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선생님의 가방>(전 2권, 오주원 옮김, 세미콜론 펴냄)은 전혀 그런 찝찝한 느낌이 들지 않고 상쾌하고 유연하다. 그만큼 가와카미 히로미의 원작 소설을 우아하고 세련된 만화로 풀어낸 다니구치 지로의 공이 크지 않을 수 없다. 히로카네 켄시의 <황혼유성군>의 명품 버전 같기도 하지만, 30대 여성들에게는 마스다 미리의 만화보다 훨씬 어른스럽고 본격적인 이야기로 다가올 책이다.
정혜윤(CBS 라디오 PD) :
-카프카는 <변신>을 쓸 때 소원이 그 책을 읽고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 소원은 수 세기가 흘러 이루어졌다. 어디서? 필립 로스의 <포트노이의 불평>(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펴냄)에서.
카프카의 '착한 유대인 아들'은 벌레로 변신했지만, 필립 로스의 <포트노이의 불평>에서 착한 유대인 아들은 자위 기계, 섹스머신으로 변신한다. <변신>의 섹스판형인 이 작품을 읽으면서 주인공의 끝없는 불평에서 반드시 자기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자기 자신을 방어하는 데 급급한 인간이 되었지? 왜 자기 이야기밖에 못하게 되었지? 왜 불평이 존재의 양식이 되었지?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이여! 그대는 언젠가 타인의 무의식이 되리! 그 무거움을 잊지 말기를.
한센병으로 60년을 고생한 할머니를 처음 만난 장면이 인상적이다. 첫 장면에서 저자는 한하운의 '소록도 가는 길'이란 시를 할머니에게 읽어준다. 할머니는 세 번을 거푸 듣는다. 뭉툭한 손가락으로 방바닥을 문지르면서.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누고?" 시를 지은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서 이 긴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할머니의 인생마다 슬픈 시가 흘러나온다. 그러다가 우리는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장면을 만난다. '임진강에서'라는 시다. 고백 같기도 하고 절규 같기도 한 시를 쓰던 할머니가 난생 처음으로 상상력이 가득찬 시를 쓴다. 시의 끝 문장에 '신기하다'라는 말이 나온다. 나에게는 그 어떤 시구보다도 신선했다. 뭔가 아주 중요한 것이 할머니 밖으로 나온 것만 같았다.
이 저자는 최근 나온 우리나라의 어떤 책의 저자보다도 성숙한 태도로 할머니 옆에 있었다. 누구의 인생도 함부로 말하지 않고 함부로 동정하지도 않고, 어둡고 고요한 방에 같이 있는 것 같았다. 그 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내가 본시 왈가닥한 성격에 / 참지 못해 그 사이로 뛰어들어 / 발로 얼음을 타며 돌아다니다가 / 결국 엉덩이로 얼음에 / 방아를 찧고 말았네 / 내 죽는다고 뒹구르니 / 길가는 나그네 아저씨가 두 손을 잡아 일으켜 주셨네 / 너무도 감사하여 맘으로 답례하였네"
(이 부분이 놀라운 것은 할머니가 임진강에 가본 적이 없다는 것.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는 점. 할머니 시에서 처음으로 인파가 등장하고 그 속에 뛰어들어 논다는 점. 평생 쫓겨나며 살았던 사람이….)
"그런데 갑자기 아무런 소식도 없이 / 회오리바람이 불어 / 온 스키장은 아수라장이 되어 / 모자와 목수건이 날아가며 / 그 나그네 아저씨의 모자가 / 하늘로 뱅뱅 돌더니 임진강 흐르는 강가에 떨어져서 / 돌고 있는데 철새 한마리가 / 날개 죽지가 부러져서 / 퍼득퍼득 뛰며 / 그 모자 속으로 들어가서 / 갑자기 사공이 되어 노를 젓고 / 끊임없이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네 / 이 일을 보고 있는 나그네 아저씨는 / 고요한 말로 / 허 참 이상하다 하더니 / 뒤돌아서네 / 나는 곁에서 눈이 땅에 흐리도록 / 그것을 바라보다가 / 신기하다고 느꼈네"
('신기하다고 느꼈네'… 이 부분이 엄청난 울림을 준다.)
