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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미 "난 가수다. 돈 아닌 자기다움이 자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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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미 "난 가수다. 돈 아닌 자기다움이 자존심"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맨발의 디바' 가수 이은미

'호소력 짙은 목소리, 개성 있는 짧은 머리, 당찬 이미지, 멘토'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에너지 넘치는 그녀의 무대는 자유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오죽하면 '맨발의 디바'일까. 실제로 만난 그녀는 '음악' 앞에서 꼼짝 못하는 열정을 갖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무대에 나를 완전히 내려놓고 음악과 소리에 집중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도 기특하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정말 잘하고 싶었다. 그것이 오랜 시간 나의 무대 정신을 지배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맨발의 디바'라는 별명이 여전히 부담스럽지만, 이제는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하는 것 또한 나의 운명이라 생각한다."

"음악가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으면서부터 이미 나의 삐딱함은 시작됐다. 노래하는 사람에게 인기를 끌기 위해 요구되는 여러 조건이나 압력이 못마땅했다. 동요를 노래하라고 강요한다던가, 춤을 추라고 한다던가, 방송국 맘대로 곡의 시간을 줄인다던가. 가수로서 그런 성공의 조건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것이 성공을 위한 길이라면 차라리 성공하지 않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콘서트 위주로 활동하게 됐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공연을 많이 하는 가수로 꼽힌다. 특히 전국투어 '소리 위를 걷다'는 2년간 70곳이 넘는 도시를 목표로, 단일 공연으로는 최장 기간 진행됐다. 한 달에 두세 번, 혹은 그 이상 공연한 것이다. 공연 횟수도 놀랍지만, 더 눈여겨볼 것은 이 같은 장기 공연을 한 이유다.

"한국은 대중음악뿐 아니라, 문화예술 분야가 다 허덕이고 있다. 대다수의 공연은 어느 정도 흥행이 보장되는 도시를 찾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런 현실에 투정만 부릴 게 아니라, 음악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해보자고 생각했다. 그 마음으로 시·군 단위의 문화예술회관을 찾아 가고, 그곳에서 공연을 시작하게 됐다. 이런 것이 분명 초석이 되리라 믿는다. 사람들의 문화적 갈증이 지금보다 더 다양한 부분에서 충돌하면서 새로운 것이 많이 생산됐으면 좋겠다."

무슨 일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할 지 막막한 사회에서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또 그 일을 통해 사회에 목소리를 내고 있는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그래서 부러웠다. 그녀는 앞으로도 자신이 하는 '음악'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에 대해 어떤 생각과 의식을 갖고 열정을 쏟아낼까.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를 쓴 20대에게 고루한 꼰대들보다는 우리 사회를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은 사람이 더 많다고 믿게 하고 싶다. 이것이 적어도 대한민국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 내가 갖춰야 할 의무라고 생각한다. (중략) 이를 위해 어떤 방법으로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려고 한다. 자선이든, (어떤 사람들은 색깔로 구별하는) 정치적인 행사로든, 내가 생각하기에 사람들과 함께 좀 더 나은 쪽으로 손잡고 걸어가는 길이라면 내가 갖고 있는 권력을 제대로 사용하고 싶다."

▲ 가수 이은미. Ⓒ프레시안(최형락)


- 2013년 9월, 세종대학교 실용음악과 교수로 임용돼 2014년 3월 첫 학기 강의를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준비는 잘 되고 있는지.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싶은가?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게 없다.(웃음) 음악은 배워서 되는 게 아니다. 정답이 없는 것이 예술이기 때문에 이론보다는 실제를 함께할 것이다. 나를 임용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노래를 시작한 지 25년째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무대 위에서 배우고 느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 이를 바탕으로 서로가 가지고 있는 경험, 열정, 신선함, 도전 등 함께할 수 있는 것을 나누고 무엇을 가장 잘할 수 있는지 최대한 끌어내려 한다. 이렇게 학생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내게도 배움의 길이 될 것이다.

