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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김' 브랜드가 '샤넬'이 못 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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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앙드레 김' 브랜드가 '샤넬'이 못 되는 이유

[전순옥·권은정의 D-프로젝트] 마이스터 패턴사 장효웅

지하철 동대문역에서 바로 올라서면 7층의 작고 오래된 건물이 있다. 그 빌딩 몇 층을 한국봉제아카데미가 쓰고 있다. 미싱 여러 대가 놓인 재봉 실습실 옆 회의실 작은 방은 아주 조용했지만, 이내 패턴사 장효웅 씨의 목소리로 꽉 찼다. 그가 대뜸 언성을 높여 대화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렇게 해서 우리 기술자들을 어떻게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올해 예순을 막 넘긴 장 씨는 40년 넘게 패턴사로 일해 왔다. 그의 표현대로 패턴에 관한 한 그는 '고개를 아주 숙일 대로 숙인 벼'다. 그의 솜씨는 실로 '천의무봉(天衣無縫, 천사의 옷은 꿰맨 흔적이 없다는 뜻으로, 일부러 꾸민 데 없이 자연스럽고 아름답다는 말)'의 경지가 아닐까 싶다. 그런 그가 최근 현직에서 물러났다. 다니던 회사에서 그에게 '정년'이라며 나가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마음이 몹시 쓰린 표정이다. 자신의 기술이 나이를 넘어설 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자동차 기업은 노조가 있어서 공장을 해외 이전하면 난리 나는데, 부가가치가 더 높은 산업인 의류산업에는 노조가 없습니다. 그러니 최고 기술자로 인정받으며 일하던 사람에게 어느 날 정년이라며 나가라고 하면, 한마디도 못하고 나올 수밖에요. 어제까지 같이 일하던 동료들이 더 안타까워해요. 우리 일에는 정년, 그런 개념이 없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나가라고 하니 참 기가 막히죠. 먹고사는 게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은 아니에요. 우리처럼 기술 가진 사람들은 뭘 하든 먹고살 수는 있지요. 하지만 경우를 따져볼 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이미 시작한 말이라,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 모양이다. 내친김에 달리듯 말을 쏟아낸다.

"지금 우리 의류제조 기술자들은 일할 데가 없습니다. 그동안 의류회사들은 싼 공임을 찾아 다들 외국으로 나가버렸지요. 그래도 주로 대량 생산하는 쪽이 외국으로 갔는데, 이제는 소량생산도 나가고 그것도 모자라서 샘플 작업도 외국에서 합니다. 어떤 TV 방송에서 잘 나가는 의류업체를 소개하며, 국내 생산이 어려울 때 해외로 나가 성공했다고 난리를 피우더군요. 국내 생산을 안 하고 외국 노동자들에게 제조를 맡기는 것을 보면서 '저걸 과연 한국 회사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저는 들더군요."

국내 생산을 포기하면 국내 노동자를 포기하는 것이고, 국내 제조업을 죽이는 일이라는 말이다.

"국내 임가공료가 다소 비싸다고 국내에서 안 만들기 시작하면, 결국 우리나라 기술자들은 다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샘플작업까지 밖에서 한다면, 나중에 어떻게 되겠어요?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쪽 사람들이 기술을 다 가져가면, 해외 바이어들이 한국까지 찾아와 주문을 넣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샘플은 의류 제조에서 가장 완벽한 기술을 요하는, 옷 제조 공정의 마지막 단계다. 대량생산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완성본을 만들어 보는 것이니, 최고 기술자들의 솜씨가 요구된다.
"돈 몇 푼 아끼자고 샘플 공장까지 해외로 옮기는 건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거 정말 바보 같은 일 아닌가요? 나 같이 무식한 공돌이도 이런 생각을 하는데, 높은 분들이 그걸 모른다고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기업에서 매출이 얼마 이상 오르면, 국내 생산시스템을 유지하도록 법으로 못 박아 놓자는 것이지요. 그렇게 법을 만들어 놓으면 국내 생산이 가능할 것이고 최소한 우리 기술자들이 살아남을 것 아닙니까!"
▲ '패턴의 대가' 장효웅 씨. Ⓒ프레시안(최형락)


장효웅 패턴사는 누가 봐도 바른말 하는 사람인 게 분명했다. 마음에 담고 있는 말은 내뱉어야 직성이 풀린다. 살아오면서 답답한 일이 하도 많아서였을까. 단순히 그 이유만은 아닌 듯하다. 그는 스스로 큰소리를 칠만큼 실력이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자타 공인의 '마이스터(meister)'다.

