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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 극복하고 풍요롭게? 당신들이 한번 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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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해고 극복하고 풍요롭게? 당신들이 한번 해보라"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대학 학장

오랫동안 지치지 않고 한 분야에 힘쓰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어떤 이는 막연히 그런 모습을 상상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처음의 열정이 줄어들지 않을까 조마조마해하기도 한다. 선택이 쉽지 않았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 비해 소홀히 다뤄지는 '노동' 분야에서 40년 가까이 상담 및 교육활동을 해온 사람이 있다. 바로 '하종강'이다.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횡행한 시대가 있었다. 사회주의 블록이 붕괴한 이후, 많은 활동가들이 생업을 찾아 떠났고 시민들의 의식 속에서 '노동' 이슈는 차츰 멀어졌다. IMF와 함께 정리해고, 비정규직 증가 등으로 노동의 질이 악화됐지만, 사회는 이를 자정하는데 무력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현장을 지켜 온 그에게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다.

"어떤 사람은 나보고 '사람이 너무 외골수에 한 면만 보고 살아서 문제'라고 해서 ‘내가 있는 이 분야는 일을 오래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문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노동운동을 열심히 했다가 지금 다른 데로 진출한 사람이 많다. 나는 그들이 나쁘다고 보지 않는다. 내가 이 일을 계속하고 있는 이유는 내가 특별히 노동운동에 대한 신념이 있거나 그 사람들보다 대단해서가 아니라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이다."

다른 사람보다 특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라는 그의 말에서 세월의 힘이 느껴진다. 그는 오랫동안 한울 노동문제연구소 소장을 지냈으며 현재 노동자교육센터 운영위원, 성공회대학교 노동대학 학장을 맡고 있다.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2006),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2007), <길에서 만난 사람들>(2007), <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다>(2008), <울지말고 당당하게>(2010), <나는 무슨 일 하며 살아야 할까>(2011) 등의 저작을 집필했다.

"두 가지 원칙을 지키면 된다. 첫 번째, 돈을 많이 벌지는 않겠다는 것과 두 번째, 유명해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운동권 내에서조차 출세해야 한다는, 반드시 중심에 서겠다는 강박관념을 버린다는 뜻이다. 이 두 가지 원칙만 지키면 세상에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

작년 철도노조 파업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24명이 죽은 쌍용차 사건, 재능교육 장외투쟁에 보듯 노동자들의 현실은 열악하다. 당사자들을 제외한 정부와 언론은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거나 문제를 덮는데 앞장선다. 일반 시민들은 예전보다는 먹고 살만해지지 않았느냐며 노동자들의 투쟁을 집단이기주의로 간주하기도 한다. 언제쯤 그들의 절박한 목소리가 온전히 세상에 울려 퍼질까.

"복직투쟁을 7년째 하고 있는 콜트콜텍 노동자들은 요즘에는 콜트콜텍밴드(콜밴)를 만들어서 연주 활동을 한다. 작년 연말에는 홍대 앞에서 연극공연도 했다. 한 진보적인 철학 교수는 그를 두고 "해고된 노동자들이 잘 극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가진 게 없어도 풍요롭게 살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내용의 칼럼을 썼다. 그러나 당사자인 노동자들은 거의 분노했다. "누가? 우리가?" "행복하냐고 한번 물어보고 쓰든지." "그럼, 우리랑 한번 바꿔 살아보든지." 지금도 그 노동자들은 이미 팔린 공장 부지 건너편 길가 농성천막에서 자고 있다. 설 연휴도 그렇게 보냈다."
노동이 존중받고 삶의 기반이 되는 사회는 아직 오지 않았다. 하종강 그가 하는 일이 현재 진행형인 이유다. 동시에 개인 하종강에게도 그의 일은 스스로를 붙들어주는 끈이다. 놔버리면 자신의 영혼이 흔들리는 그런 끈 말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 분야에 계속 남아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하는 일 속에 고전적 휴머니즘의 충족감을 주는 내용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치거나 병든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인정받도록 하는 일, 해고된 노동자가 다시 복직하도록 하는 일 등이 내가 했던 상담과 교육의 주된 내용이었다. '내가 이 노동자를 붙들고 두어 시간 상담을 하면, 내가 이 자료 뭉치를 붙들고 밤을 새워 서류를 만들면, 저 노동자와 가족들이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고, 실제로 그런 일들이 꽤 많았다. 이런 일들이 나를 오히려 구원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어려운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대학 학장. Ⓒ프레시안(최형락)
- 역사가 돼버린 7,8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졸업 뒤에는 재벌 기업에 취직해 '자본의 하수인'이 되든지 '자본가를 때려 부수는' 망치를 든 노동자가 되든지 하는 두 갈래 길뿐이었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월간 말>지 나의 20대 2001.2) 당시 인간 '하종강'의 선택 기준 혹은 원칙은 무엇이었나.