이 길에 들어선 친구들 중에는 음악 실력이 좋은 친구, 부족한 친구, 중간에 포기하는 친구, 자신의 한계를 이겨내는 친구 등 각자의 상황이 다를 것이다. 결국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나는 같이 고민하고 방향키를 붙잡아주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 MBC 오디션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에서 가수를 꿈꾸는 친구들의 멘토 역할을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권리세 씨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리세는 나한테 굉장한 충격이었고 자극이었다. 그 친구의 긍정이 놀라웠다. 많은 부분을 지적받았는데, 그것을 불편해하거나 스트레스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에게 정말 필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흡수해주었다. 그러한 긍정적인 부분이 그 친구를 데뷔시켜주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리세의 활동을 보면, 그때 함께 나왔던 누구보다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이 당시 나의 진정성을 의심했던 사람들에게 내가 보여줄 답이라고 생각한다.

- '맨발의 디바'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93년 첫 장기공연 당시, 5회부터 목소리가 나오지 않자 무대 위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인데 왜 이렇게 부담을 느끼지? 마음 속 욕심을 버리자'라고 생각하고 하이힐을 벗어 던졌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하이힐로 상징되는 무대 위의 모습을 어떻게 벗어 던질 수 있었나.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 무대에서 완전히 나를 내려놓고 음악과 소리에 집중했다. 지금 생각해도 나 스스로가 참 기특하다. 아마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정말 잘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경험이 오랜 시간 나의 무대 정신을 지배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은 더 힘든 일 일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나는 스스로를 전달자 이상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에게 음악을 통해 공감을 전달하는 전달자이며, 악기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간단하다. 무언가에 얽매일 필요도 없고 틀을 가질 필요가 없다. 내가 주인공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있는 음악이 주인공이다.

- 가끔은 그 타이틀이 부담스럽지는 않은가?

90년대 중반 언론에서 '라이브의 여왕'이라고 불렀다. 그것도 민망한 일이었는데, 언제부터는 '맨발의 디바'로 바뀌었다. 음반을 발표하고 콘서트를 시작한 어린 가수에게는 최고의 찬사였다. 그래서 언론과의 인터뷰 때마다 "아직은 그런 타이틀이 너무 이릅니다. 적어도 20년은 지난 후에 그렇게 불러주세요. 그때는 감사히 자랑스럽게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했는데, 벌써 25년이 됐다.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별명을 가진 보컬리스트지만, 그만큼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기대치가 있을 것이다. 이 기대치라는 것은 항상 충족시켜야 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할 경우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게 된다. 문제는 대중문화의 속성상, 실망은 결국 나를 사람들의 시야에서 밀려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많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여전히 부담스럽지만, 이제는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야 하는 것 또한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프레시안(최형락)
- 공연을 많이 하는 가수다. 특히 전국투어 '소리 위를 걷다'는 70곳이 넘는 도시를 목표로, 단일 공연으로는 최장 기간 진행됐다. 매번 똑같을 수 없는 공연을 반복하며 전국을 다니는 과정이 힘들 것 같은데, 어떤가.

아주 힘들다. 정말로 힘들다. 2009∼2010년 2년간 70개 도시에서 공연했다. 하루 두 번의 공연이 태반이었기에, 쉽지 않은 스케줄이었다. 음반 두 장을 녹음하는 시간을 빼고는 거의 매주 공연을 했는데, 무엇보다 매주 다른 도시에서 매번 새로운 관객들에게 내가 '이은미'여야 하는 것이 녹록지 않았다. 관객들은 자신을 채우기 위해 가슴을 비우고 공연장에 왔지만, 막상 나는 앞 공연에서 채웠던 것을 지우고 새로운 것을 다시 채우는 일이 쉽지 않았다. 사람인지라, 감정이 매번 샘솟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집중하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럴 때면 그냥 부서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 시절, 공연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 문화예술회관을 찾아다녔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한국 대중음악뿐만 아니라, 문화예술 분야가 다 허덕이고 있다. 여러 단체가 있지만, 적절한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사회의 한쪽 쏠림현상처럼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독점이 일어나고 있다. 결국 대다수의 공연은 어느 정도 흥행이 보장되는 도시를 찾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런 현실에 투정만 부릴 것이 아니라 음악가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보자는 게 내 주장이었다. 그 마음으로 시·군 단위의 문화예술회관을 찾아 가고, 그곳에서 공연을 시작하게 됐다. 밴드를 비롯해 스텝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규모보다 훨씬 작은 극장에서도 억지로 공연을 했다. 이런 것이 분명 초석이 되리라 믿는다. 좀 더 다양한 부분에서 사람들의 문화적 갈증이 충돌하면서 새로운 것이 창출되는 것이 중요하며, 이런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 한국 공연문화의 한계에 대해 어떤 안타까움을 갖고 있나?