그는 양장업계에 들어서면서부터 국내 최고급 부티크(boutique)에서 주로 일하며 실력을 다진 사람이다. '앙드레 김'에서 시작해 2년을 머물렀다. 이후, 박윤정 디자이너의 브랜드 '미스박 테일러'에서 9년 동안 일하는 등 국내 최고 명품 부티크를 거의 섭렵했다. 영부인 옷을 비롯해서 최고급 고객의 옷 대부분을 직접 만들어 봤다. 그는 또 대기업 의류 회사에서 높은 연봉을 받으며 근무했던 일류 패턴 전문가이다. 대한민국 최고급 옷은 다 그의 손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게다.

그런 그가 아카데미에서 일하게 된 계기 역시 몇 년 전 당시 아카데미 대표였던 전순옥 의원의 권유 때문이었다. 전 의원은 동대문 의류제조 분야의 불을 지피기 위해 뜻있고 실력 있는 전문가들을 봉제 아카데미 강사진으로 모시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아카데미의 교육생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실력자인 그에게 자격증을 따지는 일이 있을 만큼 행정의 벽은 높고도 답답했다. 실질적인 내용보다 형식논리를 앞세우는 관청의 행정 처리 때문이었다.
"저만 해도 여기서 강의한 지가 8년입니다. 서울시나 다른 부서 공무원들이 묻는다고 하더군요. '거기 강사들, 자격증 있느냐'고요. 우리가 왜 자격증이 필요합니까. 우리가 자격증을 주는 사람이 되어도 시원찮을 판에. 서울시·지식경제부·고용노동부 이런 기관들은 이쪽 현장 일을 잘 모르니, 그저 형식적 자격증을 먼저 챙기는 거죠."

그는 '국가기관에서 기술자를 제대로 대우할 마음이 없다'는 증거 아니냐며 안타깝다고 한다. 왜 기술자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입장이다.
"미싱사나 패턴사, 이런 기술자를 대학 졸업자니 박사 학위 소지자하고 비교하면 안 되잖아요? 연봉 책정을 그렇게 한다니까요.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기술자는 박사보다 연봉을 더 높여 주려고 하지 않아요. 고정관념이죠. 감히 중학교밖에 안 나온 기술자 주제에, 어떻게 박사보다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느냐는 겁니다. 기술 가진 이들을 인정하려는 자세 자체가 없습니다. 자기네보다 아랫사람으로 취급하려하는 거죠. 기술을 존중하기는커녕, 무시해 버리는 겁니다."

그는 처음에 아카데미에서 '손 패턴'을 강의할 때 시간당 10만 원을 받았단다. 그런데 강사비가 너무 높다고 난리가 나더니, 다음 번 강의 때부터는 절반으로 깎더란다.

기분이 나빴지만 강의는 계속했단다. 왜 그만두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똑바로 응시하며 대답한다.

"당연히 계속해야죠. 왜냐하면 기술을 전수해야 하니까요!"

Ⓒ프레시안(최형락)
장 패턴사는 그동안 낮에는 직장을 다니고, 밤에는 아카데미에 나와 강의를 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났지만, 강사로 나온 기술자에 대한 처우는 달라진 게 없다. 조금 위로가 되는 점이 있다면, 아카데미를 홍보하는 일이나 봉제 산업에 대한 중요성을 깨우치려는 분야의 일이 규모가 다소 커진 것이라고나 할까.

장 패턴사는 우리나라 패션, 섬유산업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그 부침이 어떤지 알기 쉽게 설명한다.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의상실이 들어선 게 60여 년 전이란다.
"우리나라 양장 패션이 노라노 선생님부터 시작됐는데요. 보세요, 노라노 선생님은 아직 살아 있는데 그분의 옷은 어떻게 되었나요? 없어졌죠? 그럼 세계적인 브랜드를 보면, 샤넬은 어떻습니까? 디자이너 샤넬은 죽었는데, 샤넬 옷은 살아 있잖아요. 우리는 반대로 디자이너는 아직 살아 있는데, 옷은 이름 없이 사라졌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정말 궁금해졌다. 샤넬은 죽었는데, 어째서 샤넬 옷은 전 세계 여성의 로망이 될 수 있었는지. 우리 디자이너들의 옷은 왜 그렇게 빨리 사라져 버린 것인지.