노정태(자유기고가·<논객시대> 저자) : '취미는 독서'를 하면서 나 스스로 세웠던 두 가지 원칙을 동시에 어기게 되었다. 첫째, 순수하게 취미로 읽은 책만을 다룬다. 둘째, 단행본만을 그 대상으로 한다. 첫 번째 원칙은 실은 진작에, <좌파로 살다>(뉴레프트리뷰․프랜시스 멀헌 엮음, 유강은 옮김, 사계절 펴냄)를 다루면서 어겨진 상태다. 하지만 오늘 드디어 두 번째 원칙까지 깨뜨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부산 <국제신문> 기자로 이름을 날리던 "조 갑제"(마당은 일관되게 성과 이름을 띄어 쓴다)가 취재부장이 되어, 전 세계를 앞마당처럼 누리던 1981년 초창기의 <마당>을 읽으며, 나는 말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릴 지경이었다.
약 10여 년 전 내가 꿈꾸던 '한국의 저널리즘'은, 그러니까 너무도 이른 시기에 다소 의아한 방식으로, 나름의 황금기를 한 차례 겪었던 것이다. 취재부장 조갑제는 걸프 만에서 출발하는 유조선을 타고 장쾌한 탐사 보도 일지를 써내려간다. 텍사스 출신의 '오일 맨'을 만나서 인터뷰하고, 석유를 통해 한국 현대사를 되짚으며, 포항 영일만에서 석유를 캐내겠다고 도전하는 무모한 사내를 편견 없는 눈으로 추적한다.
잡지의 제호는 <마당>인데 정작 다루는 대상은 전 세계인 이런 잡지가 나오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나는 뒤늦게 알았고, 조갑제가 취재부장에서 편집장이 되면서 뭔가 맥이 풀리는 느낌을 받았으며, 그가 떠난 후에는 특유의 컬러를 잃어버리는 모습까지 보았다. 그 조갑제가 오늘날의 조갑제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상념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그것은 이 짧은 독서 일기에서 풀어놓을 수 있는 내용은 아닐 것이다.
이명현(천문학자) : 배명훈 작가와 함께 지난 몇 년 동안 관심을 갖고 토론하고 있는 주제들이 몇 있다. 그 중 하나가 문학 작품 분석에 대한 것이다. 우리 문단 비평가들의 관심이 과도하게 인물 분석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 배 작가와 나의 불만이고 문제의식이다. 인물은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큰 세계 속에서 그 질서의 영향을 받는 존재라는 평범한 사실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출발했다.
작가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작품 속에는 '세계'가 구축되어 있을 것이다. SF 소설 중에는 세계 구축 자체가 그 소설 자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세상과 무관한 임물 탐구가 아니라 세계의 구조와 변화 그리고 그런 세계가 만들어 놓은 장 속에서 자리매김한 인물로서의 캐릭터 탐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밸런스의 문제이기도 하다. 너무 한쪽에 집중하다보니 똑같이 중요한 다른 쪽을 놓치거나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를 놓쳤거나 망각해버렸을 것이다. 배 작가와 나는 비평가들이 조금 더 '세계'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국제관계학에서 쓰이는 도구를 사용해서 작품 속 세계 분석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왔다. 나는 일반상대성이론 같은 장 이론의 개념을 응용하면 세계 분석의 도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물에만 집중하는 것이 어디 문학 해석만의 문제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몸통인 실세는 모른 척 외면하고 말단 인물 하나의 개인적 행위로 모든 문제를 돌려버리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세계를 보지 않고 인물에만 집중해서 기어이 고립된 인물을 만들어내는 보습과 닮아있어서 흠칫 놀랐다. 세계 분석으로 눈을 돌려야할 때다. 그래야 인물의 진짜 정체성과 우리가 얽혀있는 세상이 보일 것이다. 물론 내가 언제 글을 쓸지는 장담할 수 없다. 아마 그런 주제로 청탁이 와야 쓰게 될 것이다. 죽음이 없는 생이 없듯이 마감이 없는 글은 없다, 라고 괜히 말하고 싶다.