개인적인 능력이나 인기 영역에서 발생하는 재정적 어려움도 있지만, 일단 공연장 대관과 무대 장비, 홍보 등이 차지하는 부분 또한 쉽지 않다. 1일 2회 공연을 하지 않으면, 가수가 수익을 내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또한 지방자치단체에서 무분별하게 치러지는 지역 축제, 무료 공연 등이 정말 많다. 이런 현실에서 누가 돈을 내고 공연장을 찾겠나. 지역 문화예술회관의 경우, 재정적 열악함으로 자체 기획은 불가능하고 대관 수입으로 유지한다. 결국은 돈 문제가 모든 것이라고 봐야 한다.

- 음악 활동을 하면서 돈을 번다는 것과 음악을 한다는 것 사이에서 돈의 지배를 받은 경우는 없나? 그럴 땐 어떻게 하는 편인가.

이 세상에 밥그릇이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솔직히 말하면 돈이 지배한다. 돈의 지배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면, 스스로 실력을 키울 수밖에 없다. 음반을 발표해도 수익이 발생하지 않으면, 그다음에 음반을 내기란 쉽지 않다. 공연을 해도 수익이 발생하지 않으면 그 다음 공연을 올리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꾸준히 음반을 내고, 공연을 하기 위해서는 실력이 필요하다. 가수가 음반을 내거나 공연하는 게 게으르거나 싫어서 하지 않는 것이겠는가. 아니다. 흥행 비즈니스는 다른 비즈니스보다 더 냉혹한 측면이 있다.

어떤 환경이나 상황에서도 결국은 스스로가 중심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외적인 면에서 쫓아다니거나 쫓겨 다니기만 한다면, 내가 행복해서 시작한 일이라 해도 결코 행복할 수만은 없다. 나에게 가치의 척도는 돈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돈이 쉽게 포기된다. 돈을 포기하면 조금 불편해 질 수는 있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는 것은 나를 정말 불편하게 한다. 두 가지를 저울질해야 한다면, 결론은 간단하다. 항상 음악이 우선이다.

- 무대 활동 외에 노조 집회, 장애인 행사, 인권시민단체 행사, 강기훈(유서대필 조작사건) 후원 콘서트 등 사회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하지만 20대였던 1980년 당시 많은 청년들이 민주화 운동에 동참할 때 오로지 음악 활동에만 전념했다고 했다. 음악에 전념했던 20대 이은미는 어떤 청년이었나.

열등감과 자신감 결여에 휩싸여 지내던 어린 여자아이가 우연한 기회에 음악을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나다운 음악을 할 수 있을까, 나를 표현하는 다른 방법은 없나'를 많이 고민했고, 그래서 방황도 많이 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잘하는 일이라고 느끼게 한 것이 음악이었다. 너무 행복하고 좋아서 음악하기에만 바빴다. 정식 가수가 되고 사회에 나와 (다행히) 좋은 사람을 만나면서 언젠가부터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생겼다. 그러면서 젊은 시절 '내가 참 부끄러웠구나, 내 삶만 바라보던 이기적인 삶을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를 정의롭게 바꾸기 위해 동시대에 스스로를 불사른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많은 빚이 있다. 빚은 갚아야 하지 않겠나.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우리에게 늘 '사람 나이가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20대 때는 그 의미를 잘 몰랐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꾸준히 사랑을 받고,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생기면서 '생전 보지 못한 사람들이 나에게 준 사랑을 어떻게 하면 사회가 더 건전하고 아름다운 방향으로 서로 도와가며 살 수 있는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사용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됐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 길로 가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는 내 목소리를 내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 "가수활동, TV, 신문, 인터넷 등을 통해 사회에 대해 알아갈수록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민으로서, 유권자로서 할 말을 하자, 대중에게 받는 사랑을 어떻게 사회에 환원할 수 있을까 하다가 노래로 재능기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사고 전환의 특별한 계기는?

음악가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으면서부터 이미 나의 삐딱함은 시작됐다. 노래하는 사람에게 인기를 끌기 위해 요구되는 여러 조건이나 압력이 못마땅했다. 동요를 노래하라고 강요한다던가, 춤을 추라고 한다던가, 방송국 맘대로 곡의 시간을 줄인다던가. 가수로서 그런 성공의 조건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것이 성공을 위한 길이라면 차라리 성공하지 않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콘서트 위주로 활동하게 됐다.