"기술자 양성을 안 해서 그래요. 기술자를 무시했으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샤넬이 죽었어도 거기 있는 기술자들은 우대를 받고 있으니 주인이 죽었어도 그대로 남아서 그 브랜드를 갖고 일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디자이너가 와서 다른 그림을 그려도, 라인 선은 바뀔망정 샤넬의 기본 틀은 변함이 없는 거지요. 전에 있던 그 미싱사가 미싱을 하고 그 패턴사가 패턴을 뜨니, 샤넬은 영원히 가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자부심을 갖고 대를 이어 기술을 전수하니 그 기술이 100년이 가도 살아남는 것이지요. 영원히 살아 있는 것입니다. 앙드레 김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그분 옷이 지금 어디 갔습니까? 옛날에 사라졌지요. 이게 우리나라 패션의 현실인 거예요!"
옷 만드는 기술은 정말 손기술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혹 디자이너의 브랜드가 그대로 있어도 기술자가 달라지면 옷은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기술자를 우대하지 않고 홀대하면 옷은 그 품질을 보증할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나라는 그전에는 패션을 개인 사업으로 치부해서 산업진흥의 일환으로 패션을 육성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정책적으로 섬유산업·패션산업을 살려야 한다면서 지원책을 펴기 시작했지만, 그나마 디자이너만 혜택을 받기 일쑤다. 기술자는 이래저래 천덕꾸러기 신세다.

"기술자 지원, 하나도 안합니다. 신진 디자이너를 발굴해 살려야 한다는 말만 하지요. 당장 디자이너들이 매장을 내고 일을 해야 우리 기술자에게도 일거리가 생긴다는 건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신진 디자이너들이 패턴사나 미싱사들에게 충분히 공임(인건비)을 주면서 일을 시킬 형편이 못 됩니다. 우선적으로 지출해야 하는 게 많으니, 돈이 없어 좋은 봉제 기술자에게는 일감이 안 갑니다. 결국 싸구려 봉제에, 싸구려 패턴으로 가는 거지요. 그러면 옷이 제대로 나올 수가 없어요. 디자이너에게만 지원할게 아니라, 봉제하는 기술 인력에게도 직접 지원하는 제도가 생겨야 합니다."

장 패턴사는 최근 회사에서 물러났으니, 새롭게 일을 구상해 봤다고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발전적으로 쓸 것인가. 의류제조업에 도움이 되도록 하려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봉제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새롭게 시작해보고 싶다고 했다. 구체적인 방법은 바로 이것이다.

"디자이너에게 싼 공임으로 패턴을 떠주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적정한 가격으로 훨씬 더 좋은 패턴을 떠 주겠다는 말입니다. 같이 일해 보자는 것이죠. '여기가 젊은 여러분의 무대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 노력해서 더 좋은 옷을 만들어 보자!'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패턴 사무실을 만들어 남들보다 저렴한 실비로, 젊은 디자이너 두뇌들에게 더 좋은 패턴을 떠주겠다는 것이다. 아카데미에 오면 연봉 1억 원 패턴사가 패턴을 직접 떠 준다!
조그만 업체 디자이너들은 꿈도 못 꿀만 한 환상적인 일이다. 큰 브랜드 보다 작은 브랜드하고 일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얼마 전, 패턴을 떠 준 업체에서 앞으로 같이 일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며 그는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인다.

"패턴이란 옷의 본(本)입니다. 좋은 패턴을 보여주면서 '옷은 이렇게 만들어야 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죠! 브랜드마다 자기만의 라인을 살릴 수 있게 도와주고 싶어요. 남의 디자인 카피할 생각하지 말고, 각자가 분명한 선을 가질 수 있도록 패턴을 만들어 주겠다는 겁니다. 앞으로 제가 그런 일을 할 겁니다."

Ⓒ프레시안(최형락)

그가 굳은 표정을 풀면서 말을 잇는다.

"이제 안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주변에 대고 하도 떠들어서요! 매일 스스로를 타이릅니다. 과거 연봉에 연연해 하지 말고, 조금 덜 벌어도 만족하며 살게 해 달라고요. 친구들한테 말합니다. 내가 혹시라도 돈 욕심을 내면 한 대 때려 달라고 말이죠. 하하하…."

