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체제의 부정적 유산 중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지역 당사국 간의 영토분쟁이다. 다우어 교수에 따르면 이 영토분쟁은 “무관심이나 부주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차단하기 위한 냉전 전략의 일부로 영토 분쟁의 소지들을 조약 곳곳에 심어 놓았다. 예컨대 샌프란시스코 평화 협상을 위한 미국의 초기 초안에는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고 명기돼 있었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화된 직후인 1949년 12월 미국은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입장을 바꿨다. (6.25전쟁 직후인) 1950년 8월경 미국의 초안에는 독도에 대한 언급 자체가 모두 사라졌다. 최종적으로 조약은 한국의 독립을 애매하게 언급했으며, 일본의 영토 범위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다. 조약이 체결되기 한 달 전인 1951년 8월, 미국은 한국정부에 대해 독도를 일본 영토로 간주한다고 통보했다.
특히 1956년 일본과 소련이 문제의 북방 4개 섬을 각기 2개씩 나눠 갖는 방안으로 평화조약을 체결하려 하자 미국은 일본이 북방영토의 일부라도 소련에 양보한다면 오키나와를 미국령으로 만들 것이라고 위협해 평화조약을 무산시킨다. 이처럼 동아시아의 영토 분쟁은 지역 국가들의 원만한 화해를 가로막고 미국이 일방적으로 이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편집자>
2. 8개의 부정적 유산들(Problematic Legacies)
1951년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받아들일 당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보수 정부의 선택은 단순했다. 그것은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이론적으로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다자간 평화조약 및 일본의 재무장, 미군의 일본 주둔 계속, 그리고 평화조약에서 중국 공산 정권의 배제라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대신 일본의 독립과 미국의 안보 보호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일본의 야당 세력인 자유주의 및 좌파 세력이 주장했던 모든 나라와의 평화조약 체결 및 일본의 비무장 중도노선 견지였다. (미소가 대치하는) 냉전 상황 하에서의 중도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아가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일본의 독립은 허용되지 않을 것이었고, 미군의 점령도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요시다의 강력한 우군인 일본의 친미반공세력들조차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일 경우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특히 일본 경제계에서는 중국 공산 정권을 인정하지 않고 고립시키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미 군정이 끝난 이후에도 일본 전역에 얼마나 많은 미군 부대들이 남아있을지에 대해서도 우려가 있었다. 나아가 일본이 조속히 재무장해야 한다는 워싱턴의 요구에 대해서는 근시안적이며 어리석은 결정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요시다를 비롯한 일본 지도자들은 일본의 때 이른 재무장이 국내는 물론이고 과거 일본 침략의 피해를 입은 국가들로부터 거센 반대에 부딪힐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와 대부분의 국민들은 샌프란시스코 체제와 이에 따른 국권의 회복을 환영했다. 나아가 미국과 일본의 주류세력은 이 같은 냉전질서의 수립을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이 체제는 일본의 과거 청산을 면제해 준 관대한 처분이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일 안보 관계는 일본의 전략 및 외교 정책의 초석이 됐다. 샌프란시스코 체제 아래에서 일본은 민주적이고 평화로우며 번영하는 국가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한없는 축복으로만 볼 수는 없다. 그와는 반대로 이 체제는 일본에 일정한 정책들을 강요하는 구속복(straitjacket)이 됐다. 그리고 그 정책들은 이후 세월이 지날수록 여러 가지 문제를 초래하게 된다. ‘축복’과 ‘구속복’은 양립할 수 있다. 이 둘이 공존하면서,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그 시작부터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을 잉태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정적 유산으로는 다음 8가지를 들 수 있다. (1) 오키나와와 ‘2개의 일본’ (2) 한국, 중국 등 이웃 나라들과의 영토분쟁 (3) 일본 내 미군 기지 (4) 일본의 재무장 (5) ‘역사문제들’ (6) ‘핵우산’ (7) 중국 봉쇄와 일본의 아시아로부터의 이탈 (8) 일본의 ‘예속적 독립’
(1) 오키나와와 ‘2개의 일본’
