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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문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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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문제들

샌프란시스코 체제: 미-일-중 관계의 과거, 현재, 미래 <4>

미국이 일본을 자신의 하위 군사파트너로 이용하려 하는 한, 일본의 과거사 청산은 불필요한 과제였다. 이에 따라 미국은 일본 재무장을 촉진하기 위해 과거 일본의 악행과 이에 따른 한국, 중국 등의 수난을 촉소, 은폐했다. 결국 일본이 제국주의 과거에 대해 진정한 반성을 하지 않으면서 한중과 일본 간의 과거사 논쟁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격화되고 있다. 여기에는 국내정치적 이유들, 과거사 문제를 국내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는 각국의 내부 사정이 겹쳐 과거사 문제는 동아시아의 집단적 평화를 가로막는 가장 커다란 장애물의 하나가 됐다. <편집자>

(5) ‘역사문제들’

일본의 재무장과 과거 일본의 부정적 유산 은폐가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점은 일본의 패전 직후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출범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어제의 군국주의 적대국가 일본이 하루아침에 평화를 애호하는 미국의 우방국이 된 것이다. 반면 2차 대전 당시 미국의 동맹국이었던 중국은 졸지에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빨갱이 위협’의 일부로 악마화됐다. (미국은) 일본의 재무장을 촉진하기 위해 일본, 미국은 물론이고 국제적으로도 과거 일본의 악행과 이에 따른 중국의 수난을 축소, 은폐했다.

제국주의 일본의 악행을 지워버리는 작업은 샌프란시스코 협상 이전부터 시작됐다. 예를 들어 1946년 중반부터 1948년 말까지 미국 주도로 진행된 도쿄 전범 재판에서는 일본의 대(對)한국, 대중국 관계를 악화시킬 소지가 있는 학살의 실상이 은폐됐고, 수 십 년이 지나서야 그 실상이 드러났다. 하얼빈에 본부를 둔 관동군 731부대가 포로들을 대상으로 벌인 범죄적인 인간생체실험, 그리고 주로 한국인 여성들을 납치해 일본군의 성 노예로 전락시킨 ‘종군위안부’ 사건 등이 그러한 사례들이다. 1948년 11월 A급 전범에 대한 재판이 끝나면서 주요 전쟁범죄 및 고위급 전범들에 대한 추가 조사는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다.

▲ 1951년 9월 8일 요시다 시게루 당시 일본 총리가 미국과 강화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The Asia-Pacific Journal: Japan Focus
사실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협상은 동아시아의 어두운 과거를 직시하고 잘못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묻는 자리가 돼야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사과를 받고 그 책임을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두 당사자인 중국과 한국이 배제됐으며, 역사를 왜곡하고 어두운 과거에 대한 기억상실을 권장하는 자리가 됐다. 미국 고위 관리들이 즐겨 쓰는 형용사를 빌리자면 샌프란시스코조약은 ‘관대한’ 평화를 가져온 것이다. 영국과 캐나다 등 일부 협상 참가국들이 ‘전쟁 범죄에 관한 조항’을 조약에 포함시키자고 제안했으나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른 분리된 평화는 지역 전반의 화해 대신 배제를, 일본의 전쟁 책임 추궁 대신 일본 제국주의의 상흔을 온존시킨 것만이 아니었다. 미 군정 기간 동안 전쟁 범죄를 이유로 공직에서 배제됐고 심지어 A급 전범으로 체포됐던 과거 일본의 정치인과 관료들이 멀쩡히 되살아난 것이다. 1957년 수상직에 오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는 전쟁범죄자로 규탄 받았던(그러나 기소되지는 않은) 인물이다. 기시 총리는 1960년 대학생을 비롯한 일본 국민들의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개정 미·일 안보조약의 의회 통과를 주도했다. (2012년 12월, 센카쿠 영토분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기시의 외손자 아베 신조(安倍晋三)는 2006년에 이어 두 번째로 총리를 맡았다. 그는 총리 취임 직후 애국주의를 외치면서 할아버지 세대의 이른바 전쟁범죄를 부정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1951년) 이후 한참이 지나서야 일본과 남한(1965년), 일본과 중국(1972년)의 국교가 정상화됐고,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구 일본 정치인들이 1950년대에 정치에 복귀함으로써 골치 아픈 역사문제는 이후 세대로 계승됐다. 물론 중·일 외교 관계를 복원시킨 1972년의 공동성명에는 “일본 측은 과거 전쟁을 통해 중국 인민들에게 입힌 엄청난 피해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며 이에 대해 깊이 반성한다”고 돼 있다. 또 26년이 지난 1998년 중국과 일본은 우호협력 선언을 통해 “과거를 직시하고 역사 이해를 바로잡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선언에서 일본은 역사상 처음으로 “과거 특정 시점에서” 일본의 행동이 “침략”이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현재 한국과 일본, 중국과 일본 관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역사문제’의 비정상성은 한일, 중·일 관계가 뒤늦게 복원됐고 이에 따라 과거사 문제가 여러 이유로 활용, 또는 악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화해와 건설적 관계의 수립이 한 중, 일 세 나라의 공격적 민족주의를 해소하기보다는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일본은 수차례에 걸쳐 한국과 중국에 대해 과거사 문제를 공식 사과했다. 그러나 이러한 유감 표명은 거의 언제나 일본의 고위 정치인, 유명 인사, 또는 과거 일본의 해외 침략 및 억압에 관련된 기구들의 망언과 명백한 부정 등에 의해 그 빛이 바랬다.

