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와 이영채 케이센대 교수는 일본 시민사회운동과 지식세계의 중요한 인물들을 인터뷰하여 '수정일본사회 탐방'의 제목으로 <프레시안> 등에 연재한 바 있다. 통상 한국사회의 변화는 10년 전의 일본사회를 따라간다고 하는 말이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사회가 일본사회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역으로 일본사회의 궤적을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인터뷰는 시민사회운동과 지식세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한국의 사회운동은 80년대 이후 30여년 동안 장족의 발전을 해왔으며 수많은 단체들이 출현했다. 하지만 무한 상승곡선을 그릴 것으로 예상했던 한국의 민중운동과 시민운동도 여러 지점에서 발전의 '병목지점'에 도달해 있으며, '전환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반면 일본의 사회운동은 대체로 '실패의 역사'로 한국에는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패에서도 배울 점이 있으며, 실패의 역사라는 피상적 인식 이면에서 전개되어온 건강한 운동들은 정체기로 진입해가는 한국 사회운동 진영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고 생각된다.
이 인터뷰 시리즈의 목적은 일본사회의 변화, 일본 사회운동의 변화를 반면교사로 삼아서, 현단계 한국 사회와 사회운동의 과제들을 더욱 넓은 시각에서 보게 하고자 함이다.
2013년 인터뷰에서는 도쿄만이 아닌 일본의 주요 지역운동을 중심으로 약 10여 명과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인터뷰는 2013년 1월, 7월, 12월 3차례 이영채 교수 등이 진행하였다. 2011년의 인터뷰와 같이 일본 시민사회운동의 최대의 쟁점이자 상징성을 갖는 운동사례를 상징적인 인물들을 인터뷰하는 방식으로 소개하는 방식을 취하게 된다. 이번 시리즈는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연재한다.
첫 번째 범주는 최근 일본 시민사회운동의 현안을 중심으로 다루게 된다. 보수정당의 벽을 깨고 시민사회 요구를 반영하기 위하여 시민대표로 2012년과 2013년 도쿄 도지사 선거에 출마한 반(反)빈곤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인 우츠노미야 겐지 변호사(일본변호사협회 전 사무국장), 한국의 철도파업을 연상시키는 '일본 국철(國鐵)'투쟁을 소개하기 위해 오쿠다 토요키 선생(전 국철 노조원, 기관사), 그리고, 2013년 11-12월 일본사회를 달군 '특정비밀보호법' 제정과 그를 둘러싼 시민사회운동을 다루기 위하여 마에다 데츠오(안보 군사 문제 전문가. 프리저널리스트)선생을 인터뷰하였다.
두 번째 범주는, 일본의 전후 사회운동의 궤적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60-70년대의 대표적인 운동 3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큐슈의 미이케 탄광투쟁과미나마타병 반대투쟁, 그리고 도쿄 나리타 공항반대의 상징인 산리즈카 농민투쟁이다. 이는 한 사람을 인터뷰하는 방식이 아니라 관련자들을 폭넓게 인터뷰하여 세 가지 사건을 입체적으로 소개하는 방식을 취하한다.
세번째 범주는, 우리가 주목해보아야 할 일본 사회운동의 여러 측면들을 소개하기 위하여 여섯 분을 인터뷰하였다. 일본 비정규직 및 중소기업 지역노조운동에서 활동하는 일본 노동운동전문가인 히라가 겐이치로 선생 (중소기업네트워크활동가), 오키나와 미국기지반대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유이 아키코 선생(전 오키나와 타임즈 편집장) , 한국의 진보신당과 유사한 성격을 갖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일본 신사회당 부사무장이며 일본 노동운동의 정치참여에도 깊은 관여를 해온 이시고 야스쿠니선생(신사회당 부서기장), 일본의 반(反)천황제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자 일본 신좌익운동의 이론가이기도 한 아마노 야스카즈 선생(한텐련 활동가, 잡지 임팩션 편집자),그리고 마지막으로 한일간의 최대 이슈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전국행동' 공동대표인 와타나베 미나 선생 등이다. 편집자
일본의 반빈곤운동의 대표적 인물이자 전 일본 변호사연합회장이었던 우츠노미야 겐지(宇都宮健兒) 변호사를 도쿄의 사무실에서 인터뷰하였다. 탈원전과 평화헌법 개정 반대 등을 위한 정치개혁의 일환으로 2012년과 2014년 일본 도쿄도지사 선거에 시민사회운동 대표로서 출마하기도 했던 우츠노미아 변호사와는 일본의 로스쿨제도, 보수적 사법제도, 사법개혁운동, 일본 변호사들의 공익 활동, 반빈곤운동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영채 : 위키피디아에서도 우츠노미야 선생의 이력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던데요. 한국의 독자들에게 간단하게 이력을 소개해주시지요.
우츠노미아 : 46년 태생이고 에히메현 출신입니다. 집은 상이군인 출신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이후 구마모토에서 성장했습니다. 도쿄대학에 입학한 후 고마바캠퍼스에서 학생운동을 하면서 변호사를 지망하였습니다. 68년에 사법시험에 합격한후 대학을 중퇴하고 71년부터 변호사 등록을 하였습니다. 83년부터 우츠노미야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였으며 현재의 도쿄시민법률사무소로 확장되었습니다.
주되게는 상업분야를 담당하였고, 다중채무 문제, 소비자금융 분야를 전문으로 하였습니다. 이외에도 사형제도 반대, 방사선량재조정 문제, 옴진리교 문제, 선택적 부부별성제도도입, 교직원 기미가요 기립 제창 의무화에 대한 반대, 원전 운동의 민주성, 반한 데모 규제의 필요성 등 사회문제에도 관여해 왔고요. 시민운동 전문지 <주간금요일>의 편집위원, 반빈곤네트워크 대표, 연말 파견 노동자 지원마을 대표 등을 역임하고 있으며, 탈원전운동 전국 순회강연 대표도 담당하고 있습니다.