2차 대전과 초기 냉전이 빚은 비극적 유산 중 하나는 한반도, 베트남, 독일, 중국 등 분단국가의 생성이다.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이와는 다른 의미에서 일본을 2개의 지역으로 분리시켰다. 류큐 열도(琉球列島)의 남쪽 끝 오키나와(沖繩島) 현을 일본의 다른 지역과 분리해 미군의 요새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물론 이는 다른 분단국가들만큼의 비극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화는 일본 중앙정부와 미국 간의 유착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미국이 보기에 오키나와는 2차 대전이 끝난 직후부터 미국의 군사력을 아시아에 투사할 수 있는 ‘발진기지’로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곳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미국의 관점은 소련의 핵무기 개발, 중국의 공산화, 6.25전쟁의 발발로 인해 더욱 강화됐다. 한편 일본의 정책결정자들에게 오키나와는 언제든 버릴 수 있는 흥정카드였다. 샌프란시스코 협상이 열리기 이전부터 이미 일본 정치지도자들은 일본의 주권 회복을 앞당길 수만 있다면 오키나와를 포기하겠다는 제안을 작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미·일의 정책과 관점은 샌프란시스코 체제에서 공식화됐다. 오키나와는 ‘관대한’ 평화 조건에서 예외로 규정된 것이다. 오키나와는 미국의 행정권 아래 들어갔다. 6.25전쟁 동안 오키나와의 카데나 미 공군기지는 한반도 공습을 위한 B-29 폭격기의(수년 전만 해도 일본을 불바다로 만들었던) 발진기지로 활용됐다. 1965년부터 1972년까지 오키나와는 북베트남에 대한 괴멸적 공습, 그리고 캄보디아 및 라오스에 대한 비밀 공습의 발진기지였다. 1972년, 27년간의 미군 지배 이후 오키나와의 행정권은 일본에 반환됐다. 그러나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전진 군사기지로서 오키나와의 역할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2개의 일본’ 정책이 초래한 부정적 결과는 다층적이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군사기지가 초래할 가장 부정적 유산은 미군 병사들의 범죄, 소음 공해, 그리고 환경파괴 등이다.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일본 및 미국 정부의 불투명한 행정, 이중성, 그리고 위선 등도 제도화가 됐을 정도로 만연해 있다. 오키나와 땅에 핵무기, 그리고 고엽제와 같은 화학무기들을 비밀리에 저장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가증스러운 것은 자국의 영토 일부를 외국의 거대 군사기지로 내준 동시에 그곳 주민들을 이등 국민으로 취급한 일본 정부의 뻔뻔스러움이다.
(2) 미해결 영토 분쟁
현재 아시아태평양지역 국가 간의 관계를 훼손시키고 있는 5개의 영토분쟁이 바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이유가 무관심이나 부주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와는 반대로 이 5개 영토분쟁의 소지는 미국이 마련한 조약 최종 초안에 의도적으로 삽입된 것이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차단하기 위한 냉전 전략의 일부로 조약 초안에 영토분쟁의 불씨를 살려두었다.
당연히 이 영토분쟁은 강화협상에 참여하지 못한 국가들에서 일어나고 있다. 소련(러시아), 남한, 중국 등이 그러하다. 5개 중 3개의 영토분쟁에 일본이 연관돼 있다. 5개 모두 샌프란시스코 협상 이후 수십 년 동안 매우 논쟁적인 현안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영토분쟁의 일차적 원인은 국가적 자존심과 전략적 고려이다. 그러나 일부 영토분쟁은 최근 분쟁지역에서 해저 석유와 천연가스 등이 발견되면서 더욱 격화되고 있다.
가) 러일 영토분쟁(쿠릴열도/북방영토)
러시아와 일본은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북쪽에 있는 4개의 섬을 두고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다. 러시아는 이를 ‘남방 쿠릴열도’, 일본은 ‘북방영토’라고 부른다. 쟁점은 이 4개의 섬을 쿠릴의 일부로 볼 것인가, 아니면 홋카이도의 일부로 볼 것인가이다. 문제가 꼬인 것은 2차 대전 동안 미국의 동맹국이었던 소련이 전쟁이 끝난 후 1945~1947년 사이에 갑자기 적대국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1945년 2월 소련 얄타에서 열린 미·영·소 정상의 3자 비밀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은 일본의 항복 이후 쿠릴 열도를 소련에 양도하는 데 합의했다. 일본과의 전쟁에 소련을 끌어들이기 위한 미·영 앵글로색슨 국가의 미끼였다. 전쟁이 끝난 후 소련은 문제의 4개 섬을 포함해 쿠릴 열도를 장악했다. 그런데 냉전이 시작되고 샌프란시스코 협상이 시작될 즈음 미국은 입장을 바꾸었다. 문제의 4개 섬은 원래 일본 영토인데 소련이 군사력으로 점령했다는 것이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따르면 일본은 “쿠릴 열도에 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고 돼있다. 그러나 쿠릴 열도가 소련에 속하는지, 그리고 문제의 섬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명기하지 않았다.
