행위와 관련해 '왜 그런 기준을 사용했는가'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는 있다.
그 후 2005년 국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진상규명법'이 제정, 법적 기구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됐다. 법은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규정하는 데 있어 군인은 장교급 이상, 법관은 판사급 이상 등을 기준으로 1005명을 명단에 올렸다. 이것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출판한 것과 조금 달랐는데,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더 엄격한 잣대로 총 4389명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했다.
- 2012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이승만과 박정희로 대표되는 한국 근현대사를 그린 <백년전쟁> 다큐멘터리 제작에도 참여했다.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했다기보다는 격려한 정도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하는 일은 자주 격려했다. 숙명여대 교수와 국사편찬위원장 은퇴 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근현대사와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며 자문을 구했다. 거절하지 않았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역사적으로 이미 심판을 받은 인물들이다. 새누리당 정권의 뿌리가 되는 역대 정부에서 이승만은 4.19 혁명으로 심판을 받아 쫓겨난 존재이며, 박정희의 5.16은 김영삼 정권이 '쿠데타'라고 규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가 정한 기준에 따라 이야기하면 문제가 없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이 이것을 뒤집으려 하고 진실을 호도하려고 했다.
이승만이 일제 때 독립운동을 했다고 하지만, 분명하게 내세울 만한 근거가 있는지 의문이다. 해방 후 그의 선창(先唱)으로 남한이 단정정부 설립을 도모했는데,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대한민국에 번영을 가져왔다는 주장이 요즘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완전통일독립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승만의 결정이 과연 옳았냐 하는 문제 제기도 있다.
이런 문제를 차치하고라도, 1948년 정부가 수립된 후 민주국가의 토대를 닦아야 할 시점에 이승만이 얼마나 심한 독재를 했는가. 정부수립 초기에 함께 활동했던 김구 등 많은 인사가 테러와 죽음을 당한 과정에서 이승만이 정말 무관했다고 할 수 없다. 그는 6.25 전쟁을 전후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라고 큰소리를 쳤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이는 이승만이 북쪽에서 남침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는 반증이다. 또 자신은 대전으로 내려가면서 서울에 있는 것처럼 속이고 한강철교를 폭파해 한강 이북을 생지옥으로 만들었다. 1951년 국민방위군 사건(1.4 후퇴 시기 국민방위군의 간부들이 방위군 예산을 부정 착복한 결과 철수 도중에 많은 병력들을 병사시킨 사건) 등으로 무고한 생명을 얼마나 많이 희생시켰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선거는 국회에서 했는데, 1951년 11월 30일 이승만 스스로가 직선제를 해야 한다고 들고 나왔다. 국회 의석만으로, 당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당시 자기 이름이 널리 알려진 국민들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는 발췌개헌을 통해 전시(戰時) 중에 직선제로 바꿨다. 그것을 마치 직선제를 통해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것처럼 보는 것은 잘못이다.(1952년 1월 8일 국회는 이승만의 직선제 개헌안을 부결시켰다. 그러나 그해 7월 경찰과 군인이 국회를 둘러싼 강압적인 상황에서 개헌안은 통과됐고, 8월 5일 실시된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선출됐다.)
어릴 때였지만, 이승만·이범석 등 대통령 후보 사진이 벽보로 붙어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이승만은 그 뒤 자신의 종신 대통령직을 위해서 1954년 11월 '사사오입' 불법 개헌을 했지만, 1960년 3.15 부정선거에 의해 결국 쫓겨났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불온한 사람처럼 취급당하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다.('사사오입(四捨五入)'은 대통령 3선 금지조항에 대한 국회 투표 결과를 이승만 정권이 수학의 4사5입론을 적용해 뒤집은 것으로, 장기 집권을 위해 헌법을 개정한 선례를 남겼다.)