도쿄도지사 출마와 일본의 정치에 대해 묻다
이영채 : 먼저 2012년 도쿄도지사 선거에 나섰는데 시민운동적 배경에 대해서 설명해주시지요.
우츠노미아 : 제가 2012년 도지사 선거에 나간 것은 2009년 11월 선거 출마를 요구했던 시민 그룹들과의 관계가 컸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에 변호사 그룹도 2010년 일본변호사협회 회장 선거에 나서야 한다고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두 제안을 동시에 받았고, 양쪽 다 심리적 압박이 많았죠. 대체로 파벌의 연합에 의해 회장이 선출되지요. 그래서 저 같은 무당파는 회장을 꿈꾸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회장에 당선됐고 2010년 4월부터 2012년 5월까지 2년의 임기를 마쳤습니다. 회장 임기 중인 2011년 3.11대지진과 원전사태가 있었고요. 일본변호사협회는 지진 및 원전의 피해자 구제활동을 했습니다. 개별 피해자들을 지지하면서 일본에 54개 원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생각하게 되었죠.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면 일본사회가 붕괴한다는 생각을 했고요. 그래서 탈원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이 운동에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이영채 : 재선에 출마하셨지요? 민주당 집권 시기이기도 했는데 어떻게 보셨는지요?
우츠노미아 : 2009년 민주당 정권이 출범하면서 양극화 문제를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오히려 보수화되었습니다. 노다 정권은 경제정책의 보수화만이 아니고 정치적으로도 보수화를 지향했습니다. 80년대말까지 의회에서는 사회당이나 공산당이 연합하여 보수화를 저지해 왔는데, 현재 이 두 정당의 힘은 매우 약해졌습니다. 대신 시민운동과 연결되어 있는 변협은 일본사회의 보수화 저지의 큰 원동력이었습니다. 일본 최대의 NGO와 같은 역할을 요구받은 것이지요. 2012년 3번의 결선투표가 이어지는 박빙의 선거였으나 재선은 되지 못했습니다. 저는 다시 변협의 일반회원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시 원점에서 반빈곤, 탈원전운동을 전개해 왔습니다.
그런 와중에, 2012년 12월에 이시하라 신타로 도지사가 갑자기 지사직을 내던졌고, 보궐선거가 이루어졌습니다. 이시하라는 이노세 나오키(46년생, 나가노출신으로 신좌익학생운동의 지도부를 경험함. 80년대에는 작가로 등단하였고, 2001년 고이즈미 정권때 정계입문. 2012년 12월 도지사 선거에서 개인 역대 최고득표로 당선됨. 2012년 도지사선거직전 불법 정치자금 수수 문제로 2013년 12월 사임) 부지사를 지명하였습니다. 2009년에 도지사 출마를 요청했던 시민그룹들이 다시 저에게 출마를 요청했습니다. 도쿄도의 중요성과, 시민운동을 대표해서 이노세에 대항하는 후보의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죠. 2009년에는 신중했지만, 저도 동일한 문제의식이 있었고, 특정후보가 없었기에 출마하게 되었습니다.
이영채 : 2012년의 도쿄도지사 선거의 경우 어떻게 선거연합이 이루어 졌는지요? 3.11원전사태 직후라서 야당이나 시민운동 후보의 의미가 컸을 것으로 보이는데요.
우츠노미아 : 일본에는 70년대부터 혁신지방자치단체가 있었습니다. 도쿄도지사 미노베 료기치(1904-84, 도쿄대경제학교수, 1967-79년까지 12년간 혁신계 도지사를 역임)의 경우, 사회당과 공산당, 그리고 노동조합 총평 등이 연합해서 강력한 조직으로 선거를 했습니다. 각 지역의 시민운동은 혁신지자체를 지지했지요. 그러나 90년대 중반이후 일본사회당, 일본공산당은 소수정당이 되었고요. 총평은 결국 해체되어 89년 렌고(연합)로 통합되었지요. 연합(89년에 탄생한 보수성향의 일본노동조합총연합. 일본공산당계열은 전노련, 일본사회당좌파계열은 전노협을 결성하였다)은 탄생부터 보수화, 우경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렌고의 경우, 전력노조가 중심인데, 그들은 원전 찬성파입니다. 70년대와 같이 일본사회당과 일본공산당의 틀로 선거연합하는 것은 지금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시민그룹들은 무엇을 기본정책으로 할 것인가하는 점에서, 4가지를 제시하였죠. 탈원전, 반빈곤, 교육행정 전환, 호헌 등이 주요 정책이었습니다.
이영채 : 설명을 해 주신다면요.
우츠노미아 : 첫째, 탈원전과 관련해서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즉 후쿠시마 원전은 도쿄 등 대도시에서 소비되며, 후쿠시마에서 소비되지는 않습니다. 후쿠시마는 도쿄전력이 운영하고 있으며, 최대주주는 도쿄도이지요. 따라서 도쿄시민은 원전 피해자를 구해야 하는 책임이 존재하고요. 원전의 폐로를 시켜야 하는 권한도 도쿄도가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연결구조 하에서, 도쿄도가 원전의 폐로를 주장한다면, 다른 지자체에도 중요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둘째, 도쿄도는 47개 현 중에서 가장 재정적으로 풍요로운 도시입니다. 그런데도 빈곤 격차가 가장 큰 지역이지요. 이시하라 도지사가 13년 7개월을 역임했는데, 철저하게 복지예산을 쓸데 없는 돈이라고 삭감해 왔습니다. 13년 7개월 이전의 도쿄도는 복지가 다른 지역보다 최고였습니다. 반빈곤 차원에서 복지를 주장했습니다.
