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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언어 미로, 번역의 선글라스로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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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언어 미로, 번역의 선글라스로 보다

[김창규의 '기계 나비의 꿈'] 새뮤얼 딜레이니의 <바벨-17>

계획적으로 수행해 온 작업은 아니었고 그다지 명시적으로 드러나지도 않았지만, 특정 지면을 할당 받아 서평을 싣게 된 이후 마감이 다가올 때면 어김없이 떠오르던 욕심이 있었다. 국내에 소개된 작품이든 아니든 가리지 않고, 고전이든 아니든 개의치 않고 SF의 특장점 하나와 대표작 하나를 일대일로 연결 지어 소개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 생각은 현실적인 여러 사정 때문에 결국 생각으로만 그친 셈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단기적으로 그런 방식을 택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 마침 이번 서평작인 <바벨-17>(새뮤얼 딜레이니 지음, 김상훈 옮김, 폴라북스 펴냄)이 안성맞춤인 까닭에 여기서는 SF와 실험(실험성)의 관계를 연계시켜볼까 한다.

▲ <바벨-17>(새뮤얼 딜레이니 지음, 김상훈 옮김, 폴라북스 펴냄). ⓒ폴라북스
SF는 실험이다. 비유적인 의미로 무언가가 실험적이라 함은 익숙함/진부함을 적극적으로 타파한다는 뜻이다. 그 생경함과 도전적인 요소가 클수록 더욱더 실험적이다. 일반 문학은 뿌리는 물론 줄기까지 현실과 한 몸이기 때문에 실험성에는 한계가 있다. 또는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많은 경우에 있어 그 실험성이 형식 수준에서 마무리되고 만다.

반면에 SF는 장르 정의에서부터 실험일 수밖에 없다. (현실과) '다름'을 전제하고 '낯섦'과 '차이'를 기본 수단으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SF가 인물이나 이야기보다는 '세계조성'의 장르라는 오해를 받는 것도 다름 아닌 그 때문이다.

이처럼 SF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실험성을 대표하는 작품을 꼽으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 사실 기존에 국내에 번역된 작품의 울타리 안에서도 금세 몇 가지가 떠오르지만, 최근에 국내에 선을 보인 소설 중에서 꼽아보자면 역시 <바벨-17>만한 SF가 없을 거라 생각한다.

최근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바벨-17>은 새뮤얼 딜레이니가 1966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그러니 2014년 지금에 와서는 실험성이라는 주제와 정반대 선상에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당대와 작금의 SF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까다롭다고 느끼는 소재와 형식, 즉 '언어'를 SF와 결합시킨 대표작이다. 국내에 번역된 SF를 즐겨 읽은 독자라면 언어라는 말에서 곧장 작가 앨프리드 베스터를 떠올릴 테고, '사이버펑크'라는 SF 하위 장르를 돌이킬 것이다. 의식, 상식적이지 않은 주체, 공감각을 즐겨 다룬 작가 중 비교적 일찍 국내에 소개된 사람이 앨프리드 베스터이고, 그런 요소를 본격적으로 영입한 장르가 사이버 펑크이기 때문이다.

SF가 해당 요소들과 밀접한 건 작위적이 아니라 필연적이다. 우리는 세계의 일부다. 세계가 바뀌었다는 건 곧 우리가 바뀌었다는 얘기다. 우리가 바뀌었다는 건? 사고방식, 의식 구조, 세계관은 물론이고 주체의식/공동체 의식/정서가 바뀌었다는 얘기다. 역사의 흐름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기술 발달이 원인일 수도 있다. 달라진 세계의 이질적인 화자나 인물을 그리는 작품이라면 당연히 언어 사용도 다르지 않을까?

물론 그렇다. 하지만 너무 다르면 독자가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이질적인 세계를 친숙한 화자가 전달해주면 쉽기야 할 테지만, 망원경의 접안경을 지나치게 편리하게 만들다가 본래 목적인 확대능력을 희생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SF를 만드는 이들이 늘 끌어안고 가야 할 문제다. 하지만 일부 작가는 그 문제를 간단히 (물론 정말로 간단하지는 않았겠지만) 뛰어넘기도 한다. <바벨-17>이 바로 그런 작품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언어학의 학설 하나를 전적으로 도입한다. 언어는 사용 주체의 세계관이나 성격이나 사고방식에 영향을 주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의식의 성격 자체까지 규정한다는 학설이 그것이다. 작품 속에는 '동맹'과 '침략자' 두 세력이 등장한다. '동맹' 측은 잇따른 파괴 공작에 피해를 입는데, 이른바 '바벨-17'이라고 이름 붙인 암호문을 해독한 결과 그 내용에 파괴공작의 일시와 장소가 예견되어 있었다. 여기에 주인공인 리드라가 등장한다. 리드라는 여러 가지 원인으로 언어능력이 남들보다 월등히 뛰어나며, 그에 비례해 세상과 사물의 이치를 빠르고 분명하게 꿰뚫는 인물이다. 그녀는 바벨-17이 암호문이 아니라 하나의 언어라는 것을 알아채고 해석해 내기에 이른다. 그리고 바벨-17을 보내는 사람과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우주선 승무원을 모으고 여행에 나선다.

소설의 상당 부분은 리드라가 탐색 여행 중에 만나는 인물과 그 과정에서 겪는 사건을 묘사하는 데에 할당되고 있다. 새뮤얼 딜레이니는 이를 묘사하면서 '언어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가설을 전적으로 도입하고 다층적인 은유를 현란하게 구현하려고 시도한다. 그 목적은 분명하다. SF라는 실험성의 무대 위에 익숙하지 않은 의식 세계와 불명료함이라는 실험무대를 하나 더 차리려는 것이다. 그 시도가 너무도 강렬하고 힘차기 때문에 <바벨-17>은 반드시 접해봐야 할 실험적 SF 작품 목록에서 상위권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특히 리드라가 붓처와 '너와 나의 언어향연'을 벌이는 부분은 이 작품의 백미라 할 수 있다.

▲ 작가 새뮤얼 딜레이니. ⓒpoetryproject.org

그리고 <바벨-17>의 장점은 정확히 거기까지이다. 이 작품은 실험성이라는 이름의 강력한 속성을 품은 대신에 연마제를 바르는 것을 잊었다. 그 결과 날이 너무 거칠어 평범한 독자들은 손에 쥐기 불편한 무기가 되고 말았다. 현란함을 내세우던 60년대 영미 SF의 단점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소설의 중반까지 숨쉬기 힘들 정도로 몰아치던 지적인 박진감은 결말에 가까워지면서 방향을 잃으며, 이야기가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책임감마저 자취를 감춘다. 바벨-17이라는 언어의 정체 및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진 사유를 설명하는 부분에 이르면 허탈하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인데, 이는 단순히 '고전작품들의 결함'이라기보다는 작가인 새뮤엘 딜레이니의 역량 부족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여전히 전위성이 살아있는 60년대 걸작 SF를 맛보고 싶다면 <바벨-17>은 추천작이다. 하지만 옛 프로그레시브 락이나 현대 전위음악이나 실험 영화들이 늘 그렇듯 작품에 온전히 만족하겠다는 욕심은 버리기 바란다. 하물며 언어유희를 극단까지 추구하는 SF를 번역으로 접함에야, 일반적인 독자로서의 욕심보다 더 많은 것을 내려놓는 게 우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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