그때는 지식인으로서 진보적인 삶을 산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지금은 연구소·언론사·신문사·대학병원·증권회사·보험회사들마다 노동조합이 있지만, 그 때는 그런 화이트칼라 노동조합이 우리 사회에 환상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때였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급속하게 지식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이 생긴 것이다. 그 이전까진 대학을 졸업하고 난 뒤 계속 공부를 하지 않으면 기업에 들어가 관리직이 되거나 노동현장으로 들어가 노동운동을 하거나, 이 두 가지 길 밖에 보이지 않았다. 만약 지식 노동자로서 진보적 삶이 충분히 가능했다면 취업해서 노동조합 활동을 열심히 했을 것이다.

'꼭 노동운동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했다기보다는 1000만 명의 노동자 중에 1명이 될지라도 자본가의 하수인으로는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진정성 있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종교적 배경과도 조금 관계가 있다. 나는 이런 활동을 하면서 여전히 교회에 다니는, 우리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사람들 중 하나다. 예수라는 분은 어떤 선택의 기로에서 섰을 때 항상 좀 더 고생스러운 쪽으로, 낮은 쪽으로 향하는 선택을 했다. 결국 기독교인이라면 예수님처럼 좀 더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을 선택하는 것이 올바른 삶이라는 것이 기독청년으로서 내 신앙이기도 했다. 그래서 별 고민 없이 노동운동을 선택했다. 그리고 당시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은 변절하지 않는 한, 노동운동을 하는 것이 정해진 코스였다. 문화운동·여성운동·농촌운동 등 다른 부문의 운동을 할 수 있는 재능이 있다면 그 쪽으로 진출했지만, 그런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학생운동 출신은 90% 이상 노동운동을 선택했다. 내가 대단하거나 특별해서 노동운동을 선택하고 살아온 것은 아니다.

- 지난 30년간 그 때의 기준과 원칙이 어떻게 변주되었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세운 원칙이 지키기 어려운 대단한 원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 방 책상에 '초라하게 살다가 이름 없이 죽자'란 글귀를 써 붙인 적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지금까지 40년 가까이 같은 일을 해온 것을 신기하게 여기지만, 두 가지 원칙을 지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첫 번째, 돈을 많이 벌지는 않겠다는 것과 두 번째, 유명해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운동권 내에서조차 출세해야 한다는, 반드시 중심에 서겠다는 강박관념을 버린다는 뜻이다. 이 두 가지 원칙만 지키면 세상에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나는 처음 의도와 다르게 너무 유명해졌고 높은 지위를 갖게 되고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졌다. 내가 꼭 원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지금 가지고 있는 지위를 상실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별로 없다.

노동운동 내부에서도 다수파와 소수파 간 갈등이 일어나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소수파를 지지한다. 그것이 민주노총이나 진보정당과 등을 돌리는 일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최근 재능교육 사건에서도 그랬다. 유명자 지부장과 강종숙 위원장을 지지했던 중요한 이유도 이들이 소수파였기 때문이다. 당시 재능교육 투쟁이 둘로 나뉘었을 때 민주노총과 연맹과 진보 정당과 진보진영의 유명 인사들은 대부분 혜화동 종탑 투쟁을 지지했다. 시청 앞 환구단 농성장은 유명자, 강종숙, 박경선 단 세 사람만 남아서 외롭게 지키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 소수파인 유명자 지부장을 지지하는 내용의 글을 썼더니, 한 만화가가 "이런 글을 쓰면 세상이 모두 자기 적이 될 것 같은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바랐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지위와 명예를 가지게 된 것이라 잃는 것이 별로 두렵지 않다"고 답했다.

