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초반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후계체제가 이어지는 시기에 정부 내에서는 북한의 정치 구조를 봤을 때 안정적인 승계가 가능하다는 예측과 한편으론 정권의 불안정이 가중될 수도 있다는 이중적인 관측을 내놓았다. 약 30년 뒤인 2012년,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김정일에 이어 권좌에 올랐을 때 나왔던 분석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26일 외교부가 공개한 제21차 외교문서에는 1983년 당시 북한 정세에 관한 정부 내부의 판단이 기록돼있다. 당시 정부는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권력 세습 구축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권력층 간의 암투가 있었다고 관측했다. 김일성의 친동생인 김영주, 김일성의 두 번째 부인인 김성애 등이 김정일과 권력을 다퉜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하지만 정부는 일부 권력층 및 내부 주민들의 반발과 저항에도 김일성이 생존해 있는 동안은 세습체제가 무난히 진행될 것으로 내다봤다. 북한의 권력 구조를 볼 때 김일성이 결정한 후계자를 바꿀 정도의 세력은 북한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한편으로는 ▲강화되는 주민 사상통제와 각종 탄압이 주민들의 불평불만을 고조시킬 가능성 ▲김정일의 성격이 과격하고 모험적이라는 것 ▲김정일을 추종하는 핵심세력이 호전적 군부 세력과 과격분자로 구성되어 있는 점 등을 들어 북한 내부의 돌발 사태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치 최근 남한 일각에서 김정은이 어린 나이에 물불을 가리지 못하는 성격으로 돌발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고 예측한 것과 비슷한 진단이다.
당시 외교부 아주국(아시아태평양국)은 ‘북한 대남도발 책동 대책’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해당 국에서 어떻게 북한의 도발에 대응할지를 보고했다. 아주국은 이 보고서에서 장기적인 대책으로 “북괴의 김정일 세습 체제 과정에서 정권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이에 따른 전쟁 도발 위험성”을 강조하는 국제 여론을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김정일로의 후계 체제 계승이 불안정하다는 평가는 당시 부처 내 실국 차원에서 나오는 보고서에도 인용될 정도로 정부 내에서 광범위하게 퍼진 것으로 추정된다.
김정일, 1982년에 몰타로 유학을 떠났다?
한편 1982년 12월 외교부로 새로운 첩보가 입수됐다. 한창 후계체제를 다지고 있어야 할 김정일이 지중해의 작은 섬 몰타로 유학을 떠났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에 관련 첩보를 수집하는데 열을 올렸다. 곳곳에서 김정일이 유학 중이라는 첩보가 들어왔고 정부는 이를 기정사실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를 그대로 믿기 어려운 정황도 있었다. 한창 유학을 하고 있어야 할 시기인 1983년 1월에 김정일은 북한에 있었기 때문이다. 1월 10일 평양방송에서는 김정일이 전날 부주석 강양욱의 빈소를 방문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또 16일 방송에서는 김정일이 전날 “꽃파는 처녀” 연극공연장에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러던 중 2월 주교황청 대사로부터 전보가 한 통 날아왔다. 김정일이 몰타로 유학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한 첩보였다. 이탈리아 국회 국방위 소속의 한 의원을 만났다는 교황청 대사는 “김정일이 몰타에 체류하게 된 원인은 국내에서의 여러 잘못(여자 문제) 등으로 김일성과 북괴 당국이 그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아 내보낸 것이라 한다”는 내용을 전달했다.
하지만 다시 이를 뒤집는 첩보가 들어왔다. 3월 12일 주일대사는 주이탈리아 일본 대사관이 입수한 첩보를 전달했는데, 주이탈리아 일본대사가 말하기를 현재 몰타에 유학중인 이는 김정일의 이복동생인 김평일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주이탈리아 한국 대사는 이탈리아 외무성에 사실 확인을 의뢰했고, 현지에 있는 북한 인사는 김평일인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는 정보 혼선이 생긴 이유에 대해 “처음 이 사실을 보도한 몰타의 언론 매체가 오보를 낸 것에 기인했다”고 설명했다. 이후 이탈리아 외무성에서 보낸 사진과 관련 기사를 보고 나서야 정부는 유학 중인 북한 인사가 김평일임을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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