셋째, 교육행정의 경우 도쿄도는 기미가요 제창시 기립과 히노마루 게양을 철저하게 교육현장에 철저히 강제했던 도입니다(2003년 10월23일, 도쿄도교육위는 '입학식 및 졸업식의 국기게양 및 국가제창의 실시에 대하여'라는 통달을 하달하여 이를 따르지 않는 교직원을 처벌하고 있다. 해고, 경고, 감봉 등 처벌자는 약 248명에 이르고 있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그것이 전전(戰前)의 군국주의를 표상한다고 생각했지요.
넷째, 그래서 이에 대해 헌법옹호를 대안정책으로 제시했습니다. 또한 2012년 4월에는 이시하라 당시 도지사가 미국에 서 센카쿠 열도의 도쿄도 구입을 선언했습니다. 도쿄도가 이런 제안을 내놓자, 노다 정권은 센카쿠제도를 국가가 국유화하겠다고 선언을 하는 우를 범했지요. 이것이 역설적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악화시켰고요.
이영채 : 흥미롭네요. 이시하라 전 도시자의 극우적인 센카쿠열도 사적 매입에 대응하기 위하여 노다 민주당 정부가 국유화를 추진했는데, 그것이 역으로 중국의 반발을 격렬하게 불러일으켰고, 그로 인해 중일관계의 악화로 이어진 과정이 말이지요.
우츠노미아 : 이로 인해 일본에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급속하게 대두하게 되었습니다. 젊은 층이 이러한 흐름에 빠져들어갔지요. '재특회'('재일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모임', 在特會, 일본어 자이토쿠카이)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 보수 우익 단체입니다. 이들은 도쿄의 신오쿠보, 오사카의 츠루하시주변의 코리아타운을 중심으로 헤이트스피치(일명 증오표현)데모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중국과 한국에 반대하는 데모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종래의 일본 우익 단체들이 아니고 일종의 신우익적 그룹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시위대에는 일본도를 들고 있던 청년도 있었고요.
신오쿠보나 츠루하시에서 데모를 하는 젊은 층들은 안정적인 중산층의 노동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자리를 재일동포에게 뺏겨서 생활이 불안정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평범한 시민들이 오히려 우익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 아베 정권 하 일본사회의 하나의 특성입니다. 아베 정권은 헌법개정을 정면으로 내걸고 있습니다. 저는 도쿄이 평화적 메시지를 발신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화헌법을 지켜야 한다는 메시지를 발신함과 동시에 북경시와 서울시에 함께 동아시아 평화도시 선언을 하자고 제안하고자 했습니다. 교류를 통해서 3국의 중심도시 간의 평화적 흐름을 창조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영채 : 당시 민주당은 독자후보를 냈습니까? 선거연합은 어떻게 치루어졌는지요?
우츠노미아 : 민주당은 독자후보를 내지 않았습니다. 앞서 제시한 4개의 정책에 동의하는 노동조합, 시민단체, 정당들에게 후보로서 제안을 했고, 이들이 함께 연합하는 형태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1~2년 전부터 준비를 했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지해준 정당으로서는 일본 미래당이 있었는데, 지금 오자와 당수가 이끄는 생활당으로 변화했고요. 당시 녹색바람이라고 하는 그룹은 지금의 녹색당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사회민주당, 일본공산당, 신사회당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생활클럽도쿄네트워크라고 하는 생협계열의 조직적인 지원도 있었고요.
민주당은 독자후보를 내지는 않았지만, 도쿄의회의 다수인 민주당원은 당시 이노세 후보를 지원했습니다. 도쿄도에는 렌고 조합원이 100만 명이라고 하는데, 도쿄도의 렌고 지부장은 도쿄전력 출신입니다. 그들은 원전정책을 찬성하는 이노세를 지지했습니다. 노조가 보수우파를 지지하는 말도 않되는 상황이지요. 민주당은 누구도 공개지지를 표명하지는 않았습니다. 민주당 내에는 개헌 세력과 호헌 세력이 있기 때문에, 각각 개별투표를 선택했습니다.
이영채 : 여기서 일본 야당의 취약성을 보는 것 같습니다. 2011년 10월 서울시장 선거에서는 박원순이라고 하는 시민후보가 주도해서, 시민세력+중심 야당(민주당)이 연합하는 선거연합이 이루어졌고, 그로 인해 시민운동가인 박원순 후보가 당선되었지요. 일본에서는 왜 다수 야당이 보수 자민당을 지지하는 선택을 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갖게 되는군요. 한국에서도 민주당에 대한 비판은 많은데, 같은 민주당이지만 일본의 민주당은 훨씬 더 보수 우익정당과 중첩되는 성격을 갖는 것 같습니다. 일본 민주당의 정치구도를 좀 설명해 주시지요.
우츠노미아 : 일본의 민주당은 여러 그룹이 합쳐져서 만들어졌습니다. 사회당이 해체되면서 그 다수가 민주당으로 들어간 것이지요. 그래서 먼저 호헌세력(헌법9조를 포함해서 평화헌법을 지키려는 세력들), 즉 사회당에서의 분리파가 있지요. 그리고 사회당에 남은 세력이 현재의 사민당 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마츠시다정경학교(마츠시다전기산업, 현재의 파나소닉의 창업자인 마츠시다고노스케에 의해서 1979년에 설립된 정치학교. 국회의원, 도지사, 지방의원 등 정치가와 경영자, 대학교원, 미디어 관계자 등 다수의 인재를 배출하고 있음) 출신들이 있습니다. 민주당의 노다 전수상, 마에하라 전 외상 등입니다. 마츠시다 정경학교 출신들은 아주 보수적인 정치가들입니다. 이들은 자민당을 탈퇴해서 새로운 정당을 만들려고 하는 일본 신당(사키가케)에 합류하였고, 하토야마 유키오(1947년생, 민주당전대표, 2009년 민주당 정권교체후 수상역임) 그룹이지요.