- 그런 원칙과 신념은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 기독교의 영향만으로 보기에는 범위가 넓은 느낌이다.

기독교는 내가 접했던 여러 사상과 철학 중에 하나였다. 내 원칙과 신념은 특정한 것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사회과학 책을 접한 덕에 형성됐다. 중고등학교 6년 동안 나는 상당히 모범적 학생이었다. 해방이 된 이후 40년 넘는 세월동안 한국의 중·고등학교 남학생들은 일본 육군 군복을 여학생들은 해군 군복을 교복을 입었는데, 나는 중·고등학교 6년 동안 등하굣길에 그 답답한 교복 단추를 푼 적이 없다. 세상에 깜박 속아 살아온 시간이었다. 대학에 와서 학점 따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은 여러 책을 읽으면서 내가 그동안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은 중·고등학교에 철학 과목이 없고, 대신 국민윤리가 있는 나라다. 이런 것에 깜짝 놀랐고, 또 분노했다.

Ⓒ프레시안(최형락)
- 1974년 진로를 고민할 때 어머니가 밥상머리에서 “세상을 바르게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지만, 항상 근본이 중요하다고 말해 온 에미로서 네 오빠가 어떤 결정을 하든 나는 아무 말 않겠다"라고 여동생에게 에둘러 말씀하셨다고 했다.(<기억과 전망>인터뷰 2003.5) 간혹 어머니를 언급하는데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나.

어머니 말씀 중에 격언처럼 가슴에 새긴 게 몇 개 있다. 생선 반찬이 밥상에 올라올 때마다 하던 말씀이 있다. "왜 작은 생선에 잔가시가 많은 줄 아냐?"라고 묻고는 "자기보다 큰 고기가 먹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면서 가시가 많으면 먹다가 목에 걸릴 테니까"라고 설명하셨다. 어릴 때 나는 그 말이 이상해서 "가시가 많다는 것을 알 때는 이미 먹힌 다음이잖아요?"라고 되물었다. 어머니는 "그렇지만, 다음에는 같은 종류의 다른 고기를 안 먹을 것 아니겠니. 자기는 죽지만 다른 동료는 구할 수 있는 것이지. 그것이 바로 희생이다"라고 하셨다. 생선 반찬이 나올 때마다, 그 이야기를 수십 번도 더 들었다.

1974년 11월 대학교 1학년 때 내 생애 처음으로 데모에 참여해 '동을 떴다(작전을 실행하다)'.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집회에서 결의문을 읽고 노래를 불렀다. 그때는 데모하고 감옥에 가면 징역 2,3년형을 받는 것이 아니라 15년이나 종신형을 받았다. 그러나 고문을 당하거나 감옥에 가는 것보다 더 망설였던 것은 20년 동안 가꿔 온 꿈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의 전쟁을 치르면서 몰락한 하 씨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어릴 때부터의 구체적인 꿈을 포기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 그래서 사흘 동안 이불 뒤집어쓰고, 학교도 가지 않고, 방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내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삼 일째 되던 날, 아침을 먹는데 어머니가 밥을 푸다가 여동생에게 조용히 "네 오빠가 하는 고민의 내용을 에미는 잘 모른다. 너도 잘 모르겠지. 그렇지만 오빠가 하는 고민이 세상을 바르게 살기 위한 고민이라는 것 정도는 알아두자. 그런데 엄마가 지금까지 세상을 바르게 살라고 가르쳤잖아. 그렇게 가르친 엄마로서 오빠가 이번에 어떤 결정을 하든, 엄마는 아무 말하지 않기로 했다"고 얘기하셨다. 그 얘기를, 차마 내 얼굴을 보지 못하고 중학생인 동생을 보며 말씀하셨다. 며칠 뒤, 선배 몇 명과 등사기를 구해 밤새 유인물을 만들어 다음날 새벽 담을 넘어 학교에 들어가 아침에 '동을 뜨고' 저녁에 잡혔다.

-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어머니가 어떻게 그런 진보적인 생각들을 할 수 있었는지 신기하다.