이처럼 (미국이) 냉전 전략에 따라 영토분쟁을 조장하고 오키나와를 분리해내 ‘2개의 일본’ 정책을 유지한 결과는 5년 후 일·소 평화조약 교섭 과정에서 극적인 형태로 드러났다. (영토분쟁을 빌미로 일·소 평화협상을 파탄 낸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확정되기 직전, 미국과 일본의 정책결정자들은 쿠릴열도의 남쪽 두 개 섬(시코탄, 하보마이)은 일본 영토로, 나머지 두 개 섬(에토로후, 쿠나시리)은 소련 영토로 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1956년 일·소 평화조약 교섭 당시에도 소련은 양국 간 영토분쟁의 해결방안으로 ‘두 개의 섬 반환’ 해법을 제시했고, 시게미츠 마모루(重光葵) 당시 일본 외교장관도 이 방안을 지지했다. 그러나 영토문제의 해결은 미국의 개입으로 좌절됐다. 덜레스 당시 미 국무장관은 시게미츠 장관에게 만일 일본이 쿠릴 열도의 일부라도 소련에 양보한다면 미국은 “이와 마찬가지로 류큐(오키나와)에 대한 전면적 주권을 주장할 것”이라고 협박한 것이다. 결국 1956년 협상으로 일·소 간 국교는 회복됐지만, 평화조약은 맺지 못했다.
나) 한일 영토분쟁(독도/다케시마)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위한 미국의 초기 초안에는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고 명기돼 있었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화된 직후인 1949년 12월 미국은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입장을 바꿨다. (6.25전쟁 직후인) 1950년 8월경 미국의 초안에는 독도에 대한 언급 자체가 모두 사라졌다. 최종적으로 조약은 한국의 독립을 애매하게 언급했으며, 일본의 영토 범위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다. 조약이 체결되기 한 달 전인 1951년 8월, 미국은 한국정부에 대해 독도를 일본 영토로 간주한다고 통보했다.
조약이 발효되기 3개월 전인 1952년 1월 18일,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의 해상경계선(평화선)을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이승만은 한국의 수산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평화선을 선포한다면서 독도를 평화선 안에 포함시켰다. 1952년 5월 23일(샌프란시스코 조약 발효, 그리고 이에 따른 일본 주권 회복 약 한 달 후), 일본 외교부는 의회에 대해 독도를 주일 미군의 사격연습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통보했다.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을 기정사실화 하려는 술책이었다. 오키나와의 B-29 미군 폭격기는 1948년부터 독도를 사격연습장으로 써왔다. 하지만 한국은 해안경비대 등을 동원해 미군기의 평화선 내 진입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1965년 한일 기본조약으로 양국은 국교를 정상화했지만 독도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수산업협정을 통해 평화선을 제거했을 뿐이다.
다) 중일 영토분쟁(댜오위다오/센카쿠)
센카쿠 열도(尖角列島, 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는 동중국해상 오키나와와 대만 사이에 위치한 몇 개의 작은 무인도들이다. 센카쿠를 둘러싼 중·일 간의 영토 분쟁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낳은 ‘2개의 일본’의 결과이자 19세기 말에 비롯된 ‘역사문제’의 유산이기도 하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일본이 처음으로 센카쿠에 대한 영유권을 공식 주장했기 때문이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청으로부터 대만을 할양받았다. 그러나 센카쿠는 전쟁의 전리품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무주선점(無主先占)의 원칙, 즉 발견 당시 주인이 없었으므로 먼저 발견한 일본이 소유권을 갖게 된다는 주장이었다. 이후 센카쿠는 오키나와 현의 일부로 편입됐고, 2차 대전 이후에는 미국의 관할 아래 들어갔다. 미국은 센카쿠를 때때로 폭격연습장으로 활용했다. 1972년 미국이 오키나와 행정권을 일본에 반환하면서 센카쿠도 여기에 포함됐다. 당시 중국과 대만은 미국의 센카쿠 일본 반환에 대해 항의했다.
