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일 정상회담 가능성이 수면 위로 급부상하고 있다. 1차적인 계기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 일본 총리가 14일 무라야마 및 고노 담화를 계승할 뜻을 밝히고, 미국 국무부가 “긍정적인 진전”이라고 평가하면서 만들어졌다. 그러자 아베 정권의 역사 인식을 강하게 비판해온 박근혜 대통령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화답했다.
또한 청와대는 일본에 진정성을 요구하면서도 “대화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불과 얼마 전까지 한일, 혹은 한미일 정상회담에 대해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밝혔던 것과는 확연히 달라진 태도이다. 그 전후 맥락을 차분히 짚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일단 아베 총리의 발언을 폄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가 지금까지 보여온 언행이나 “고노 담화를 계승하겠지만 검증은 계속하겠다”는 모순적인 태도를 고려할 때, 여전히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긍정적 발언을 긍정적으로 평가해 지속적인 태도 변화를 견인하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아베와의 회담을 계속 기피하는 것도 능사는 아닐 것이다.
문제는 ‘무엇을 위한 한일관계 개선과 한미일 정상회담이냐’는 것이다. 미국은 가깝게는 3월 24∼25일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핵안보 정상회의, 멀게는 4월 하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한일 순방을 앞두고 한일관계 개선에 총력을 기울여왔다. 아시아로의 귀환, 혹은 재균형을 선포한 오바마로서는 한일관계 개선을 통한 한-미-일 삼각동맹 구축을 최대 당면 과제로 삼아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최근 분위기는 미국이 일본을 떠밀고 한국에 말려들어가는 형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관련해 3월 4일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자리에 출석한 다니엘 러셀(Daniel Russel)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는 한미동맹과 미·일 동맹, 그리고 한-미-일 3자 협력 강화가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전략의 핵심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면서 “오바마 대통령의 한일 순방을 계기로 우리의 노력이 강화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특히 “분명한 사실은 한-미-일 3자 간의 전략적 협력이 동북아에서 안보 질서를 발전시키는데 본질적인 사안에 해당된다”며, “누구도 역사 문제의 부담으로 인해 우리가 안전한 미래를 건설하는 것을 가로막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일본에는 역사 문제로 한국을 자극하지 말고, 한국은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말라는 메시지인 셈이다.
러셀과 함께 상원 청문회에 나선 데이비드 헬비(David F. Helvey) 국방부 동아시아 부차관보 역시 3자 동맹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3자 안보협력은 북한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억제의 핵심적인 요소”라며, “우리는 지속적으로 세 나라가 군사훈련에 참가하고 한일 양국 정부 사이에 협력과 대화와 투명성을 제고하는 틀로써 3자국방회담(DTT)에 높은 가치를 부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참고로 3자 국방회담은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에 창설된 것으로 비밀리에 유지되었다가 위키리크스가 미국 외교 전문을 폭로하면서 그 실체가 드러난 한-미-일의 대화틀이다.
이처럼 미국 정부가 북한의 위협을 이유로 한-미-일 안보협력을 필요성을 강하게 제기하자, 한국 군 당국이 호응하고 나섰다. 최윤희 합참의장이 워싱턴 방문 중이었던 3월 11일 “북한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는 “한-미-일 3국 안보협력” 및 “일본과 안보협력을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MD 수위 높이는 미국, 호응하는 한국
미국이 한미동맹 및 한-미-일 삼각동맹의 핵심축으로 미사일방어체제(MD)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러셀은 4일 청문회에서 “현재의 정책(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지 않고 있는 상황)으로는 북한이 미국을 향해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더라도, 일본은 MD용 요격미사일을 사용해 북한의 미사일을 파괴할 수 없다”고 했다. MD를 위해서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러셀은 2013년 미·일 동맹의 가장 긍정적인 변화 가운데 하나로 일본 정부가 평화헌법 해석을 바꿔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그러면서 올해 내로 집단적 자위권을 명시하는 등 미·일 신(新)가이드라인 개정을 마무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헬비 역시 작년 10월 한미 국방장관회담에서 합의한 ‘맞춤형 억제전략’의 최우선 순위는 MD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미사일 위협을 탐지·방어·분쇄·파괴할 수 있는 ‘동맹의 포괄적인 미사일 대응 능력(comprehensive Alliance counter-missile capabilities)’을 발전시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높은 우선순위”라며, 이를 위해서는 “지휘통제통신컴퓨터(C4)뿐만 아니라 정보감시정찰(IRS)과 MD의 상호운용성도 높여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미국이 이러한 입장을 밝힌 직후, 한국 국방부는 내년부터 신형 패트리엇 미사일(PAC-3) 도입 방침을 밝혔다. 방위사업청이 12일 김관진 국방부 장관 주재로 열린 방위사업추진위원회(방추위)에서 이러한 내용을 의결한 것이다. PAC-3 도입은 한미 MD 협력 강화를 위해 미국이 지속적으로 요구해온 대표적인 사업이다.
무엇을 목표로 삼을 것인가?
정리하자면, 미국은 한일관계 개선을 적극 중재해 한-미-일 삼각동맹 구축에 재시동을 걸려고 한다. 북한의 위협은 가장 큰 명분이고 집단적 자위권 및 MD는 그 핵심 고리에 해당된다. 안타깝게도 박근혜 정부도 여기에 빨려 들어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이러한 움직임이 자해적인 결과를 잉태하고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대북정책과 관련해 외교적 해법이 아니라 군사적 대응에 방점이 찍힌 한-미-일 공조체계는 북핵 문제 해결을 더더욱 어렵게 한다는 점은 지난 역사를 통해 충분히 입증되었다. 중국도 직간접적으로 한-미-일 삼각동맹 구축 움직임에 강한 경계심을 표출해왔다. 한-미-일이 군사적으로 손을 잡을 경우 중-러, 혹은 북-중-러 삼국 간 대응 동맹을 야기할 위험이 크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반도와 동북아의 지정학적 맥락을 고려할 때, 북핵이 악화되고, 중국과의 전략적 갈등이 커지며, 한-미-일 대(對) 북-중-러의 대결이 격화될 경우 통일은 그만큼 멀어지게 된다. 통일을 시대의 화두로 내세우면서 대통령이 직접 ‘통일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로 한 박근혜 정부로서는 심사숙고해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따라 박근혜 대통령은 미국 및 일본과의 정상회담 목표를 재설정해야 한다. 자칫 동북아에서 신냉전을 야기할 수 있는 삼각 군사동맹보다는 냉전의 잔재를 청산하고 6자회담의 합의 사항이기도 한 동북아 평화안보체제를 실현할 수 있는 3자 외교 공조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 남북관계 개선을 적극 추진하는 한편, 북미, 북일 대화도 권고하고 6자회담 재개도 시동을 걸어야 한다. 어렵더라도 이러한 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갈 때, 박근혜 대통령이 천명한 ‘통일대박론’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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