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서울로 대학에 간 권지웅(26) 씨는 고달픈 셋방살이를 거듭했다. 7년째 이사만 무려 9번 했다. 25만 원짜리 '잠만 자는 방'에서부터 40만~50만 원짜리 '작은 원룸'까지 겪은 집도 다양했다. 최악은 비가 새고 벌레가 들어와서 "제 정신으로는 잠들 수 없던" 곳이었다. 집에 가기 싫어서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기절하듯 잠을 청했다.
지금은 친구 3명과 월세 55만 원인 방 두 칸짜리 집에 산다. 불안정한 주거 생활이 계속되면서 그는 고민했다. '쉰다는 느낌이 드는 집다운 집에 안정적으로 살 순 없을까?' 주변에 비슷한 고민을 하는 친구들과 머리를 맞댔다. 그렇게 청년 주거운동 단체인 '민달팽이 유니온'과 '민달팽이 주택협동조합'이 탄생했다.
타워팰리스보다 비싼 고시원
지난 3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민달팽이 유니온 위원장인 권 씨를 만났다. 그는 한국의 임대 주택 시장이 열악할 뿐만 아니라 부조리하다고 했다. 보증금을 못 모은 가난한 사람들일수록 열악한 집에서 상대적으로 더 비싼 월세를 낸다는 것이다. (☞ 관련 기사 : 7년간 9번 이사한 이 남자 "서울에서 안 태어난 게 죄?")
2012년 민달팽이 유니온은 3.3제곱미터(1평)당 임대료를 비교했을 때, 고시원(15만2685원)이 타워팰리스(11만8556원)보다 1.28배 비싸다는 충격적인 조사 결과를 내놨다. 아파트와 자취방을 비교해도 마찬가지다. 자취방, 원룸, 하숙의 3.3제곱미터당 임대료(10만9419원)가 같은 면적당 서울시 8구 아파트 임대료(4만6437원)보다 2.35배 비쌌다.
서울에 사는 청년들 3명 중 1명은 열악한 주거 환경에서 산다. 민달팽이 유니온이 인구주택총조사를 토대로 발표한 '청년 주거 빈곤 보고서'를 보면, 2010년 서울시에 혼자 사는 20~34세 청년의 주거 빈곤율은 36.3%에 달한다. 전국에 사는 20~35세 청년들의 주거 빈곤율은 23.6%(28만1000명)다.
권 위원장은 "주변을 둘러봐도 월세 50만 원씩 내고 원룸에 살거나, 반지하, 옥탑방에 사는 게 별로 특별하지 않다"고 했다. 청년들은 딜레마에 빠진다. 환경이 괜찮은 집은 너무 비싸고, 경제 조건에 맞춰서 찾은 집은 환경이 너무 열악하다.
주택협동조합을 만들자
주택협동조합을 만들자는 구상은 2012년에 나왔다. 처음에는 "청년 집이 부족하니 컨테이너라도 놓고 살자"고 했다. 실제로 네덜란드에 컨테이너로 대학 기숙사를 지은 사례가 있었다. 하지만 공터에 집 짓자고 뜻을 모았더니 막상 공터가 없었다. 방향은 조금씩 주택협동조합으로 모아졌다. 민달팽이 유니온 회원들은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과 함께 전 세계 22개국의 주택협동조합 사례를 공부했다.
2년간의 준비 끝에 지난 3월 28일, 대안적인 주거공동체인 '민달팽이 주택협동조합' 창립대회가 열렸다. 민달팽이 유니온 회원 170명 가운데 64명이 조합원으로 가입했다. 대학생 조합원은 30%이고, 사회 초년생이거나 구직 활동을 하는 조합원들이 더 많다고 했다. 사회 초년생들도 저축을 해야 하는데, 주거비가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민달팽이 주택협동조합은 서울 남가좌동에 빌라 두 채를 빌리기로 했다. 3명씩 6명이 오는 5월 시범 입주한다. 시범 사업을 한 뒤엔 오는 11월에 건물을 통째로 빌려 조합원들에게 분양할 계획이다. 아직 출자금이 1000만 원밖에 없어서 기금 마련을 위한 대대적인 캠페인도 벌일 예정이다. 시세 80~90% 가격에 조합원들에게 주거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다.