성현석(<프레시안> 기자) : 골목마다 치킨집이다. 그 많은 닭들은 어떻게 자라고 있을까. 가보면 지옥이다. 스트레스에 찌들어 미쳐버린 닭들이, 비좁은 양계장 안에서 평생 복작거린다.
골목마다 학원이다. 경쟁에 찌든 아이들, '놀이 밥'에 굶주린 아이들은, 서로 물어뜯는 걸로 '놀이 배'를 채운다. 약한 아이가 먹잇감이다.
2011년 11월, 이른바 '대구 중학생 자살 사건'이 터졌다. 또래 아이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한 학생의 죽음이었다. 당시, 비슷한 자살 사건이 잇따랐다. 전국 초·중·고등학교에선 '일진 솎아내기'로 한바탕 소동을 겪었다. 숱한 공문이 오갔고, 인터넷 게시판에 댓글 다는 손길은 바빠졌다. 그 바람에, '학교폭력'이라는 낱말은 확실히 머리에 박혔다.
그런데 따져보자. '학교폭력', 그게 대체 뭔가. 학교에서 벌어지는 폭력? 학교가 학생에게 가하는 폭력? 학교 때문에 생겨난 폭력?….
그토록 익숙한 말, '학교폭력'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따져 볼 대목은 더 있다. '학교폭력' 추방 캠페인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지점은 어디인가. 폭력 없는 교실, 이건 좋다. 싸움 없는 교실, 이건 좋은 건가. 힘 센 아이가 약한 아이를 괴롭히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그러나 아이들 사이에 아무런 충돌도 없는, 적막한 교실. 그게 우리 교육의 목표인가.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정부와 언론이 손잡고 벌인 한바탕 푸닥거리, 학교폭력 추방 캠페인은 과연 어땠나. 고민이 꼬리를 무는데, 답은커녕 힌트가 될 만한 글도 만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답답했는데, 이젠 좀 달라졌다. 교육공동체 벗이 펴낸 <그리고 학교는 무사했다 : 학교폭력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들>(하승우 외 지음)덕분이다. 공식에 대입한 것 같은 진단도, 섣부른 대안도 없다. 그래도, 혹은 그래서 정말 좋은 책이다.
'교육불가능'의 학교를 정직하게 응시하는 격월간지 <오늘의 교육>을 내는 교육공동체 벗은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된다. 좋은 협동조합에 참가하는 좋은 시민들이 늘어나는 게 좋은 세상이다. 그리고 폭력 없는 학교를 만드는 길은 좋은 세상으로 가는 길과 정확히 겹친다.
안은별(<프레시안> 기자) : 시인 김승일은 '나의 자랑 이랑'이라는 시를 "넌 기억의 천재니까 기억할 수도 있겠지"로 시작하는데, 그 둘 사이처럼 공유한 기억이 많지 않은 나는 그녀가 기억의 천재인지는 모르고 그냥 천재라고는 생각한다. 그녀는 영화도 만들고 노래도 만들고 만화도 그리는데, 모든 작업에 흐르는 일관된 그다움과 정서, 그리고 잘 조율된 유머와 갑작스런 슬픔은 하늘과 관련 없는 재능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너무 잘 하는 것이다.
다만 오리의 발을 포함해 이 만화의 몇몇 장면에서 내가 본 것은, 삶이란 너무 지치는 행위고, 대체 언제까지 일을 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으며, 내가 아무 것도 안 하면 사람들이 다 떠날 것 같고, 결국 그 끝에 우리에게는 죽음밖에 없을 거라는 슬픔과 피곤이며, 그건 천재든 아니든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조금 있으면 나는 어쨌든 마감이라는 바위를 산꼭대기 위로 올리겠지만, 올리는 순간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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