- '교학사' 교과서의 역사 왜곡 논란으로 한동안 시끄러웠다. '좌편향이다, 우편향이다' 등 친일미화와 역사 왜곡 논란을 넘어 '국사 교과서를 검정교과서에서 국정교과서로 전환하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하…(한숨). 교과서 발행 양식에는 국정(國定), 검(인)정(檢認定) 그리고 자유발행제가 있다. 국정은 사상이나 제도를 통제하는 국가에서 쓰는데, 오늘날 북한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에서 채택하는 방식이다. 검인정은 정부에서 교과내용을 정하고 그 내용에 따라 각 출판사가 제작하여 정부의 검정(승인)을 받아 시행하는 것으로, 역사 교과서의 경우 저자(출판사)가 정부에서 정한 교과 과정 기준에 따라 집필하고 그것을 정부가 검열해 적합하다고 인정이 되면 학교에서 그것을 교과서로 채택하는 방식이다. 우리나라가 이 방식을 사용하는데, 이렇게 해서 2014년 새 학기 사용을 목표로 나온 검인정 역사교과서는 '교학사' 교과서를 포함해 총 8종이다. 8개의 교과서를 시장에 내놓으면, 각 중고등학교에서 선택해서 교재로 사용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유발행제는 특별하게 교과서로 사용할 것을 목표로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 경우 검열을 따로 하지 않는다. 시장에 나오면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채택하여 쓰는 것이다. 주로 선진 자유국가에서 쓰는 방법이다. 검인정제도를 국정으로 바꾸겠다면 그것은 후퇴요, 사상적 통제를 가하겠다는 의도로밖에는 볼 수 없다.
우리나라는 유신시대 때, 역사교과서를 국정으로 했다가 2001년부터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변화가 왔다. 고등학교 1학년에서 사용하는 고대-전근대까지의 역사는 국정교과서로 필수로 가르치고, 고등학교 2,3학년에 따로 배울 근현대사는 선택으로 하되 검인정 교과서로 하기로 했다. 그 결과 2001년에 근현대사 교과서가 '금성사'를 비롯해 6종류가 나왔는데, 2004년 한나라당이 국회에서 '금성사' 교과서를 두고 색깔 논쟁을 펴기 시작했다. 내용인즉, '금성사' 교과서가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에 대해 너무 비판적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더욱 문제 삼았던 것은 교과서에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 방문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하는 사진에 대해 교과서에 이승만 사진은 없고, 김대중과 김정일 사진만 넣었다고 지적했다(웃음). 언론사 중에서도 이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던 곳이 있다.
국사 교과서는 그 교과서에 반드시 담아야 할 헌법적 가치(價値)를 중요시한다. 첫째, 대한민국의 정통성이다. 대한민국은 1919년 기미독립운동 이후 세워졌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으로, 이는 독립운동의 결과로 대한민국이 성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헌법에 명시된 헌법적 가치이기도 하다. 둘째, 4.19 혁명을 통한 민주정신이다. 이것은 현행 헌법에서 강조하고 있다. 셋째, 평화적 통일 원칙이다. 이 세 가지 원칙 모두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적혀 있다.
한나라당이 문제 제기를 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악수 사진은 헌법적 가치를 살려 평화통일을 원칙으로 하는 가치를 반영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보수 국회의원들은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해서는 비판적이고, 남북이 손을 잡으면서 마치 북한을 용납하는 것처럼 보이는 교과서가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문제를 터트렸다. 그 뒤 교육부에서 재검정을 했는데, 몇 개를 고치고 나서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렇게 한 뒤에도 계속 한나라당에서 꼬투리를 잡다가, 이명박 정권으로 바뀌자 아예 정부 직권으로 교과서를 '개정'했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결을 달랐다.