나름대로 음악을 잘 이해하고 전달하기 위해 가능하면 진지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아마도 내 스스로를 지키고 싶었던 마음에 사회의 불합리나 정의롭지 못한 부분에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한 것 같다.
- 2012년 고(故) 노무현 대통령을 위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노래로 레퀴엠에 참여했다. 이후 문재인 후보, 심상정 의원 등을 위해 선거유세에 참여하는 정치적 활동도 했다. 이런 활동이 가수 이은미에게 어떤 편견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는지. 두렵지 않은가?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하는 가수 입장에서 정치적 표현이 내 음악에 선입관을 갖게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어떻게 세상의 모든 일을 유불리(有不利)로만 따지며 행동할 수 있겠는가. 정치적 표현을 말리는 주변 지인들이 많이 있다. 대부분의 이유가 지금 내 생각이 옳지 않거나 행동이 정의롭지 못해서가 아니라, 향후 음악적 활동의 제약을 걱정해서이다. 하지만 결국 내가 선택할 일이다. 그래서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들의 잘못도 아니다. 오해할 수 도 있고 오해를 받을 만할 수도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견해의 차이다.

'안녕들하십니까'라는 대자보를 쓴 20대에게 고루한 꼰대들보다는 우리 사회를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은 사람이 더 많다고 믿게 하고 싶다. 이것이 적어도 대한민국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 내가 갖춰야 할 의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어떤 방법으로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려고 한다. 나는 음악가이기 때문에 음악을 열심히 하면서 이 사회에 대한 내 의견을 표현하는 거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저 사람도 대한민국 시민인데 저렇게 말할 수 있다"라고 바라봐주는 시각이 많을 거라고 믿고 싶은 거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웃음)

- "대중에게 받은 사랑은 '문화권력'이다"라고 했다. 지난 음악 활동 속에서 이은미는 한국 대중문화 안에서 '문화권력' 이상을 의미하게 됐다. 이 권력을 통해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문화권력'이란 말은 두려운 말이다. 정치인들이 갖는 정치권력의 원천은 사람들의 표이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국민을 상대로 더 많은 표를 얻기 위해 노력하지만, 음악가에게 권력의 밑천은 '자기다움'으로 승부하는 것이다. 양이 적던 많던 상관없다. 모든 사람이 내 음악을 좋아 할 필요도 없고, 좋아할 수도 없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권력을 나를 지키는데 쓸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것이 음악가의 자존심이고, 나에게 주어진 권력의 핵심이라고 본다. 인기나 돈을 위해서 세상의 어두운 면을 외면한다면, 그 순간 나의 권력은 끝장난 것이다.

나는 적어도 사람들에게 내 음악을 더 팔기 위해서라든가, 내 자신을 더 많이 인식시키기 위해서 음악을 도구로 활용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 더 많은 문화권력을 취득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단지 나를 인정해주고 받아주는 사람들과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 적어도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따뜻함을 느끼는 나라를 만들고 싶다.

이를 위해 어떤 방법으로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려고 한다. 자선이든, (어떤 사람들은 색깔로 구별하는) 정치적인 행사로든, 내가 생각하기에 사람들과 함께 좀 더 나은 쪽으로 손잡고 걸어가는 길이라면 내가 갖고 있는 권력을 제대로 사용하고 싶다.

Ⓒ프레시안(최형락)
- 음악을 한다는 것, 그리고 사회를 향해 좀 더 강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특권일 수 있다.

사람마다 타고난 재능이 있다. 본인의 재능을 끌어내지 못할 수도 있지만, 분명히 남들과는 다른 그 사람만의 '솜씨'가 있다. 내게 있는 재능도 그 중에 한 부분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끔 다른 이의 조각이나 사진과 같은 작품을 감상할 때, 무용가의 무대를 볼 때 굉장히 놀랍다. '삶의 에너지가 저런 방식으로 아름답게 표현되는구나!'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나와 똑같은 예술을 하고 있진 않지만, 이런 부분은 내 모습의 절정과 비슷하구나'라면서 흡수되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목소리가 도구일 수도 있지만, 목소리만이 다는 아닐 수도 있다.