시세보다 싸게? 집주인들이 좋아할까?
집을 시세보다 싸게 빌린다고 하면 집주인들이 싫어하지 않을까? 권 위원장은 집주인이 져야 하는 공실 리스크, 관리비, 중개 수수료 등의 부담을 주택협동조합이 지는 형식으로 임대료를 낮출 수 있다고 말했다. 집주인들은 대개 공실이 30%라고 가정하고 임대료를 책정하는데, 공실을 줄이면 75% 정도의 가격으로도 건물을 빌릴 수 있다는 것이다.
권 위원장은 "개별 세입자가 아니라 조합 차원에서 계약하기에 집주인은 안정적으로 세입자를 구할 수 있다"며 "집주인도 손해보고 내놓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운영비 10%를 제외하면 80~90% 가격으로 충분히 공급할 수 있다고 했다. 세입자로서는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세가 올라서 쫓겨날 위험 부담이 줄어드니 좋다고 했다. 집주인과 세입자 모두에게 이득이라는 설명이다.
조합 주택에서 살지 못하는 조합원들에게는 '공정 중개 서비스'를 실시한다. 세입자 편에서 일하는 '믿을 수 있는' 중개인을 배출할 예정이다. 이미 지난해 25명이 민달팽이 유니온이 주최한 '청년 주거상담사 교육 과정'을 수료했다.
정부에 임대주택 요구하는 방법도 있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왜 하필 주택협동조합을 만들었느냐는 의문은 남는다. 정부에 청년 임대주택을 늘리라고 요구할 수도 있지 않을까?
권 위원장은 "주택협동조합은 제도 개선에 대한 압력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 촉진하는 흐름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요구해도 정부는 공공임대주택을 충분히 지어주지 않으니, 우리끼리 주거 욕구를 충족할 만한 단체를 만들어서 정부를 압박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노동자는 노동조합이라는 법적 지위가 있는 단체를 만들 수 있고 교섭권도 갖고 있지만, 세입자에게는 법적 지위를 가진 단체가 없다. 공공임대주택 정책을 지지하는 동력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세입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싸거나 열악하거나…다른 선택지 '공정 임대료 제도'
권 위원장은 민달팽이 주택협동조합 활동을 지렛대 삼아 '공정 임대료 제도'를 도입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는 "정부가 민간 임대료를 정상화하기 위한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며 "열악한 계층에게 더 많은 임대료를 부과하는 우스꽝스러운 제도를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외국의 경우는 어떨까. 국회 입법조사처에 따르면, 영국이나 독일 등에는 '적정 임대료 가이드라인'이 있다. 영국에서는 임대주택의 노후 정도, 주택 구조, 유지관리 상태 등을 통해 적정 임대료를 제시한다.
특히 독일에서는 아예 표준 임대료 표가 주기적으로 발표된다. 주택 유형이나 규모, 노후 정도, 위치에 따라 세분화된 임대료가 정해진다. 독일 민간주택은 3년간 임대료를 20% 이상 못 올린다. 어기면 최대 5000유로(723만 원)의 벌금을 낸다. 미국 뉴욕에서는 임대료 등록제를 실시한다. 규정을 어긴 집주인에게는 과태료를 물리고, 임대료 규제를 받는 집주인에게는 세금 감면 혜택을 준다.
권 위원장은 "집이 인권과 매우 밀접하기에 외국에서는 국가가 그 정도는 보호해줘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다"며 "그런데 한국엔 그런 합의가 없다. 집문서 가진 사람이 왕인 세상"이라고 했다. 그는 "박근혜 정부가 임대 수입에 대한 과세 방식을 변경해 임대 시장을 양성화한다는데, 임대료나 임대 수입 규모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며 "공정 임대료 제도를 위해 조금씩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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