1993-4년에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 護煕, 1938년~ )정부가 있었죠. 호소카와는 자민당세력이었습니다. 오자와 이치로도 있었지요. 그도 자민당 출신입니다. 일본정치구도는 자민당이 주도하는 소위55년체제(55년이후 제1여당은 자민당이 제1야당은 사회당이 점유하는 정치체제, 93년 호소카와 연립내각의 등장으로 55년체제가 붕괴함.)가 있었지요. 그 한 축은 사회당이었습니다. 자민당과 대립하면서 55년체제를 구성해 왔지요. 당시 일본사회당은 평균 100석 이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일본사회당의 후퇴의 최대원인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자민당과 함께 무라야마 내각을 만든 것에 있습니다.
94-95년의 무라야마 내각 때, 사회당은 집권당으로서 자위대를 인정했고 미일안보조약을 인정하기 까지 했습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사회당 내부의 분열을 가져왔지요. 사회당 내의 호헌세력은 분열이후 대부분이 민주당으로 이동했습니다.
민주당은 이런 식으로 여러 세력이 모아져 만들어진 것입니다.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일종의 파벌 연합이었던 셈이지요. 그래서 정권을 잡았을 때, 당 강령도 제대로 없었습니다. 이러한 민주당이 2009년 총선에서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그때 소비세 인상은 정책에 포함되지 않았던 것이었는데, 2012년에 그것을 시행했습니다. 민주당은 또한 선거에서 '콘크리트에서 사람 중심으로'라고 하는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하토야마의 경우 후텐마 기지를 현 외로 이동하겠다는 공약도 있었지만, 그 핵심 공약도 지켜지지 못했지요. 노다 정권은 아예 보수진영 및 미국과의 타협으로 나아갔고요. 결국 재무성과 외무성에 장악당한 정당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일본 민주당은 자민당과의 차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우경화된 정책도 채택했고요. 결국 일본 국민을 배신한 것이었습니다.
이영채 : 일본과 한국의 민주당은 이념적으로 보면 '자유주의적 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데도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자유주의 정당은 보수 정당과 신자유주의 정책 같은 데서는 많은 중첩성이 있지만, 또 정치적으로는 독립적인 자기 정체성이 있습니다. 과거의 독재에 대한 태도나 친일, 검찰 개혁 등에서는 자유주의 정치 세력이 보수정당과 비타협적인 긴장도 있지요. 예컨대 2009년 노무현 대통령의 재임 당시, 그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진보 세력에게 오히려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반면 죽음을 선택할 정도로 보수 세력과 대립하는 점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일본에서는 자유주의 정당이 이렇게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하는가, 사실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득표에도 도움이 될텐데요. 천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보수의 헤게모니 때문인가하는 생각도 해보네요. 결국 이러한 차이는 전전의 파시즘의 유산이 척결되지 않아서일까요.
우츠노미아 : 전후 일본과 독일을 비교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시는 것처럼 두 나라는 전혀 다른 경로를 걸었습니다. 독일의 경우는, 2차 대전이후 히틀러 나치즘의 침략전쟁, 유대인의 배제와 박해에 대해 철저하게 반성을 했습니다. 그러나 전후 일본의 경우, 전쟁협력세력들이 그대로 전후 일본을 재건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전쟁에 대한 자기반성을 철저하게 못했죠. 보수 내부에는 도쿄재판은 승자가 패자를 일방적으로 재판했다는 식의 정서가 존재합니다. 미디어에서도 이런 점만 일방적으로 강조하지요. 즉 도쿄전범재판을 피해자적 시각으로만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침략전쟁, 즉 중일전쟁에서 아시아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약 2000만 명의 아시아의 희생자를 만들었습니다. 히로시마 및 나가사키 원폭, 도쿄대공습에서만 약 300여만 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이런 문제들에서 일본은 전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죠.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대중운동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일본 헌법의 문제도 있습니다. 자민당은 헌법은 미국의 압력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역설적으로 '자주' 헌법을 만들겠다고 하는 강령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일본 헌법은 강요된 헌법이라는 논리지요. 하지만, 일본의 헌법제정과정을 보면, 먼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여 패전을 받아들였고, 그 내용속에는 전후 사회건설속에서 국민주권, 인권 존중의 사회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한 것입니다. 전쟁을 주도 한 세력이 전후에 해체되지 않고 남아서 오히려 그들이 권력의 중추가 되었습니다. 이후 그들 지배층은 평화헌법을 강요된 헌법이라고 규정하고 그것을 개정하려는 구조가 출현한 것이지요. 물론 그들과는 반대로, 노동운동이나 시민사회세력들은 평화헌법을 긍정적으로 평가해 왔습니다. 하지만, 전전의 세력들이 해체되지 않고, 지속되어 온 속에서 침략전쟁도 청산되지 못했으며, 지금도 그들이 권력층에 온존되어 망언과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구조입니다.
2014년 도쿄도지사선거 결과에 대해서
이영채 : 2014년 2월 도쿄도지사 선거는 여러 측면에서 일본사회 및 아시아 여러나라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호소카와 전 수상이 고이즈미 전 수상의 지원을 받아 도쿄지사에 출마했습니다. 그와 별개로 우츠노미야 선생이 시민사회운동, 사회민주당, 일본공산당, 녹색당 등의 지원을 받아 독자적으로 출마하여 호소카와 수상 보다 더 많은 득표를 하였습니다. 시민사회진영, 사민당, 공산당, 녹색당, 신사당 간에는 여러 이념적, 정치적 차이가 있었을 텐데, 어떻게 연합을 할 수 있었는가요?
