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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의 얄팍함, 그만의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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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의 얄팍함, 그만의 문제인가

[편집국에서] 한국 정치 '생각의 크기'를 묻는다

지난 16일(현지 시각) 영국 언론 <가디언>의 일요판인 <옵저버>에 특별한 인터뷰가 실렸다. 34년 전 인터뷰, 그것도 다른 매체에 게재됐던 내용을 편집해 다시 실은 것이었다. 1980년 10월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Marxism Today)>에 실린 이 인터뷰에서 물어본 사람은 에릭 홉스봄, 답한 사람은 토니 벤이다. (원문 보기)

홉스봄은 긴 설명이 필요치 않은 인물이다. 마르크스주의자이자 20세기를 대표하는 역사학자 중 한 사람인 홉스봄은 한국에도 잘 알려진 석학이다. 그에 비하면 토니 벤은 적잖은 한국인에게 낯선 얼굴이다. 그러나 진보 정치를 고민하는 이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벤은 20세기 후반 영국 좌파를 상징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귀족이었지만 특권을 거부하고 하원에 진출한 벤의 역사적 적수는 대처가 이끄는 신자유주의 우파였다. 1970년대 세계 경제 위기를 틈타 세력을 키운 신자유주의 우파는 가난한 사람들과 공공성, 더 나아가 사회 자체에 대한 거센 공세를 퍼부었다. 벤은 노동당 내 '벤 좌파'의 구심점으로서 그 공세에 맞섰다.

승리하지는 못했다. 사회를 위협하는 거대 자본의 권력을 해체하려 한 벤 좌파의 '대안 경제 전략'은 실현되지 못했다. 소심한 노동당 주류는 총선 공약이던 '대안 경제 전략'을 헌신짝 취급하며 퇴행을 거듭했다. 그러는 사이에 주도권은 신자유주의 세력의 손에 넘어갔다. 권력을 움켜쥔 신자유주의자들은 사회를 입맛대로 뜯어고쳤다. 영국을 넘어 세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지 30여 년. 20 대 80을 넘어 1 대 99까지 이야기되는 양극화가 부른 참혹한 결과는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집권을 막지는 못했지만, 고삐 풀린 자본의 횡포와 부당한 전쟁에 맞선 벤의 싸움은 계속됐다. 2001년 정계에서 은퇴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의료 사유화 저지 투쟁,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 등은 그의 삶의 일부였다. 오랫동안 하원 의원으로 활동했지만, 정치는 의회 안에서만 하는 것이라는 어리석은 믿음은 품지 않았다. 벤은 평범한 사람들의 힘을 믿고 그들을 근본으로 삼는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 민주주의는 제도일 뿐만 아니라 운동이며, 그런 운동이 없으면 민주주의는 책 속의 구절일 뿐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벤이 수많은 영국인의 사랑을 받은 대중 정치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이유다.

▲ 토니 벤이 세상을 떠났음을 전한 <가디언> 기사. ⓒ<가디언> 홈페이지 화면 갈무리

토니 벤과 에릭 홉스봄, 두 거인이 보여준 '생각의 크기'

그런 벤이 14일(현지 시각) 세상을 떠났다. <옵저버>가 특별한 인터뷰를 게재한 계기다. 그러나 단지 추모의 뜻만 담은 건 아닌 듯하다. 사회의 거대한 퇴행을 막을 방법을 고심하던 벤과 홉스봄의 이야기가 오늘날 신자유주의 이후를 모색하는 이들에게 시사하는 대목이 있다는 생각이 녹아 있는 것으로 읽힌다. 대처 집권 1년 후인 1980년 당시 신자유주의에 맞설 전략을 고민하던 이들에게 영감을 준 것처럼.

이제는 고인이 된 두 거인의 34년 전 이야기에는 '대처에게 진 건 패배한 것이라기보다는 투항한 것'이라며 노동당과 노동 운동의 주류를 비판한 것 말고도 눈에 들어오는 대목이 여럿 있다. 그중 하나는 생각의 크기다.

두 사람은 대처의 보수당과 겨룬 선거만을 놓고 정치 공학을 늘어놓는 일은 하지 않는다. 대공황이 세계를 뒤흔든 1930년대 자본주의 위기와 당대(1970년대)의 세계 경제 위기, 이 시기 국제 정세 및 노동 운동 상황, 대처에게 권력을 넘겨주기 이전 시기 즉 노동당 집권기에 대한 성찰, 노동당과 노동 운동이 취한 전략의 문제점 등을 포괄적으로 논한다.

석학 홉스봄만 그럴 것이라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깊고 넓게 조망하며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는 건 현실 정치인인 벤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런 역량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국제 사회의 흐름을 주시하고, 노동 운동을 비롯한 사회 운동과 지속적으로 교감하며 고민한 시간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다.