지금 시대 사람들은 소위 연예인으로 대변되는 겉보기에 화려한 사람들에게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직업이 갖고 있는 장점과 보기에 부러운 부분들이 많다 보니, 자꾸 상대적으로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과 비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가치 없는 일은 단 하나도 없다. 남들과 똑같이 잘하지는 못하지만, 그 사람만이 갖고 있는 표현을 가치 없는 것이라고 누가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 원래부터 이런 생각을 해왔나?

가수를 하면서 더욱 견고해졌다. 이 세상에서 가치 없는 일은 하나도 없고, 힘들지 않은 일 또한 하나도 없다. 이 세상에 위대한 일도 없고 천한 일도 없다. 삶은 누구에게나 다 똑같이 버겁다. 그릇만 다를 뿐이다. 보이는 모습과 형태만 다를 뿐이다. '분명히 나만의 무엇이 있을 것이야'라면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봐야 한다. 하다못해 '내 손톱 중에 이 손톱은 참 예뻐'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회가 사람들로 그런 생각을 하게 도와줘야 한다. 가족뿐 만 아니라 사회도 '이 세상의 가치 없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격려하는 체제가 되어야 한다. 사회 안전망이 빈약하고 부실하다 보니까 젊은이들이 좌충우돌하며 그냥 포기하거나 놔버리는 일이 많은 것이다. 참 안타깝다. 나는 비교적 운이 좋아서 음악을 하는 선배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감사하게도 내가 흔들리고 어긋날 때마다 다시 이 길로 돌아올 수 있도록 많이 도와줬다.

-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긴 40대 나이에 결혼했다. 가수 이은미에게 사랑과 행복은 어떤 의미인가.

각자의 세상이 많이 굳어져 서로의 배려를 잘 못 할 수 있을 것 같으나, 오히려 그렇기에 이해의 폭도 커지고 있다. 그렇게 서로의 인생을 배우고 존중하며 지내고 있다.

하지만, 가수 이은미라는 측면에서 개인적인 환경 변화에 내 생활이 좌지우지되지 않았다. 20대일 때도 30대일 때도 40대일 때도 똑같았다. 50대 때도 똑같았으면 하는 희망이 있다. 하지만 사람이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만큼 에너지도 사그라진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면이 가끔 두렵기는 하다. 하지만 내게는 늘 돌파구가 되고, 행복의 척도가 되는 음악이 있다. 그래서 항상 행복하다. 이게 내 운명이다. '나는 음악가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구나'라는 것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고민거리가 없어졌다.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더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만을 고민한다. 이것 역시 행복한 고민이다.

-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에게 하고 싶은 말은?

꼭 말해야 되나?(웃음) 요즘 청년들이 생각할 때 고루하고 답답하고 말이 안 통한다고 느껴지는 기성세대들도 그들과 똑같은 시간의 터널을 지나온 사람들이다. 그 때도 다 아팠고 힘들었고 버거웠다. 하지만 우리 때는 청년에게 어떤 '기백'같은 것이 있었다. 포기하지 않는 '무대포 (정신)' 같은 것 말이다. 그게 바로 '젊음'이었다. 요즘 친구들을 보면, 조금만 힘들어도 너무 쉽게 포기한다. '젊음'이라는 시간이 내 것으로 완벽하게 만들어지지 않더라도, 행여나 실패하더라도 도전해야 하는 시간인데 말이다. 확실한 것은 그 젊음의 터널이 쉽게, 그리고 금방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생의 기준을 좀 더 멀리 던져놓고, '지금, 여기'에서 행복한 것을 찾았으면 좋겠다.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마라. 성공은 좀 천천히 해도 된다. 40대에 성공해도 재밌다.(웃음)

- '이은미'에게 자유란?

잘 모르겠다. 어떤 것이 정답인지 모르니까 나한테 주어지는 대로 막살아본다. 그러다 보면 상처를 입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다. 그러면 ‘이건 아닌가보다’라고 생각하고 다시 돌아가기도 한다. 나는 이런 나의 삶을 후회한다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것도 안 하는 삶을 더 후회할 것 같다. 나를 구속하거나 옥죄지 않는 쪽으로 나를 그냥 막살게끔 내버려 둔다. 내 삶이 행복해질 수 있는 자유. 그보다 큰 자유가 있을까?

Ⓒ프레시안(최형락)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인터뷰는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전공 박주연 씨가 진행하고, 정리는 정치경영연구소 손어진, 조경일 연구원이 맡았습니다.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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