어머니에 대한 궁금증은 10여 년 뒤에야 그 비밀을 풀 수 있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난 해였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세계사에 없었던 일이었다. 그 무렵 한국의 진보적 학자들이 외국 학회에 나가면 외국 학자들이 모두 한국 대표들을 둘러싸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40년 세월 동안 만들었던 노동조합보다 단 6개월 동안 더 많은 노동조합을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 이전까지는 우리나라에 노동조합이 2500개 정도밖에 없었다. 87년, 88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8000개 가까이 늘었다. 지금은 1년 동안 전국에서 발생하는 노동쟁의가 100건 내외지만, 87년 한 해 동안 발생한 노동쟁의 수는 3500건이 넘었다. 전국에서 3500개의 전투가 발생한 것이나 마찬가지니, 한국 전쟁보다 나라가 더 시끄러웠다는 뜻이다.
어느 날, 어머니가 파업 관련 뉴스를 보시다가 지나가는 말처럼 "지금껏 아무한테도 말을 못하고 살았는데, 사실은 내가 전평 조합원이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걸 40년 만에 털어놓으신 것이다.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은 해방 이후에 생긴 최초의 명실상부한 전국적 노동조합 조직이다. 당시 전평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은 아침에 한강에 시체로 떠오르고 간밤에 죽창에 찔려 죽기도 했다. 어머니도 전쟁 끝나고 다시 직장에 돌아와서 보니까 노동조합 대의원 중에 살아남은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고 했다. "그래도 참 열심히 했다. 똑똑하고, 말 잘하고, 글 잘 쓰고, 잘 생긴 사람들이었다"고 회상했다. 어머니는 내가 이런 얘기 하는 것을 매우 부담스러워하신다. 당신은 절대로 무슨 사상이나 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그냥 좋은 선배들 따라다녔던 것뿐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내가 볼 때 어머니가 해방 공간에서 2,3년 남짓했던 활동이 나머지 평생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어머니는 구순(90세)이 다 되셨지만, 요즘도 나보다 책을 많이 읽으신다. 글씨도 내가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명필이다. 학교 다닐 때 어머니가 써 주신 결석계를 학교에 갖다 내면, 선생님들이 서로 돌려보며 혀를 내눌렀을 정도다.

- 어머님 외에 또 영향을 받은 분이 있다면?
고등학교 은사 중에 고병철 선생님이라고, 고등학교 선배이자 국어 교사인 분이 계셨다. 당시 문예반 활동을 했는데, 선배들이 글 좀 쓴다 싶은 신입생 몇 명을 뽑아 매일 저녁 글 쓰고 비평하고 시화전도 열고 교지도 편집하는 등 무척 바쁘게 빡빡하게 활동했다. 그 선생님이 문예반 지도 교사였는데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셨다. 그 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따금 우리들이 서무과에 가서 선생님 월급을 대신 받아왔다. 월부 책값, 그림 재료값을 빼면 남는 월급이 정말 얼마 되지 않았다. 우리가 '이걸로 한 달 동안 어떻게 사시나' 걱정할 정도였다. 총각이던 선생님이 문예반원들을 데리고, 학교 앞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과 탕수육에 빼갈(고량주) 한 모금씩 먹이면 월급이 다 없어졌다. 한 번은 일요일 아침에 전화로 "월미도 부둣가로 나와라"라고 해서 나가 보니까 배를 한 척 빌려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은 배 타고 섬에 가서 해 질 녘까지 조개 잡고 게 잡으면서 놀았다. "오늘 저녁은 우리 집에 가서 먹자. 지난번에 담근 포도주를 오늘 개봉하는 날이거든"이라고 하시며 우리를 자취방으로 데리고 가곤 했다. 그분이 우리에게 심어준 생각은 '제도권 교육에서 가르치는 대로만 배워서는 올바른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스스로 고민하고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일을 제대로 못한 적도 있었다. 정해진 날까지 교지를 만들어야 하는데, 우리가 하도 게으름을 피우니 선생님이 몇 번 잔소리를 했다. 그러나 한참 사춘기 부심(腐心, 근심)에 쩌는 우리들은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선생님이 야단을 칠 때 노래를 흥얼거린 놈도 있었다. 그게 아마 나였을 것이다. 어느 날 선생님이 "너희 같은 놈들을 데리고 뭘 해보겠다는 내가 잘못이다"라면서 갑자기 당신 바지를 걷더니 30센티미터 자로 자신의 종아리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종아리가 빨갛게 부어오르고 피가 맺히도록 수십 대나 때리고 나가면서 혼잣말처럼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예술혼이 없는 놈들이다." 우리는 큰 충격에 한동안 아무 말도 못했다.