쪼그라든 한국 사회

'역시 외국은 선진적이야' 같은 맥 빠지는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다. 유럽의 정치인들이 모두 이 정도 수준이라는 근거 없는 주장을 할 생각도 없다. 중요한 건 한국의 풍토를 돌아보는 것이다. 한국 정치의 '생각의 크기'가 어떠한지를 냉정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깊이 있게, 그리고 폭넓게 세계를 바라보며 미래를 열어가고 있는지를.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일제에 맞선 독립 운동 시기와 비교해도 훨씬 못 미친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그때는 '생각의 크기'가 지금처럼 왜소하진 않았다. 동아시아 전체는 물론 미국, 러시아(당시 소련)까지 독립 운동가들의 활동 무대였던 그 시절, 해방 및 새로운 국가 건설 전략은 국제 정세,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진단과 맞물렸다. 모든 독립 운동 세력이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좌우를 막론하고 전반적인 분위기는 그러했다.

독립 운동가만이 아니라 지식층 전반의 지적 논의 수준도 높은 편이었다. 지금에 비하면 정보 유통량이 턱없이 적었지만, 그럼에도 한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치열하게 토론한 결과이기도 하다. 압도적으로 미국 편향인 지금과 달리, 지적으로 교류하는 통로가 미국 외에도 중국, 일본, 러시아 등 다양했던 것도 한몫했다. 어떤 국가와 사회를 만들 것인가를 놓고 해방 공간에서 수많은 사람이 활기차게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토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단과 한국전쟁, 학살을 거치며 한국인들의 '생각의 크기'는 쪼그라들었다. 분단과 독재에 맞선 민주화 운동을 거치며 '생각의 크기'를 조금씩 키워가는 듯했으나, 신자유주의가 사회를 뒤덮은 탓에 삶이 더 팍팍해지면서 다시 쪼그라들었다. 해외 구석구석까지 가는 오늘날, '생각의 크기'는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도 이런 사정과 관련 있다.

부박하고 왜소하기 짝이 없는 '생각의 크기'는 정치의 현주소에서도 잘 드러난다. 걸핏하면 '종북 딱지'나 붙이는 시대착오적인 여당만 그런 게 아니다. 민주당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짚어보자. 1930년대 대공황과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에 못지않은 2008년 금융 위기의 지속이라는 세계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토대로 정치 전략을 짜고 있나?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의 오늘을 정밀하게 진단하고 그런 속에서 남북 관계를 비롯한 동아시아 문제를 풀어갈 방법을 폭넓게 모색하는 시야를 갖췄나? 자신들의 집권기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면서 길을 열어가고 있나?

현실은 그것과 거리가 멀다. 국제 정세와 자본주의의 오늘에 대한 통찰도, 자신들의 지난날에 대한 성찰도 찾아보기 힘들다. 노동 운동을 비롯한 사회 운동과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방안까지 포함한 구조 개혁 대안 같은 것을 기대하는 건 사치에 가까울 정도다. 큰 그림을 그리는 대신 협소한 정치 공학에 갇혀 '새누리당 반대(를 위한 선거 연대 혹은 합당)'를 외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 안철수 의원(2012년 대선 캠프 해단식 때 모습). ⓒ프레시안(최형락)

얄팍한 안철수, 부박한 민주당…큰 그림이 절실하다

'새 정치'를 내세우는 안철수 의원 세력도 얄팍하기는 마찬가지다. 큰 그림은 고사하고 '새 정치'의 구체적인 상이 있긴 한 건지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행보를 계속했다. 내용은 채우지 않은 채 '중도'니 '진보'니 하는 말만 놓고 때때로 티격태격하는 민주당과 그 점에선 닮은꼴이다.

그러니 '정치 공학적 연대 같은 건 하지 않겠다'고 거듭 강조하다가 어느 순간 '민주당과 함께하겠다'고 돌변하는 것도 그리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그런 '새 정치' 세력의 얄팍함을 드러내는 일이 얼마 전 또 벌어졌다. 6.15선언과 10.4선언 배제 논란이다.

'새 정치' 세력은 남북 관계와 관련해 특정 사건을 나열하면 소모적인 논쟁이 일 우려가 있다며 통합신당의 정강·정책에 넣지 않으려 하다가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두 선언을 계승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라고 뒤늦게 해명했지만, 빈곤한 역사의식을 가릴 수는 없었다.

두 선언에는 남북 정상 간의 합의라는 의미만 담긴 것이 아니다. 그 밑바닥에는 수십 년에 걸쳐 분단 현실을 극복하고자 목숨까지 걸었던 숱한 이들의 노력이 놓여 있다. 이런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대신 '소모적인 논쟁' 운운하는 세력이 분단과 남북 문제를 지혜롭게 풀어갈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런 얄팍한 이들이 분단 극복 이외의 사안에 대해서만은 잘하리라고 볼 근거도 없다.

더 딱한 일은 이런 이들이 '새 정치'의 대표 세력을 자임하는데도 적잖은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얄팍한 세력이 그에 못지않게 부박한 민주당과 더불어, 퇴행적 색깔론으로 무장한 여당에 맞설 대안으로 여겨지는 현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정치의 수준은 그 사회의 지적 풍토, 그 깊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했던가. '새 정치' 이미지만 난무하는 현실은 한국의 지적 토양이 어떤 상태인지를 보여준다. 지금 필요한 건 얄팍하고 부박한 세력들의 사탕발림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적 토양을 차근차근 일굴 때다. 그래야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지킬 구조 개혁 대안이라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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