우츠노미아 : 지난번 도쿄도지사 선거는 투표율이 62%정도였는데, 이번에는 16%정도가 낮았지요. 저의 득표율은 그 속에서도 96만표로 약 8만 표 정도 늘어났습니다. 약 20.18%를 획득했습니다. 지난번과 동일투표율이었다면 130만 표를 넘었다고 봅니다. 이것은 기존 사민당과 공산당의 기본표를 훨씬 넘는 지지율입니다. 중심은 시민단체이지만, 노동단체 및 정당 등의 참여로 인한 긴밀한 선거운동의 결과라고 봅니다. 전체 자원봉사자는 지난번보다 3배 이상 많았고 사무국도 2배이상 참여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운동이 확대되었다고 보고 있어요.
이번에는 네트선거(인터넷 선거 규제)가 풀렸고, 젊은 층들이 네트를 통해 자원봉사로 참여한 선거이기도 했습니다. 한국보다는 네트선거가 뒤쳐져 있지만, 최종투표일 전날 인터넷 방송에 출연했는데, 액세스가 수십 만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TV 시청율은 1%에 100만이라고 하지요. 10%면 1000만인데, 도쿄도 유권자가 1080만 명입니다. 역시 인터넷만의 한계를 느끼기도 했지요. TV토론회가 매우 중요했는데 특정 유력후보가 거부했다는 이유로 16회가 모두 불발로 끝났습니다. TV의 보도가 유권자들에게 각 후보의 정책을 전달하는 사명이 있다고 한다면 미디어의 사명을 포기한 것이지요. 가두연설은 한정된 사람들에게 밖에 전달되지 않습니다. TV토론회의 중요성을 느낀 선거이기도 했고요.
이영채 : 극우 보수후보가 60만 표를 얻고, 그것이 주로 젊은 층의 지지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일본 우경화의 한 단면일까요, 아니면 다른 해석이 가능할까요.
우츠노미아 : 전체적으로는 일본의 사회가 우경화 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다모가미 씨가 출마하지 않았다면 61만표는 마쓰조에 씨에게 들어가는 표입니다. 말도 안되는 우익의 논리를 주장하는 다모가미조차도 60만 표를 획득하는 사회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 일본의 심각성을 보여줍니다. 저의 경우 지난번보다는 선전했지만, 역시 승리를 거두지 못한 것은 도시부의 높은 보수의 벽을 깨기위해서는 강력한 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고 새삼 생각했고요. 이번에 함께 선거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은 그 가능성을 조금은 확인했다고 보입니다. 자신감도 얻었고요.
일본의 반빈곤운동
이영채 : 시민운동가로서의 정치참여와 함께 다양한 시민운동에도 관여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이라는 풍요롭다고 보여지는 사회에서 '반빈곤운동'을 한다는 것이 인상적이고요. 시민사회운동 내에서 반빈곤운동은 상당히 공감이 많고 신망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우츠노미아 : 반빈곤운동은 2007년에 만들어진 20여 개 조직의 네트워크입니다 (반빈곤네트워크는 인간답게 생활하고 노동의 보장을 실현하며 빈곤문제를 사회적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것으로 목적으로 내 걸고 시민단체, 노동조합, 정치가, 학자, 법률가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개인과 단체의 네트워크). 당시 까지 일본사회에서도 빈곤 등 격차가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국회나 미디어에서 정식으로 거론된 정도는 아니었죠.
2008년 리먼 쇼크가 있었고, 세계경제위기, 금융위기가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파견노동자, 정리해고 등의 문제가 대두되었고요. 노동자들이 자기 파산을 해서 노숙자가 되었습니다. 반빈곤 네트워크 회원들은 비정규직 지원을 주로 합니다. 히비야, 가스미가세키 등에서 연말연시에 천막촌을 만들어서, 오갈데 없는 이들을 지원하지요. 당시 500명이 넘는 노숙자들이 모여서, 사회적으로 크게 보도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일본은 경제대국이어서 누구나 일을 하면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실직하고 집도 잃어버린 노동자들이 주위에 많이 있다는 것을 미디어가 보도하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사회적 문제로 인식된 것이지요.
일본사회에서 처음으로 빈곤 문제가 보도되면서 정치계에서도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었습니다. 자민당의 오랜 실정의 결과라고 우리는 결론을 내렸고요. 연말 해를 넘길 무렵에는 민주당 간부들도 텐트촌에 와서 함께 참여했습니다. 미디어는 연일 이것을 보도하였고요. 2009년 8월 총선도 이 빈곤문제를 쟁점으로 해서 민주당이 권력을 잡은 것입니다. 콘크리트에서 인간 중심으로라는 슬로건도 이때 나온 것이고요.
반빈곤네트워크는 도쿄에서는 개인 가입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학생, 변호사들 중심으로 다중 채무자를 주로 지원하는 활동을 하고 있지만, 장애자, 가정 폭력 피해자, 싱글맘,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지원으로 확대되고 있고요. 이 네트워크는 지원단체와 당사자가 함께 일하는 조직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운영방식으로는 일년에 한번 전체 지회를 하고 지역별로 반빈곤페스티벌을 개최합니다. 전국을 도는 유세도 하고 있고요. 반인권 네트워크는 특정정당과 연결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일본에서는 노동조합이 3개의 전국센터(렌고(연합), 전노련, 전노협)로 나위어져 있는데, 이들 3개 노동단체와 연대하고 있습니다.
우츠노미아 : 직접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다만 예컨대 노동자복지협의회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전 렌고 회장 사사모리 키요시(1940-2011년, 노동운동가, 렌고 4대 회장으로 2001년-2005년 재임, 민주당 칸나오토 내각때 내각특별고문 역임)씨가 이 대표를 하고 있지요. 노복은 전국 조직인데, 저희들이 개인 다중 채무를 논할 때, 금리인하 운동을 주장해서 2006년부터 함께 연대했습니다. 이후 법이 개정되어, 채무자에 대한 금리인하가 이루어졌습니다.