이번에 중고등학교 교사와 학부모, 심지어 학생들이 '교학사' 교과서 채택 거부 운동을 하는 것을 보며, 이들의 역사 의식이 매우 높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국민의 역사 의식과 상식이 승리했다고 본다. 일본 후소사 판 교과서가 나왔을 때 일본도 그랬다. 2001년 일본의 후소사 판 극우 교과서가 나왔는데, 자국 역사는 물론이고 한국 역사를 심하게 왜곡했다. 그 교과서는 전체 교과서 중 0.014%, 700권 정도밖에 채택되지 않았다. 이것은 일본 교사와 학부모가 결사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이다. 당시 언론이 '일본의 역사 교사와 학부모 및 NGO의 역사 의식에 기인한 결과였다'고 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지금 일본은 극우정권에 끌려가고 있어 안타깝다.
- 지난 대선, 국정원 선거 개입 문제로 박근혜 정권 1년이 복잡했다. 지금도 특검 요구와 함께 의혹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국가정보원 선거개입 기독교 공동대책위원회'와 함께 '18대 대통령 부정선거 백서'를 들고 '불법-부정 대통령 선거 무효 기자회견'도 했다.
박창신 신부가 낸 '18대 대통령 부정선거 백서'를 읽고, 대선 개표에 문제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개표를 전산으로 했을뿐더러 수검 작업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래 개표는 전산 개표를 못하게 되어 있었지만 관행적으로 이루어져 왔다.(다만 보궐선거에서는 허락을 받고 전산개표를 할 수 있다.) 노무현 정권 때에도 전산 개표를 했다가 당시 이회창 후보 측이 선거 소송을 내 재검표를 했는데, 오히려 격차가 더 벌어졌다.
수검 작업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은 선거 당일 개표 상황표를 보면 알 수 있다. 수검과 관련해 18대 대선 후 국회에서 시험을 했는데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온전히 수검만 했을 때 6000매 수검에 약 2시간 15분이 걸렸다. 이번 개표 상황표를 보면, 한 투표구 개표가 대부분 20분도 안 걸렸다. 이것은 제대로 검사하지 않고 그냥 넘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개표가 이뤄지기 전에 개표 상황이 방송으로 나온 경우도 있었다. 각 투표구에서 수검 결과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집계해 결과를 방송국에 보낸 후 방송으로 알려져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정확하게 집계되기도 전, 방송에서 개표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런 개표 부정과 관련해 많은 유권자가 지난해 1월 4일 대법원에 선거 무효 소송을 냈다. 그때는 2200명 정도였는데, 지금은 6000명이 넘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현행법상 선거소송을 내면 6개월 이내에 공판하게 되어 있는데, 벌써 1년하고도 수개월이 지났지만 대법원에서는 공판기일조차 지정하지 않고 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젊은 목회자 몇몇이 대선 당시 개표상황과 방송국의 개표발표 시간을 대조하여 조사했는데, 그 결과 많은 선거구에서 개표발표에 문제가 많다고 했다. 그래서 선거관리위원회를 상대로 검찰에 고소했지만,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기각하거나 고소인 진술만 듣고 피고소인을 부르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정치권과 언론은 묵살하거나 오불관언(吾不關焉)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 같은 일이 우리 역사에 어떻게 남을 것인지 답답하고 안타깝다.
라인홀드 니버(Karl Paul Reinhold Niebuhr)라는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가 있다. 전후에 세계를 움직인 신학자로, 윤리신학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그의 기도 중 "하나님,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에 대해 차분한 생각을 가지고 정리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용기를 주십시오. 그리고 변화시킬 수 없는 일과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라는 게 있다. 지금 나에게도 그 기도가 절실하다. 혼자서 기도만 하고 있는데 너무 안타깝다. 젊은이들의 의식이 살아 있다면, 청와대가 선거 부정에 대해 저렇게 침묵 일변도로 버틸 수 있겠나. 지금 한국은 젊은이들이 죽어 있기 때문에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한국 사회에서 무차별적으로 벌어지는 '종북좌파' 공세에 대해 "차라리 종북을 희화화하고 싶다"며 "나는 화북(和北)주의자이고 공북(共北)주의자"라고 말했다. 교회 일각에서도 종북인사로 불리는데, 어떤가.