당시 그 고등학교는 1년에 100명 가까이를 서울대에 보내는 소위 일류 학교였다. 학생들은 최소한 나중에 자기가 교사보다는 잘 될 거라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선생님을 존경하긴 했지만, 자신은 변호사나 의사나 교수가 될 테니까 '그래 봤자. 교사 아니냐'라고 우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우리끼리 "저 선생님의 한계는 우리가 벗어나자"라는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 뒤 철들고 나서야 그 분이 우리에게 보여 준 모습이 보통 사람은 감히 따라 하기 어려운 훌륭한 삶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 대학을 졸업한 1982년 인천 도시산업선교회가 운영하는 '일꾼자료연구실'에서 시작해 30년째 노동 교육 및 상담을 해왔다. 최근에는 공중파에서 강연도 했다(CBS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27회 "노동,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 오랜 기간 '노동'이라는 한 분야에 천착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나에게 "사람이 다양한 경험을 하며 살아야 하는데 너무 외골수로 한 면만 보고 살아서 문제"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 물론 친한 사이에 농담처럼 한 얘기다. 그래서 "내가 있는 분야는 이 일을 오래하는 사람이 너무 적은 것이 오히려 문제"라고 했다. 노동운동을 열심히 하다가 지금 다른 분야로 진출한 사람들이 많다. 나는 그들이 나쁘다고 보지는 않는다. 내가 이 일을 계속하고 있는 이유는 남달리 특별하게 노동운동에 대한 신념이 강하거나 그 사람들보다 대단해서가 아니라, 나에게 다른 분야의 일들을 감당해 낼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노회찬 씨를 보자. 그 사람은 나보다 훨씬 더 노동운동을 열심히 했던 사람이다. 정치인이 됐다고 해서 변절했다고 보는 것은 옳은 시각이 아니다. 원래 노동운동은 역량이 축적되면 정치 세력화하는 것이 정상이다. 여러 나라에서 노동자 정당이 만들어지고 결국 그들이 사회를 바꿔 나간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일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오래 한 것뿐이다.

- 보통 사람들이 가기 어려운 길을 오랫 동안 걸어왔다. 외롭지는 않았나.
생각보다 힘든 적이 별로 없었다. 그 이유는 내가 강해서가 아니라 비교적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분야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조직 노동운동이 상처도 많이 받고 외로울 때가 많다. 조직 사업은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기도 하고, 내부의 적과 철저히 싸워 이겨야 하는 일이다. 그것이 성실한 활동가가 가져야 할 자세다. 그래야 그 조직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나도 나름대로 10년 넘게 조직 노동운동을 하면서 후배를 조직에서 제명하기도 하고, 조직으로부터 '하종강은 이 조직의 교육 사업 일체에서 손을 떼라'는 결정을 받기도 했다. 모두 비합법 조직의 엄중한 분위기 속에서 치른 일들이었다. '프락치(fraktsiya, 밀고자)'라는 의도적 모함도 받았다. 그러나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없어 조직 사업을 포기했다. 시골의 작은 농공단지에 있는, 조합원이 몇 명 안 되는 노동조합도 조직 내 갈등이 있다. 물론 조직에 소속된 사람이 갖는 혜택도 있다. 잘못을 해도 다른 조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준다는 것이다. 그것은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하다. 현장에서는 '인간쓰레기'라고 지탄받는 무능한 활동가를 조직이 보호해줄 때가 있다. 정파의 폐단이 바로 그런 점이다.
내가 교육과 상담 분야에서 일하기로 진로를 결정했을 때, 너무 쉬운 선택을 했다고 비난하는 후배들도 있었다. 나는 "운동권 내에서조차 출세하지 않겠다는 뜻이다"라고 그 사람들을 설득했다. 아무리 작은 시민단체든, 노동운동단체든 조직 활동하는 사람들을 나는 진심으로 존경한다. 내가 일찍이 포기한 일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2001∼2004년 <한겨레21>에 연재했던 사람들 이야기를 엮어 <길에서 만난 사람들>(후마니타스 펴냄)이라는 책을 냈다. 인터뷰 대상 선정 기준이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 우리 사회의 모순된 억압 구조를 더욱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하지 않는 사람, 운동권 내에서조차 중심에 우뚝 서 있지 않은 사람"이고 "본능적 정의감이 핏속에 흐르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많은 사람을 만나는 과정에서 인상적이었던 순간, 혹은 배웠던 것은 무엇이었나.