다중채무 및 부실은행의 피해자들의 문제
이영채 : 다중채무는 한국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어서 참여연대 등이 캠페인을 했는데요, 어떤 쟁점이 있는지요?
우츠노미아 : 참여연대에는 2005년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다중채무를 조사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당시 민노당과 참여연대가 이 문제로 공동캠페인을 하고 있었습니다. 시민운동의 과제로서 고민되는 지점도 있습니다. 시민운동이 금리규제 철폐를 요구할 것인가 규제를 요구할 것인가 하는 것도 그런 쟁점이지요. 한국에서는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하에서, 금융 규제 철폐의 일환으로 금리 규제 철폐의 방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다중채무자가 급증하고 있었고 그로 인한 큰 사회문제가 대두되고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금리규제를 강화시키면 음성자금이 나오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금리규제를 철폐를 하는 것이 좋다라고 하는 신자유주의적 제안도 있지요. 그래도 우리는 그런 불법 자금을 이용하는 것은 비정규직, 또는 하층 노동계층이고, 빌려준 자와 빌린 자가 대등한 관계가 아니므로, 약자 보호를 위해서 금리 규제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나쁜 사례로 한국과 미국을 조사하러 갔던 것이지요. 프랑스가 좋은 사례였습니다. 결국 자민당 의원까지 설득해서, 일본에서는 금리규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금리규제는 업자를 규제하는 것이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빈곤의 문제입니다. 금리규제만으로 빈곤이 해결될 수 없습니다. 다중 채무 문제를 담당해왔던 전국 변호사들이 반빈곤운동을 같이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지요. 신용대책협의회라고 하는 식으로 관련 조직들도 만들어 졌고요. 관련조직들 중에서, 생활보호 문제 전국 대책회의가 있습니다. 아베 정권 하에서 생활 보호 지원액을 낮추고, 범위를 축소하려고 시도하고 있고, 이에 반대하는 활동입니다. 임대료를 못내어 쫓겨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캠페인도 하고 있습니다.
합리적인 금융정책 촉구위원회 같은 활동도 있는데요. 이 조직은 서울에서 동아시아 금융피해자들 모임을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대만 변호사들과 서울의 변호사들이 함께 참여했지요. 이외에도 다중 채무자들의 당사자들이 주체가 된 전국조직이 있습니다. 전국 46개 지역에서 80여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앞서 말씀드린 렌고(연합)과 노복단체가 참여하고 있는 것이지요.
사법개혁에 대해서
이영채 : 한국에서도 1990년대-2000년대에 사법개혁이 중요한 시민운동의 의제였습니다. 한국은 지금은 새로운 의제들을 탐색중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최근 일본 사법 개혁의 주요한 의제들은 무엇입니까. 한국에서는 검찰총장 직선제나 검찰개혁 등이 문제로 되고 있습니다. 특검의 상설화를 통한 기소권력의 분산 등도 여전히 의제로 남아있고요.
우츠노미아 : 먼저 사법제도 개혁을 말씀드리면요. 일본에서는 로스쿨 제도 도입과정에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로스쿨의 수업료가 비싸니까, 로스쿨 학생이 채무자가 되는 것이지요. 지금까지는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공무원 초임을 주었는데, 이제는 사법개혁을 통해 인원이 증가되었고 초임을 주지 않습니다. 2010년 경부터는 오히려 수습생들은 토요일에 아르바이트를 금지하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생활비가 부족하게 되었고, 이에 대해 돈이 필요하면 빌려주겠다고 하는 금융업자들이 나타났지요.
1~2년 동안 이들 업자들은 개인에게 약 300만 엔을 빌려주게 됩니다. 합격자가 늘어난 관계로 오히려 변호사 사무실에 취업 못하고 채무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 진 것이지요. 변호사가 되더라도, 인권활동을 못하고 채무 변제하기 위해서 돈이 되는 일만 하는 변호사가 많습니다. 그결과 활동가가 줄어드는 부작용도 있는 것이지요.
저는 집이 가난해서, 대학을 합격했는데도 중퇴하고 사법연수생이 되어 급료를 받는 쪽을 선택하였습니다. 사법 수습생 시절부터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은 재판관과 검찰이 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대책으로 급료제도를 유지하자는 안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채무 문제를 담당했던 단체들과 함께 비기너(beginner) 변호사회를 만들어 전국적 활동을 한 결과, 급여 1년 제공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그 후 민주당 내에서 170명이 급여제도를 유지하자고 했으나, 노다 정권에서는 재무성이 주장하는 의견만을 반영해서 예산 삭감을 의결해 버렸습니다. 채무상태로 변호사가 되는 사람들이 2013년으로 1기인데 2014년8월에 이들을 원고로 국가배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소송의 변호단장이고요.
이런 재정적 문제 및 생활문제가 대두하면서, 변호사협회의 구심력도 약해지고, 인권활동에 관심을 갖는 변호사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오히려 변호사 합격자 수를 줄이라고 주장하고 있지요. 로스쿨을 졸업하지 않으면 예비시험(사법시험1차)이라는 것을 보아야 하는데, 오히려 몇회 제한도 없애고 누구든지 응시하는 제도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로스쿨제도를 운용하다 보면 유사한 문제들이 나타 날 수도 있겠지요.
이영채 : 일본 사법질서 자체의 문제는 어떤 것이 있는지요.