2012년 12월 말 베이징에서 발견된 중국어 문서를 검토해 보면, 만일 중국이 샌프란시스코 평화 협상에 참여했다면 센카쿠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도 있었음을 시사한다. 1950년 5월 15일에-6.25전쟁 직전, 여전히 중국이 샌프란시스코 강화 협상에 참여할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었을 때-작성된 10쪽의 이 문서에는 센카쿠가 중국어가 아닌 일본어로 표기돼 있으며 영유권에 대해서도 애매한 입장을 보였다. 문서 중 한 부분에는 센카쿠가 류큐의 일부라는 분명한 표현이 있는가 하면, 다른 부분에서는 센카쿠가 류큐보다는 대만 쪽에 가까이 있으므로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었던 것이다.
이론적으로만 본다면, 일본과의 평화조약이 발효된 1952년 4월에는 1895년부터 2차 대전 종식 때까지 일본이 획득한 모든 영토는 당초 영유권을 가진 국가들에 반환됐어야 했다. 위에 말한 1950년 중국어 문서에 따르면 문제의 핵심은 센카쿠가 류큐의 일부인지, 아니면 대만의 일부인지였다. 1970년대 중국과 일본이 국교를 회복할 당시 양측은 이 문제가 당장 해결하기에는 너무도 복잡하므로 일단 접어두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했다. 1972년 저우언라이(周恩來) 당시 중국 총리는 일본의 한 정치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댜오위다오를 언급할 필요가 없다. 양국 간의 국교를 정상화하는 것에 비하면 이것은 문제라고도 할 수 없다.”
1978년 양국이 평화조약을 맺을 때, 두 나라는 센카쿠 문제 해결은 뒤로 미루기로 구두로 합의했다. 중국 측 기록에 따른 당시 중국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은 일본 외교장관에게 댜오위다오 및 대륙붕 문제는 “잠시 제쳐두고 후에 차분히 논의해 양측이 합의할 수 있는 해결책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 세대에 해결하지 못한다면 다음 세대가 해결책을 찾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1978년 10월, 중국지도자로는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한 덩샤오핑은 도쿄의 성대한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의 질문에 대해 같은 취지의 대답을 했다. 2012년 센카쿠를 둘러싼 양측의 군사적 대응을 보면 이러한 낙관이 잘못이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라) 중·대만 영토갈등
5개의 영토분쟁 중 가장 심각한 것으로 샌프란시스코 조약 이전에 시작됐으나 분리된 평화, 즉 대만을 중국으로부터 분리한 결과이기도 하다. 6.25전쟁이 발발한 지 이틀 후인 1950년 6월 27일, 미국은 중국의 대만 침략을 막겠다며 제7함대를 대만해협에 급파했다. 아시아 국가들 간의 주권 문제에 냉전 논리가 끼어든 극적인 사례이다. 이후 미국이 일본에 강요한 1952년 4월 28일의 일·대만 평화조약은 미국의 대만 사태 개입을 강화하는 빌미가 됐다. 중국의 입장에서 이는 중국 영토의 분단을 영구화하는 조치였다. 중국은 1895년 청일전쟁 패전 후 대만을 일본에 빼앗겼고, 이제는 미국과 일본이 힘을 합쳐 중국의 대만 수복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일본은 1972년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회복하면서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베이징 정부를 유일 합법 정부로 인정했지만, 샌프란시스코 체제에 따른 미·일 군사협력의 기본틀은 바뀌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미 국방부는 중국과 대만 간의 군사 갈등이 일어날 경우 무력 개입할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반면 중국은 중·대만 군사갈등에 대한 미국의 군사개입을 저지하기 위해 군 현대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마) 중국과 동남아 국가 간의 영토분쟁(스프라틀리 군도와 파라셀 군도)
마지막 영토분쟁은 남중국해의 전략 지역에 드문드문 위치한 스프라틀리 및 파라셀 군도를 둘러싼 것으로, 특히 1960년대 이 해역에서 해저 석유 및 가스자원이 발견되면서 분쟁이 첨예화되고 있다. 1940년대 후반 중국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 정부는 차례로 이 섬들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으며 이에 대해 필리핀, 베트남,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등은 반발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 당시 베트남을 식민 지배하고 있었던 프랑스의 요구에 따라 “일본은 스프라틀리 및 파라셀 군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는 조항이 들어갔다. 중국의 영유권 주장은 의도적으로 배제됐으며 이 섬들이 어느 나라 소유인지도 특정하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협상에 따른 영토분쟁의 역사에 관한 최고 권위자는 이러한 (조약상의) 불확실성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쐐기’라고 지적했다. 미래의 분쟁을 야기할 독소조항들을 심어 넣음으로써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봉쇄”에 활용했다는 것이다.
(번역 : 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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