'과거 얼마나 잘 나가던 패턴사였는지' '억 대 연봉을 받았었는데, 지금이라도 어디 가서 취직할 수도 있는데'와 같은 사실은 다 잊어버리겠다는 말이다. 그는 이제 한 알의 밀알이 되고 싶은 마음이다.

"앞으로 마음먹은 대로 이뤄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저 같은 사람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그러자면, 기술자 수입이 어느 정도 보장되어야 하는데, 정부에서 지원이 안 되면 기업체들이 후원해서라도 기부금 형식으로 하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 아닐까요? 업체에서 기능인을 우대하지 못 하겠다면, 이런 식으로 우리 스스로 하겠다는 거죠. 우리나라 기술자를 붙들어 하나로 묶어야 합니다. 기술자가 멸종되지 않게 말입니다."

그는 한국봉제아카데미가 실력 있는 봉제 기술자를 키우고 지키는 역할의 구심점이 되기를 고대한다.

"지금 강의하는 분, 모두 현장에서 오랫동안 일한 최고의 전문가들입니다. 교육생들이 '여기는 뭔가 다르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우리 아카데미가 궁극적으로 대학의 위탁교육 같은 것, 그렇게 된다면 참 좋겠어요. 우리나라도 의상학과에서 실무진이 교육하는 그런 여건이 마련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학생들, 디자이너들을 키울 수 있게 말이지요."

그동안 그는 아카데미에서 강의하면서 ‘학생교육용 패턴제도 및 봉제법’에 관한 교재를 만들었다. <스커트&바지 패턴>(안현숙·배주형·장효웅 공저. 일진사 펴냄), <재킷패턴>(안현숙·배주형·장효웅 공저. 일진사 펴냄), <패턴 메이킹>(배주형·장효웅 공저. 일진사 펴냄) 등 교수들과 공동 작업으로 출간한 책도 다수 있다.

장 패턴사는 패턴 일을 평생 해 온 사람 중에서 자신은 '행운아'라고 말한다. 또 스스로를 '독종'이라고도 한다. 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자식도 잘 키웠고, 집도 장만해 살고 있으니 그렇다는 말이다. 게다가 같은 뜻으로 평생 함께하고 있는 아내가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니 더 바랄게 없다

"이 일 하면서 신분 상승은 어렵지요. 원래 가난한 집 아이들이 기술을 배우잖아요. 있는 집 자식들과 비교할 수 없지요. 그래서 그런지 평생 일해도 쪽방에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부모님 모시고 살며 아르바이트를 동시에 4개 이상 해봤습니다. 단칸방에서 온 식구가 한데 살면서 시작했지요. 밤늦게 촛불 켜고 책을 보다 불을 낸 적도 있고요."

패턴 쪽에서는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실력가인 그는 자신이 처음부터 '잘 풀린 사람'인 것 같다고 목소리를 약간 낮춰 말한다.

"사실 저는 누구보다 높은 연봉을 받으면서 일했지요. 그런데 패턴사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패턴사'라는 이름을 달면 일단 수입을 보장받는데, 실력에 따라서 다릅니다. 전체 의류봉제업 종사자 중 패턴사는 10분의 1 정도 될 겁니다. 열심히 해서 '패턴사' 명찰을 달아도 높은 연봉을 받을 실력이 되려면 굉장히 힘들지요."

그는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를 보면서 40년 넘게 한 분야를 갈고 닦아온 실력이면 이 정도 자부심은 가질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일은 그저 보고 배운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일단 현장에서 허드렛일을 다 해야 하거든요. 옷 제작의 전 과정을 알아야 패턴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양장점 시절 선생님 밑에서 천을 잘라 손 가봉하는 것부터 배웠습니다. 그 기간이 빨라야 5~10년, 그 정도는 지나야 패턴사가 될 수 있습니다. 처음 3년 정도 하다가 더 이상 못 견디고 탈락하는 이도 많습니다."

패턴사로서 그의 자부심을 잘 드러내는 증거가 있다. 바로 아들에게 '패턴 기술의 대'를 물려 준 것이다. 그의 아들은 이제 13년 차에 들어선 패턴사이다.