우츠노미아 : 일본 사법 체계의 가장 큰 문제는 판단의 주체가 국가라는 것입니다. 최고재판소의 판단기준이 너무 기존 체제 및 국체(国体) 중심적 판결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과거부터 많은 주민들이 원전 가동 중단 소송을 했는데, 주민이 일부 승소한 것은 2건 밖에 없습니다. 후쿠이현의 몬주라고 하는 고속증식료 중단, 이시가와현의 원전 중단 소송이지요. 나머지는 모두 패소했습니다. 하지만 이 두 건조차도 최종 상급심에서는 패소했습니다. 사법부가 전력회사의 의견에만 동조한 결과이지요. 만약 헌법재판소가 원전소송에서 한 건 만이라도 정지판결을 했다면, 헌법이 정한 기본 인권을 지키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을 것입니다. 주민의 인권의 관점에서 사법판단을 해야 하는데, 사법부가 이를 포기해 온 것이지요. 그래서 사법의 개혁문제는 최고재판소의 관료적 체제를 개혁하는 것, 국가중심의 판결을 개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또다른 사례를 들어보지요. 최근 알려진 것으로, 일본의 하치오지시 다치가와지역의 미군 기지반대 투쟁이 있습니다. 일명 수나가와 투쟁으로도 불리는데요(1955~1960년에 걸쳐 진행된 주일미군다치카와비행장 확장반대 주민투쟁. 1957년 7월 측량저지를 위한 데모대가 기지에 진입한 것을 계기로 동년 9월 학생 및 노동자 23명이 검거되어 미일안보조약형사특별법으로 기소된 사건). 1957년에 미군 기지 확장에 반대운동을 한 사람들이 구속되어 처벌을 받게 됩니다. 당시 1심 판결을 담당한 사람이 다테 오키오(伊達秋雄,1909-1994년)라는 재판관입니다. 그는 일본 헌법에는 평화조항인 9조가 있으며 미군기지 확장을 반대하는 것은 정당하고 미일안보조약에 의한 미군의 주둔은 헌법위반이다며 전원 무죄 판결을 하였습니다. 60년대와 70년대의 미일 안보조약 개정 반대투쟁과 같은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판결에 반영된 것이지요.
당연히 미국 정부의 압력이 있었을 것이며, 고등재판으로 항소해야 했는데, 일본 검찰은 바로 최고재판소로 제소했습니다. 최고재판소에서는 황급하게 유죄 판결을 내렸지요. 당시의 정황이 최근에 알려진 것이지요. 다나카 고타로라고 하는 최고 재판관이 주일 미대사관의 수석공사와 만났고, 언제 이 재판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라는 미국측의 질문에, 가능하면 15명의 일치된 내용으로 재판하겠다고 재판 결과를 미리 알려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미대사관이 미 국무부에 전보로 보고했던 것이지요.
야마나시학원대학의 후카와 여성교수가 이 문서를 발견해서, 전문 공개를 요구했습니다(2013년 1월 16일 문서 해제, 동년 4월 류큐신문 등 일본 미디어의 보도). 이 공개 문서에 의하면, 일본 최고재판소 소장이 심리 중에, 계류 중인 재판 내용을 미대사관 관계자에게 사전에 알려줬다는 정황이 드러난 것이지요. 일본의 최고재판소가 재판의 독립성을 포기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이영채 : 주권의 문제와도 관련되기에 이번 문서공개는 많은 파장을 일으켰을 것 같은데요.
우츠노미아 : 일본의 재판소 법에서는 합의사항을 누출해서는 않되는 법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재판소 소장이 이를 어긴 것이지요.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 일본의 미디어는 거의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법 독립성의 치명적인 사안인데도 말입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성립 이후인데도, 최고재판소 소장이 미국에 판결내용을 알려주었다는 것은 일본의 최고재판소 관련 판결이 미국과의 협의하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1960년 전후에 이런 기사가 나왔다면 사법재판소는 운동단체에 의해 포위를 당해서 항의를 당했을 겁니다. 국회에서 이 문제가 거론되었을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임도 했을텐데, 보수화된 2000년 대의 현재는 이런 문제가 전혀 정치적인 문제의 중심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본의 전후 개혁의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후 일본은 미군정청의 점령하에 있었지요. 미군정은 일본내의 군국주의를 추방한다고 했지요. 특검 검사들을 주로 추방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사법개혁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전전의 반전 활동가들을 재판했던 재판관을 추방한다던지 하는 개혁은 일체 없었습니다.
한편 독일의 경우는, 나치 시대의 신문사는 모두 폐쇄되고 새로운 신문사로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아사히, 요미우리 등 전전부터 시작했던 일본 신문사들은 지금도 그대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태평양 전쟁을 독려했고 해외침략을 지지했던 신문과 방송은, 자기 반성을 하지 않은채 보도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언론사는 추방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독일에서는 전후 재판관 중에서도 나치에 협력한 재판관은 추방되었습니다. 젊은 재판관들이 추방운동을 했습니다. 스스로의 사법개혁운동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래서 독일의 재판관들은 노동조합 같은 것이 있습니다. 시민 집회에도 참여할 수 있고요. 미군 기지 반대운동에 참여해도 재판관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재판 조직은 매우 관료주의적입니다. 그래서 재판소의 존재방식을 바꾸지 않고 사법 개혁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이영채 : 일본의 사법부가 얼마나 국가주의적 시각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보여주는 군요. 사실 한국에서도 사법부는 노동문제 같은 사안에서는 매우 반노동적 판결, 보수적 판결을 해 왔습니다. 일본에서 노둥문제에 대한 판결은 어떠한가요?
우츠노미아 : 반노동자적 판결이 대부분입니다. 1970년대에 역시 혁신지자체들이 존재했었고, 패전 후부터 70년대까지를 보면 노동문제에 있어서 진보적 판결들도 많았습니다. 예를들어 청년법률가협회(청법협)—친일본공산당계열-의 일원이 재판관이 되기도 했습니다. 세호쿄(청법협, 1954년헌법을 옹호하고 민주주의 및 기본적 인권을 지킬목적으로 젊은 법률연구자 및 변호사, 재판관 등이 설립한 단체. 현재는 변호사학자합동부회, 사법수습생부회, 법과대학원생부회로 구성되어 있다. 회원은 약 2500명으로 일본변호사회와는 다른 임의 조직)는 실제로는 리버럴한 법률가 집단 입니다. 사법 연수원의 절반 이상이 이 단체에 소속해 있을 정도이니까요. 이 조직 출신의 재판관도 꽤 많았습니다. 이러한 영향으로 노동문제에 대해서도 노동자 중심의 판결이 나온 것이지요.