신문에 이름 석 자 나온 적 없지만, 정말 소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프랑스 혁명에서도 역사에 기록된 훌륭한 전사들이 있지만, 사실은 골목에서 두려워하며 쫓겨 다닌 사람들도 많았고, 그 사람들이 역사를 바꿨다고 생각한다.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에서도 혁명이 실패하고 시민군의 시체가 나란히 누워 있는 장면이 잠깐 나오는데, 그 모습이 광주 민주항쟁 때 사진과 거의 똑같아서 숨이 멎을 정도로 놀랐다. 어느 시대에나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인터뷰한 사람들은 유명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다만, 단병호 전 국회의원(민주노총 3,4대 위원장)을 인터뷰하지 못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사춘기적 일기에 "유명해진 사람들은, 같은 일을 하고도 유명해지지 않은 다른 사람들보다 무엇인가 부족했기 때문이다"라고 적은 적이 있다. 일종의 결벽증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인터뷰한 유명인은 이소선 어머니가 유일했다. 전태일 열사를 조금이라도 더 알리기 위해 추모일(11월 3일)에 맞춰 한 인터뷰였다.

소설책 몇 권이나 영화 몇 편 못지않은 드라마와 같은 순간이 노동자들의 삶 속에 있다. 단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예를 들어, 산업재해를 당해서 한쪽에 손가락이 거의 없는 노동자를 알고 있는데 과일행상을 하면서 살았다. 한번은 그 사람이 노동자들 농성현장을 지나다 천막이 다 철거당해 사람들이 길바닥에 나앉아 있는 모습을 봤다고 한다. 그가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요. 제 차를 그냥 거기에 박아버렸어요. 도저히 그냥 올 수가 없더라고요." 그는 그 날부터 몇 달 동안을 농성장이 된 트럭에서 살았다. 그냥 돌아올 수도 있었지만 좀 더 고생스러운 선택을 한 것이다. 학생운동도 했고 노동운동도 하면서 싸워온 사람에게 "그렇게 앞장서서 싸우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잘 모르겠어요. 싸움이 벌어지면 내가 그냥 앞에 서 있더라고요." 그런 순간이 감동적이다. 또 다른 노동자에게는 노동조합 간부를 왜 맡았냐고 물으니 "어릴 때부터 남에게 뭔가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요"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 빛이 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파업에 참여했다가 102억 원을 가압류 당한 노동자가 있다. 법률적으로 그 사람이 평생 버는 돈 중에 102억 원은 회사 몫이라는 얘기이다. 회사는 그 노동자에게 사표를 쓰면 가압류를 해지해주겠다고 했다.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사표를 써야 마땅할 것 같은데, 마다하고 계속 싸운다. 평생 벌어서 그 돈을 다 갚는 한이 있어도 노동운동을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그 노동자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라고 물으니, "힘들 때일수록 원칙으로 돌아가야죠"라고 했다.

- 시대가 바뀔수록 사람 간에,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앞서 말씀했던 면을 발견하기 쉽지 않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나?
한국 근현대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거라 생각한다. 도올 김용옥 선생 같은 사람은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한국의 공공의식이 말살 당했다고 주장한다. 상당 부분 동의한다. 식민지 하에서는 집 밖을 나가면 경찰서든, 관공서든, 기업이든, 학교든 동족을 배신한 사람들이 출세해 활개치는 세상이었으니 집안 문을 더욱 꽁꽁 닫고 들어앉아 가족의 행복만 추구했다. 가족 이기주의를 중시하는 가치관이 사회 전반에 형성된 것이다.

