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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에게 맞아 죽은 이 아이…왜 때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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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담임에게 맞아 죽은 이 아이…왜 때리나

[정희준의 어퍼컷] 폭력과 협잡의 한국 교육

중학생인 아들에게 물었다. 선생님들이 학생들 때리냐고.

“아니. 이번 담임선생님은 안 때리고 다른 과목 선생님들도 안 때려. 이번에 정말 운이 좋아. 1학년 애 하나는 얼마 전에 따귀까지 맞았어. 입학한 지 사흘 만에. 정말 불쌍해.”

우리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중산층 밀집거주지역에 있어서 평균적으로 다른 중학교보다 사정이 나을 것이라 생각했는데도 교사들의 폭력이 끊이지 않는 것 같다. 이제 초등학교 갓 졸업한 아이를 입학 사흘 만에 따귀 때리는 게 우리나라 교사들이다. 내 아들도 교사들에게 몽둥이로 손바닥, 엉덩이를 맞았다.

교사들은 때리기도 하지만 가혹행위를 하기도 한다. 귀 옆머리 잡아당기기나 젖꼭지 꼬집어 비틀기 같은 고전적 방식을 아직도 쓰고 있고 또 양손가락 깍지 끼고 엎드려뻗쳐를 시키기도 한다. 어른들도 견디기 힘든 가혹행위다. 동네 학부모들을 물론 학원가에서도 폭력으로 유명한 교사도 있는데 옛날에 몇몇 학부모들이 학교 측에 항의도 해봤지만 그 교사는 지금도 변함없이 꾸준하게 애들을 때리고 있다. 왜? 학교가 결국 공범이기 때문이다. 교장선생님이든 주임선생님이든 초임선생님이든 그런 악역(?)을 자처하는 폭력교사가 있어야 자기들이 편하기 때문 아니겠는가.

교사의 폭행이 논쟁거리가 되는 한국

한국의 교육은 참으로 기괴하다. 도대체 어느 나라에서 교사가 학생을 때릴까. 후진국에서는 때릴까? 그럴 거 같지 않다. 교사라는 사람이 어떻게 초등학생의 머리를 때리고, 엎드려뻗쳐 시킨 채 발길질을 하고, 중학생의 따귀를 때리고, 몽둥이로 수십 대 매질을 하고, 여고생을 창고로 끌고가 “이 ○○년아”하며 두들겨 팰 수 있나. 도대체 스승이 제자를 폭행하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아이, 왜 아이들에게 손을 대나. 우리나라는 말이 안 되는 게 말이 되는 나라다.

나는 TV 심야토론에서 학생들에 대한 체벌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한다는 자체가 엽기적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사회의 후진성과 야만성을 증명할 뿐이다. 교사의 학생 체벌은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왜?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도 때린다고? 미국에도 체벌이 있다고? 웃기는 소리다. 그런 주가 몇 되지도 않지만 학생 체벌하려면 그 절차가 하도 복잡해 때리려다 지쳐 포기한다. 체벌에 사용할 도구의 규격과 무게가 정해져 있고 (바람의 저항을 줄이려고 몽둥이에 구멍을 뚫으면 안 된다는 조항까지 있다.) 온갖 보고를 한 후에 참관인이 입회한 가운데 체벌을 해야 한다. 체벌 규정이 존재하는 주가 있지만 이마저도 사문화된 지 오래다. 미국에 수많은 한국교민들이 있다. 자기 자식이 학교에서 선생한테 맞았다는 교민 본 적 있는가.

학교 내 폭력, 교사들의 폭행이 그렇다면 왜 사라지지 않는가. 그들을 탓하기 이전에 나부터 반성한다. 우리 아이가 교사에게 맞았다는 말을 듣고 나는 잠시 고민했다. 학교에 가서 그 교사와 마주해야 하나.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이게 바로 ‘한국사회’라는 것을, 우리 ‘교육의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무엇보다 내가 학교에 쳐들어가 난리 피우고 사과를 받아봐야 나중에 내 아이가 그들에게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는 당연한 불안감도 나를 눌러 앉혔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아이들의 고통을 못 본척하며 현실과 타협하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비겁한 결정을 하는 사이 아이 하나가 또 죽어갔다. 자신의 가족도, 친구도, 꿈도 빼앗기고 하늘나라로 간 것이다. 이 아이는 담임선생에게 당하고 학교로부터도 버림 받았다. 자기의 스승들로부터 능욕 당한 아이를 친구들이 나서서 누명을 벗겨준 것이다.