그러나 70년대 후반부터 이러한 판결이 나오는 것은 소위 좌익재판관때문이라며 문제시했습니다. 빨갱이 딱지가 붙여지기 시작한 거죠. 우익 잡지 <재판소 내의 빨갱이들>이라는 기사를 게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었지요. 이것을 최고재판소가 이 리스트를 전국 재판소에 회람시켰습니다. 저도 본 적이 있을 정도로요. 이런 형태로 청법협에 대한 우파의 공격이 이루어졌습니다. 공적자금이 투입되기 때문에 정부가 재판관에 대한 규제를 해도 된다는 발언을 자민당 의원이 하기도 했고요.
69년에는 히라가 서한사건(일명, 나가누마 나이키 기지 소송. 정부가 홋카이도 나가누마지역에 자위대의 나이키지대공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기 위하여 국유보안림 지정 해제를 하자, 주민들이 생존권을 주장하며 위헌 소송을 함. 당시 후쿠시마 담당 재판관에 대해 최고재판소소장인 히라가씨가 위헌 판결을 하도록 서한을 보냈다고 보수 세력들이 문제시함. 보수 세력들은 후쿠시마씨 및 히라가 재판관이 청법협 소속인 좌파 재판관을 여론삼아 결국 히라가씨의 해임으로 이어진 사건. 당시 안보투쟁 및 베트남전쟁과 관련되어 정치사안이 되었음)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히라가사건 등의 영향으로 약 350명 정도의 청법협 소속의 재판관 중에 150명 정도가 해고되었습니다. 71년에 제가 사법연수원 졸업을 했는데(23기), 저희 사법연수생 중에서 재판관 임관 신청을 한 사람 중에 7명이 거부당했습니다. 6명이 청법협 출신이었거든요. 그 중 1명은 지지자였고요.
일본의 재판관은 10년에 한번씩 재임용이 있는데, 23기가 임용받을 때, 13기가 재임용 받지요. 그중 1명이 재임용에 거부당했습니다. 청법협에 대한 공격 때문이죠. 당시 청법협은 일본공산당의 영향을 받는 관계였습니다. 직접적인 관계는 아니지만요. 청법협 사건 이후에 사법부 판결이 매우 강경화되어 갔으며, 일본의 사법계는 이런 역사적 과정을 거쳐서 결국 보수화의 길을 걷게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일본의 사회운동의 약함을 반영하는 결과이지만요.
이영채 : 노무현 정부 때, 한국의 경우 우리법연구회에 대해 보수언론이 마녀사냥식 비판을 했던 것을 연상시키는군요. 쫓겨나지는 않았습니다. 한일 간의 경험적 차이를 느끼게 하네요.
일본의 평화헌법 개헌저지 운동에 대해서
이영채 : 현재 개헌반대운동도 열심히 하시는 것으로 알고있는데, 향후 개헌과 호헌의 전망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고계시는지요.
우츠노미아 : 아베 정권은 개헌을 정면으로 내걸고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2012년 12월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3분의 2 의석을 확보했습니다. 참의원선거에서 3분의 2를 갖게 되면 헌법 발의를 할 수 있게 되죠. 일본도 중의원, 참의원의 3분의 2 찬성이 필요합니다. 이후 국민투표에 부쳐지고 과반수의 찬성으로 성립합니다. 국민투표법은 1차 아베 내각에서 이미 성립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최저투표율이 있어서, 유권자의 과반수가 투표하지 않으면 인정되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최저투표율을 정해야 한다고 우리 변협도 주장했으나, 안 되었습니다. 20%가 투표하고 2분의 1이 찬성하면 가결된다는 것은 문제이지요.
개헌의 내용과 관련되어 문제는 더 많습니다. 예컨대, 아베정권은 집단적 자위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먼저 일본이 공격을 받을 경우 반격을 하는 것은 헌법의 범위 내에 있다는 것. 동맹국인 미국이 공격당하면, 일본이 도와줄 수 없는 현재의 상황은 문제가 있다는 식이지요. 저희로서는 일단 3분의 2를 저지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입니다. 그 다음에는 국민투표를 통해서 저지하겠다는 각오도 하고 있습니다. 입헌주의 이념, 국민 주권, 인권 보호, 영구 평화 등을 국민들에게 알려내는 과제가 우리 일본의 평화 세력들에게는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일본 국내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지요. 개헌은 인권 옹호의 축소이며, 민주주의의 침해입니다. 무엇보다 전후 평화국가로서의 일본 국가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것이지요.
호헌담론의 새로운 혁신이 필요하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저들은 개헌담론을 보통국가, 평화유지군, 국제기여 등으로 혁신해내는데, 우리에게는 혁신이 보이지 않지요. 저들의 개헌시도가 세계화시대에 퇴행적이라는 점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부각시켜 내는 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전국에 약 5000개의 헌법 9조를 지키자고 하는 단체들이 있습니다. 인권 보호를 위한 수많은 법률과 규정들이 많은데 이를 실현하는 노력이 부족했지요. 우리들은 지금까지 문헌과 조항을 지키는 운동만 해왔습니다. 실생활속에서 호헌의 구체화를 착근시켜야 합니다. 이런것이 호헌세력의 질과 내용의 혁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영채 : 장시간 일본의 반빈곤운동, 정치개혁 및 사법개혁, 개헌과 호헌 운동에 대해서 자세하게 의견을 제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많은 시사를 던져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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