역사문제에 관한 중·일 간의 점증하는 갈등은 때때로 기막힌 역설 속에 전개돼 왔다. 예컨대 중국과 일본이 평화조약을 맺은 1978년 일본은 비밀리에 A급 전범 14명의 유해를 ‘쇼와의 순국자’들이란 이름 아래 야스쿠니 신사에 봉안했다. 또 2차 대전 40주년인 1985년에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당시 총리를 비롯한 내각 장관들이 야스쿠니 신사를 공식 참배함으로써 일본 국내는 물론이고 국제적으로도 커다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해에는 중국에서 난징대학살 기념관이 개관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과거 일본의 침략 및 학살에 대한 중국의 집착은 기념관 건립, 대중매체의 보도에서 길거리시위에 이르기까지 그 표현수위에 있어서 기하급수적으로 강화됐다. 반면 일본 우익의 전쟁범죄 부정은 이에 발맞춰 더욱 뻔뻔스러워졌다.

부분적으로(오직 부분적으로만), 일본이 한국 및 중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한 이후에 역사문제가 더욱 논쟁적인 이슈가 된 데는 한 가지 단순한 이유가 있다. 한중일 모두에서 최근 역사에 대한 관심이 재점화됐고 역사적 자료들에 대한 접근이 쉬워졌기 때문이다. 1970년대부터 일본의 전쟁 범죄 및 전쟁 책임에(난징 학살, 731부대의 생체실험, 종군위안부 문제 등) 대한 뛰어난 학술적 성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성과들의 대부분은 일본 학자 및 언론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 내용은 매우 도발적인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 내에서는 애국심에 불타오르는 우익들의 역사 부정이, 국외에서는 국제적 비난이 끓어올랐다. 이러한 현상은 한중일 세 나라에서 이미 타오르기 시작한 민족주의 감정에 기름을 붓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 기본적으로 국내문제에 사로잡혀 있던 각국의 정치지도자들에게는 절호의 정치적 소재가 됐다.

동시에 중국과 일본 모두 자국의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민족주의를 강화해 나간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없다. 일본의 경우, 1970~80년대의 이른바 경제 기적에 따른 자존감과 오만이 ‘도쿄전범재판식 사관’(일본 우익들이 즐겨 쓰는 표현)의 상흔을 지우자는 애국적 캠페인으로 번져갔다. 중국에서는 1978년 덩샤오핑(鄧小平)에 의해 도입된 자본주의적 개혁이 이전의 마르크스주의 및 마오주의를 대체했고, 그 빈 공간을 새로운 민족주의가 채웠다. 새로운 민족주의는 외세에 의한 중국의 수난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 1차적 공격 목표는 일본이었다. 1949년 중국 건국 이후 수 십 년 동안 중국 공산당은 미국과 일본에 의한 군사적 위협을 강조한 반면, 일본의 과거 악행은 상대적으로 덜 부각시켰다. 이러한 중국의 태도는 1970년대의 중일 관계 개선에 따른 아주 짧은 동안의 우호와 친선 기간을 지나고부터는 갑작스럽게 (일본에 대한 공세로) 변화했다.

이러한 민족주의와 역사 문제의 결합은 중국과 일본 모두에서 ‘기억’을 선전선동으로, ‘역사 문제’를 역사전쟁으로 바꿔 놓았으며 현재까지 그 끝이 보이지 않고 있다. 중국의 비난 대 일본의 전쟁범죄 부정은 이제 다층적이며 거의 의례적인 수준으로 영속화되고 있다. 일본에 과거의 부정은 스러져가는 국민적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필수적인 작업이다. 중국에 역사문제의 제기는 매우 복잡한 국내 문제와 긴밀하게 얽혀 있다. 중국이 반복적으로 일본의 전쟁 범죄를 제기하고, 나아가 진정한 사과를 하지 않는다고 공격하는 것은 단지 애국적 열기를 고취시키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공격은 국내 문제와 이에 대한 불만을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하려는 술책이다. 동시에 중국은 일본의 역사 부정을 공격함으로써 1949년 건국 이후 공산당이 중국 인민들에게 자행해 온 범죄를 은폐하려 한다.

(번역 : 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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