모든 스승은 공범이다

봄방학이었다. 그렇지만 고3에 올라가는 현수(가명)는 보충수업 때문에 8시까지 등교해야 했다. 어느날 5분 늦었다. 담임선생님은 현수를 불러내더니 벽에 머리를 박으라고 했다. 그래서 현수는 ‘쿵, 쿵’ 두 번 박았다. 그랬더니 “그래 가지고 되겠어!” 하며 현수의 뒷머리채를 잡아 현수의 머리를 두 차례 벽에 들이받았다. 벽이 울릴 정도였고 제 자리로 돌아오던 현수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릴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현수는 평상시와 다르게 말이 줄고 움직임도 무거워보였다고 한다. 청소시간이 됐는데 현수의 청소가 좀 느렸나보다. 그 담임선생은 이번엔 오리걸음을 시켰다. 오리걸음까지 군말 없이 다 하고서 현수는 교회에 갔다. 친구들과 하는 기도모임이다. 하나님 믿는 일에 열심이었던 현수는 고3이었지만 친구들과 기도하는 모임을 만들어 매일 모였다고 한다.

교회 모임 끝나고 현수는 집에서 저녁을 먹고 태권도장에 갔다. 10분 정도 몸을 풀었는데 쓰러졌다. 이후 현수는 깨어나지 않았다. 결국 폭행이 있은 13시간 뒤 쓰러져 식물인간이 된 후 22일 만인 지난 11일 현수는 체육선생님이 되리라던 꿈을 이루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가야했다.

현수는 중학교 때 야구선수였다. 소년체전에 대표로 출전할 정도로 잘했는데 고등학교 때 야구를 그만 뒀다. 그때쯤인가 현수 어머니는 혼자가 되셨다. 그리고 또 이때쯤인가 현수는 방황과 반항의 사춘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현수 어머니는 혼자 두 아들을 열심히 키웠다. 친척들과 치킨집을 운영하면서 열심히 기도하며 현수를 뒷바라지했다. 그 덕인지 방황하던 현수도 돌아왔다. 체육선생님이 되겠다며 태권도장에 다니기 시작했고 일요일 예배 뿐 아니라 친구들과 주중 기도모임까지 만들었다. 현수는 홀로 된 엄마가 기도로 키운 자식인 것이다.

현수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안타까움과 슬픔과 분노에 휩싸이게 된다. 그 담임선생은 현수가 1학년 때도 담임이었고 한다. 현수의 지인 말에 따르면 담임선생은 1학년 때도 유독 현수에게 험하게 했다고 한다. 현수는 이미 그때부터 그 교사를 무서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현수가 몸이 너무 튼튼하고 착한 게 오히려 문제였다고 한다. 힘들어도 모두 참고 견딘 것이다.

한국의 ‘살인교육’

그런데 사고가 생기고 벌어진 일들이 가관이다. 담임선생은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다. 현수가 사고 전날 학교 일정을 정상적으로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하교를 했음에도 그는 현수가 전날에도 아파서 조퇴를 했다며 유족들에게 자신이 조작한 출석부를 내보인 것이다. 또 그는 담대하게도 제자들에게 현수가 전날 아파서 조퇴했다는 거짓 진술서를 쓰라고까지 했다. 천만 다행스럽게도 그의 거짓말은 학생들에게 들통이 났고 현수의 친구들은 담임선생의 강요를 거부했다. 친구들 열한명이 현수가 전날 방과 후 함께 집에 갔다는 사실을 서로 돌아가며 동영상을 찍어 증언한 것이다. 담임선생은 지금도 자기 때문에 현수가 죽은 것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출석부 조작, 위증 강요는 왜 했나.

이게 도대체 무엇인가. (곧 밝혀질 현수의 직접적 사인이 무엇인지는 차치하고라도) 교사가 학생을 폭행하고 스승이라는 자가 증거를 조작했을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 거짓진술까지 강요했다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 과정을 동료 교사들이 몰랐을 리가 없음에도 이 거짓말 공방이 벌어지는 동안 학교는 뒷짐 지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책임을 피하기 위해 잽싸게 변호사를 선임하고 학생회 학부모들을 동원해 현수를 매도하기까지 했다. 교장은 현수가 사망하고 장례를 치르는 그날까지도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제자의 사고와 불행을 나몰라라 하고 빠져나갈 궁리만 한 것이다. 자기 살겠다고 불쌍한 제자를 내팽개친 것이다.

현수의 사망은 한국의 교육제도가, 우리 사회의 입시경쟁이 빚어낸 비극이다. 현수가 담임선생에게 폭행을 당한 날은 방학이었다. 그런데 그 고등학교는 지난 대학 입시에서 순천지역에서 가장 저조한 성적을 거뒀다고 한다. 그래서 교장은 학기 중 토요일 보충수업을 결정한 데 이어 방학 때인데도 학생들을 등교하게 했다. 또 당시 개학 전이라 아직 2학년이었지만 학교는 3학년으로 반 배정을 하고 새로운 3학년 담임선생들이 아이들의 보충수업을 지도하도록 했다. 학년초였으니 당연히 군기를 잡으려 했을 것이다. 거기에 현수가 걸려든 것이다. 현수의 지인이 한 말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홀어머니가 치킨 팔아 기도로 키운 아인데... 없는 집 애가 당한 거지.”