"아들이 패턴사가 된 게 저는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아들이 중학교 다닐 때부터 그랬지요, '너, 공부하기 싫으면 하지 마. 그 대신 건강해라.' 그랬더니 참 고맙게도 건강하게 잘 커줬어요. 아들이 군대 제대하자마자, 그날로 데리고 다니며 패턴을 가르쳤죠. 아주 잘 배웠어요. 한 1년 그렇게 했더니, 그다음부터는 혼자 배우더라고요."

그가 아들에게 패턴 일을 가르친 것은 무엇보다 이 직업에 대한 확실한 비전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저는 지금도 이 일이 너무 재밌어요.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사람이 움직여야 작동이 되는 부분이 있거든요. 그동안 기술이 좋아져서 지금은 컴퓨터로 패턴 작업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사람 손이 가야 하거든요. 새로운 기술을 익히려면 우리도 계속 공부하고 노력해야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미싱 분야도 그렇고요. 요즘은 기계가 다양하고 좋은 것이 많이 나오니,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하지만 사람 손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아들이 현장에 나가서 일하다가 의류제조업계에서 아버지의 명성이 자자하다는 사실을 알면서 패턴 일에 더욱 열성을 보인다며 자랑한다.

"사람들이 아들에게 '아버지, 인사 좀 시켜달라'고 청을 넣는 것을 보면서, 아들이 아버지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더라고요. 슬럼프에 빠진 적도 있었지만, 잘 극복하고 잘 따라왔습니다. 진짜 자랑스럽지요."

아들은 지금 의류 무역회사에 들어가 패턴사로 일한다. 일하다가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물어오는데 이제는 말로만 해도 알아듣는 수준이 되었단다.

"아들이 실력을 갖춘 정식 패턴사가 되는 데 12년 걸렸습니다. 제가 제 아들을 직접 가르치는데, 그렇게 오래 걸렸어요. 그런데 요즘 대학에서 한 2년 가르쳐 패턴사를 만든다고요? 말도 안 되지요!"

Ⓒ프레시안(최형락)

그는 옷을 만드는 일은 언제나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오랫동안 일하다 보면, 어느 부분에 어떤 선이 나와야 하는지 직관적으로 알게 되지만 매번 새롭게 바라본단다.

"여자 옷은 너무 복잡해요. 그때그때 패턴을 바꿔야 합니다. 선을 내는 방법을 달리해야 해요. 물론 오래 일하다 보면 노하우가 생기지만, 쉽지 않습니다."

좋은 옷이란, 몸의 선을 흐르는 대로 잘 표현해주는 옷이라고 한다. 그렇게 만들려면, 패턴도 좋아야 하지만 봉제도 좋아야 한다고 그는 극구 강조한다.

"싸구려 옷은 옷 따로 몸 따로 놀죠. 그저 마구 박아버리니까요. 봉제가 중요해요. 그런 의미에서 요즘 뜨는 스파(SPA, 패스트패션) 브랜드 옷은 얼마 못 갈 겁니다. 우리가 보기에 완전히 싸구려 봉제거든요. 사람들은 자기 몸에 맞는 옷, 자기 몸을 잘 나타내주는 옷을 찾게 되어 있거든요."

옷에 관한 한 누구보다도 열정가인 장 패턴사는 우리나라 패션산업의 방향을 아주 간단하게 짚어준다.

"기술자를 제대로 우대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당연히 세계적인 명품 옷, 디자이너 브랜드가 있어야 합니다. 디자이너 브랜드가 살아남아야 외국인들이 옷을 사러 올 것 아닙니까. 한국 옷을 사 입고 싶게 만들어야 하지요. 그런데 그런 디자이너가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술이 같이 가줘야 하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불가능해요. 지금은 기술자를 우대하지 않아서 세계적인 브랜드가 안 나오는 것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기술에 대한 투자도 없이 그냥 카피(copy, 따라 만들기)하는 데만 바쁘지요. 기술자를 천대하면서 무슨 세계 수준을 이야기 합니까!"

평생 옷의 기본을 만들어온 패턴사 장효웅. 천사의 날개옷 같은 부드러운 천만 만지며 일한 그에게 쇠를 벼리는 대장장이와 같은 강인한 힘, 기본기의 저력이 느껴졌다.

▲ 권은정 인터뷰이(왼쪽)과 장효웅 씨(오른쪽).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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