다른 나라들은 식민지에서 해방되면서 침략국에 부역한 사람들이 감옥에 가거나 처형을 당해 잘못을 바로잡는 과정을 거쳤다. 프랑스는 2차 대전이 끝난 뒤 나치에게 협력한 7500여 명에게 사형 선고를 했고, 실제로 700명 이상을 집행해서 죽였다. 프랑스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폴란드, 독일, 중국, 일본도 그랬다. 그 때 처형당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있는 곳이 바로 야스쿠니 신사 아닌가. 얼마 전 독일에서 나치 전범을 체포했는데, 그 사람 나이가 93살이었다. 몇십 년 추적 끝에 잡았다. 우리는 못한 일이다. 그 결과 한국 사회에는 친일파 세력의 후예들이 지금도, 여전히 권력의 핵심에 살아 있다. 동족을 배신했던 부도덕한 사람들이 처벌받는 모습을 보면서 사회의 가치관이 새롭게 바뀌는 것인데, 한국은 해방되고 전쟁이 끝나고 정권 교체가 몇 번이나 있었어도 도덕적 정당성을 상실한 세력이 계속 권력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이 1948년을 건국으로 기념하자고 주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1945년에 나라가 세워졌다고 하면, 그 당시 자신들은 일본군 장교이거나 순사였으니 얼굴을 들 수가 없음을 스스로 잘 알고 있는 것이다. 1948년에 나라가 세워졌다고 해야 자신들이 빨갱이와 싸워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올바른 교육이 이뤄지기 어렵다. 정의에 대해 가르칠수록 지배 세력은 죄인이 될 수밖에 없으니, 자신들에게 마치 사형선고와 같은 사회 정의에 대해 제대로 가르칠 수가 없다. 정의를 추구하면서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 마치 무가치한 일인 양 여겨지고 있다. 다른 나라들에서 보기 힘든 극우보수적 정치 성향이 한국 사회에 형성된 것은 이처럼 특별한 우리 근현대사와 무관할 수 없다. 사회가 너무 오른쪽에 치우쳐 있으니 가운데로 옮겨 놓으려고 하는 중립적·정상적인 주장들이 좌편향으로 보이는 것이다.

- 우리 중 다수는 노동자이고 노동자의 자식이며 우리의 아들, 딸 역시 노동자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대기업 사원, 공무원, 기술자, 지식인, 예술가도 모두 노동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노동' 이라는 개념에 익숙하지 못하고 '나의 문제'와 동떨어지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땅에서 '노동'이 갖는 의미를 들려 달라.
20년 전 전교조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2000명 이상의 교사가 해직당했다. 노동조합을 설립한다고 교사 2000명을 해직한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 그럼에도 권력은 전교조 설립을 막지 못했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중요하다. 10여 년의 세월이 지난 뒤 공무원노조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공무원 3000명이 징계를 당했고, 그 중 550명이 파면해임 당했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역시 중요한 사실은 그럼에도 막강 권력은 공무원노조 설립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 판단해보자. 노동자를 해고한 권력과 해고당한 노동자 중 누구의 주장이 옳았는가. 불과 20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판단하기는 너무 쉽지 않은가.

알다시피 한국 사회에서는 올바른 '계급의식'을 갖기가 힘들다. 내가 말하는 계급의식이란 사회주의에서 얘기하는 강한 수준이 아니라, 자본주의 내에서 스스로 노동자라는 자기 위치를 인식하는 정도의 의식이다. 한국 사회는 시장경제에 입각한 이런 노동자 의식조차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다른 나라에는 경찰노동조합·소방관노동조합·교장노동조합·판사노동조합 등이 있다. 유럽의 한 차관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자신도 공무원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말을 했다. 자신을 '노동자'라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국은 제도권 교육에서 이런 내용을 전혀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반(反) 노동자 의식을 갖도록 가르친다. 올바른 노동자 의식이 우리 사회에 형성되는 일 또한 지금까지 한국 사회를 지배했던 기득권 세력에게 사형선고와 마찬가지였을 테니 가르칠 수 없었던 것이다.