내가 종북인사로 분류되고 있는지는 몰랐다(웃음). 그러나 개의치 않는다. 역으로 우리나라에서 "나는 종북주의자로소이다"라고 커밍아웃(coming-out)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렇게 함으로써 종북이라는 말 자체를 희화화시켰으면 좋겠다. 군사정권에서 거리에 붉은색을 못 쓰게 한 적이 있다. 이것도 일종의 레드 콤플렉스이다. 그런데 새누리당이 붉은색을 아예 간판격으로 사용함으로써 레드 콤플렉스를 없앴다. 위대한 공헌이다. 이처럼 종북이라는 말 자체를 희화화시켜면, 지금까지 입에 거품을 품고 '종북'을 외친 자들이 오히려 머쓱해질 때가 오지 않겠나.
어느 글에서 '나는 북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공북주의자'라고 한 적이 있다.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북한과 평화를 이루며 살려고 하는 화북주의자'라고도 했다. 우리나라와 같이 남북이 적대적 공생관계에 있는 상황에서는 서로가 상대방을 이용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이들이 있다. 특히 정권을 잡을 사람들이 그렇다.
국정원 선거개입 파동 이후. 국정원에서 하는 꼴을 보라. 이쪽에서 정권을 잡는 사람들은 저쪽을 들어 이쪽 사람들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고, 저쪽의 지배자들도 이쪽을 이용해 자신의 정권을 강화시켰다. 결국 적대적 공생관계를 누리는 사람들 입에서 자기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종북'이라는 말을 남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정부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왜 종북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에게 해줄 말이 있다면?
청년들이 시대 의식을 제대로 가졌으면 좋겠다. 역사 의식은 곧 시대 의식이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 무엇인가'를 성찰하면서 고민하는 것이다. 요새 많은 젊은이들이 직장도 못 가진 비정규직인 것에 대해 동정한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자기 문제에만 몰두해 스펙 쌓기에 급급한 것으로 해결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신약성경 마태복음 6장 33절에 주목한다.
예수님은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심지도 거두지도 않고, 백합화를 보라. 수고도 길쌈도 하지도 않는다"고 하셨다. 그런 후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하셨다. 앞뒤 문맥을 연결하면,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는 말에서 '이 모든 것'은 우리 삶과 관련된 경제 문제를 지칭하고 있다. 그러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해야 삶과 경제의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고 가르치신 것이요,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다.
또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것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인 정의(正義)로운 공동체를 만드는데 앞장서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경제적인 문제는 너희에게 해결될 것이다"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정규직을 얻기 위해서 자기중심적 성을 쌓는 일에만 몰두한다면, 결국 정의로운 공동체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젊은이들은 먼저 정의로운 나라와 옳은 의를 구하는 일에 힘쓰고, 역사 의식을 통한 시대 의식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래야만 직장 문제와 장래 문제가 해결이 된다.
정의로운 공동체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연대하고 개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지금처럼 하나하나 알알이 다 흩어진 상태에서는 연대가 없고, 정의를 세우는 일에 힘쓰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고 싶다.
- 자유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자유는 극기(克己)를 통해서 주어지는 힘이고 그 힘이 활동하는 공간이다. 다시 말해서 극단적인 자기 절제(節制), 자기를 이기는 것을 통해서 개인이 갖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과 에너지를 발휘하는 것이다. 이것을 자유라고 부르고 싶다. 자유는 창의성의 기반이다. 나는 창의성이란 말을 중요시한다. 우리나라는 (식민지근대화론이 아니라)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통해서 자유를 확보했고, 이 자유가 인간의 창의성을 자극하면서 경제적인 열매 산업화도 이뤄졌다. 산업화를 통한 민주화가 아니라, 민주화를 통한 산업화다. 여기에 그 민주화와 창의성을 담보한 것이 바로 자유다. 자유는 무한한 가능성이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인터뷰는 정치경영연구소 조경일 연구원, 정리는 정치경영연구소 손어진 선임 연구원이 맡았습니다.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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