누가 우리 아이들을 때리는가

그렇다면 도대체 제자를 때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제자를 폭행하는 선생, 또 체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교사는 보통 세 종류의 교사들이다. 첫째, 어릴 때부터 맞고 큰 사람들이다. 이해한다. 사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컸다. 그러나 사회의 기준이 바뀌기 마련인데 그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문제가 된다.

둘째는 능력이 없는 교사들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교습법, 지도법을 다 썼는데도 아이들이 이해를 잘 못한다. 성적이 오르지 않고 아이는 계속 딴 짓이다. 그렇다면 어째야겠는가. 달리 방도가 있겠는가. 때려야지.

셋째로는 아이들에게 시간을 투자하기 귀찮은 교사들이다. (다른 말로 ‘효율성을 추구하는 교사들’이다.) 이들에게 ‘학생지도’는 자신의 제자들과 십분, 이십분 대화하고 소통하는 게 아니다. 이들의 ‘학생지도’란 조용한 교실을 만드는 것이고 선생님 말에 말대꾸 안 하게 훈육하는 거다. 이를 위해서는 학생과 일대일로 앉아 대화하기 보다는 교실 문 열고 들어갈 때 떠들거나 혼자 서있는 학생들 불러내 따귀 때리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을 아는 교사들이다. 불러내 때리고 들어가기까지 10초면 상황종료(?)된다. 얼마나 효율적인가.

사실 이 세 부류의 교사들은 서로 통하는데 이들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군대식 상하관계로 본다. 자기가 교실에 등장하면 학생들이 각 잡고 앉아있어야 하고 말하는 아이가 없어야 하며 자신에게 말대답 하는 학생이 없어야 한다. 결국 이러한 교사들은 자신의 권위(또는 권력)을 중시한다. 자신이 지도하는 대로, 아니 자신이 지시한 대로 따르지 않는 학생은 벌하고 ‘응징’한다. 그리고 다른 학생이 있는 가운데 자신의 권위를 흔드는 학생이 있다면 그 아이는 가혹하게 처단한다.

교사 폭력의 메커니즘

이들이 교권을 행사하는 근간에는 권력자로서의 자존심이 깔려있기 때문에 학생이 말을 듣지 않을 경우 필요 이상의, 본보기가 될 체벌을 할 수 밖에 없다. 이때만큼은 제자를 제자로 보지 않고 자신의 상대 내지는 꺾어야 할 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이번 사건처럼 폭력에 관대한 한국사회에서 도가 넘는 폭행이 벌어지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교육에서 교사는 학생을 논리로 이해시키거나 설득하기 보다는 지시하고 명령한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고 권력에 저항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특히 교사들은 자신들이 온갖 잡다한 규칙을 일방적으로 정해 놓고는 이를 지키지 않으면 ‘교권 침해’라고 주장한다. 한국 교육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사랑이다. 일 년 동안 학생들과 십분이라도 따로 대화의 시간을 갖는 교사가 몇이나 될까.

우리나라에서 ‘폭행 면허증’을 받은 집단이 딱 둘이다. 교사와 체육인들이다. 일반인들은 웬만한 구타나 언어폭력에도 경찰서로 가는 게 다반사임에도 이들 두 집단은 때로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고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이들은 오랜 세월 면죄부를 받으면서 한국사회에서 가장 폭력적인 직업집단이 되어갔다.

때리는 교사보다 때리지 않는 교사들이 더 많다. 그러나 그 때리지 않는 교사들도 때리는 동료 교사들의 모습을 보고서 못 본 척 한다면, 또 구타당하는 학생들의 고통과 공포를 보고서도 모른 채 한다면, 그들도 결국 공범이고 가해자이다. ‘교실붕괴’를 주장하던데 그게 다 아이들 탓인가. 교사들은 털끝만큼의 잘못도 없는가.

교사들은 요즘 아이들이 너무 말을 안 듣는다고 한다. 당신이 말을 잘 못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너무 버릇이 없다고 한다. 당신의 사랑이 부족한 것이다. 사랑해서 때린다고 한다. 그건 사디스트나 하는 짓이다. 교육엔 체벌이 필요 없다. ‘사랑의 매’라는데 사랑하면 매를 들 이유가 없다.

교육과 폭력은 공존불가능한 것이다. 교사는 교육만 시키면 된다. 학생이 늦고 실수를 많이 하면 부모에게 일려도 되고 벌점을 줘도 된다. 숙제 안 해오면 감점을 하면 된다. 손을 댈 이유가 없다. 성적이 안 좋고 집중을 안 하면 당신이 못 가르친 것이고 당신이 동기부여를 못 한 것이다. 스스로를 돌아봐야지 학생 탓만 하면 그건 선생이 아니다. 학생 탓도 좋다. 왜 때리는가. 아이들이 당신들 스트레스 해소용 도구인가.

세계에서 가장 불쌍한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 사과하며

아이들 머리카락 하나도 건드리지 마라. 다른 나라에서는 손끝도 대지 않고 잘 가르치고 있고 아이들도 잘 배우고 있다.

교사의 꿈을 접고, 엄마와 동생을 두고 하늘나라로 떠나간 아이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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