작년 말, 경찰이 철도노조 간부를 체포한다며 민주노총이 있는 건물을 침탈했을 때 소방관이 도끼로 현관을 부수는 장면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외국에서는 소방관노조가 그런 지시를 거부한다. 스페인의 카탈루냐 소방관노조는 권력의 비슷한 요청에 "사람들을 위험에서 구하는 것이 소방관의 임무다.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은 소방관의 임무와 모순된다"며 거부했다. 스스로를 소방관이라고 밝히며 "그런 요청을 받았을 때 한 번쯤이라도 못하겠다고 거부했어야 한다. 우리에게도 소방관노조가 있었다면, 그렇게 '대국민 문 따기 시범'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라는 글을 인터넷에서 봤다. 이들은 언젠가 소방관노조를 만들 것이라고 본다. 파면해임당할 수도 있지만, 이 같은 사회 변화를 막을 수는 없다.

유럽 국가 중에는 군인노조가 있는 곳도 있다. 세계대전을 두 차례 겪으며 동서로 분단됐던 독일 같은 나라에도 군인노조가 있다. 우리 사회는 이런 현상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군인이 노동조합을 만들면 "국방은 누가 지키느냐"는 천박한 고민을 하는 게 우리 현실이다. 실제로 군인노조가 생기면 군대가 청렴해진다. 다른 나라에서는 초등학생도 이해하는 것을 우리는 대학생에게조차 한참 설명해야 한다.

- 대입·취업·결혼·출산·육아·정년·노후 등 지금 우리 사회 개개인은 인생의 매 단계 단계마다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갖가지 부담과 씨름하고 있다. 감정적으로는 불안감과 불만족이 팽배하고, 물질적으로는 학비·주거비·양육비·의료비 등 생활이 피폐해지기 쉬운 환경에 처해있다. 사회문제를 개인이 아니라, 사회 전체 구조 속에서 봐야 한다는 것은 어떤 중요성을 갖는가.

중고등학교 한 반에 학생이 30명이라고 하면, 그중에서 대기업이나 공기업 정규직이 되는 학생은 평균 1명이다. 나머지 29명에게는 이룰 수 없는 꿈이다. 현실은 이런데, 수많은 자기계발서나 명사들은 열심히 노력해서 그 1명이 되라고만 가르친다. 29명이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구조를 바꾸는 것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는다. 구조를 바꾸는 일은 사회를 지배하는 불의한 권력과 맞서는 것인데, 권력이나 재력을 가진 사람에게 미움을 살만한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는 것이다.

청년실업 문제는 정부의 정책이나 기업의 경영방식이 바뀌지 않으면 해결하기 어렵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청년실업 얘기가 나올 때마다 계속 청년들의 눈높이만을 얘기했다. 눈높이가 너무 높아서 수도권 대기업에만 몰리기 때문에 중소기업에는 인력난이 생기고, 이는 청년실업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눈높이를 낮춰 지방에 있는 중소기업에 취업하면, 청년실업 문제가 해소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말은 지방에 청년이 취업하고 싶은 일자리를 먼저 만들어 놓고 해야 한다. 하루에 열 몇 시간씩 일하고 80만 원밖에 받지 못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해결되지 않는 일인데, 우리 사회는 개인이 스펙을 높여 성공하는 것만 가르친다. 나는 29명도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노동자들이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곧 사회 구조를 바꾸는 일이다. 다소 이기적으로 보일지라도 노동자들의 이익이 증가하는 것이 사회 전체가 발전하는 방향이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소박한 계급의식이다. 노동자 계급이 사회 전체를 전복하거나 지배하는 차원의 계급의식이 아니다. 이렇게 소박한 계급의식조차 형성되기 어려운 한국 사회의 현실이 안타깝다.

- 쌍용차 정리해고 사태와 철도 민영화 논란 등 노동조합이 탄탄한 환경에서조차 회사의 결정으로 많은 노동자가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입었다. 두 사건의 본질이 궁금하다.
쌍용차 사태는 '24명이 죽었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24명이나 죽었다는 분명한 사실의 엄중함 때문에 연대하는 시민이 많았다. 하지만 한 명도 죽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진보적 정치인이라고 할 수 없는 문국현 씨(전 창조한국당 대표)조차 쌍용차 전체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고르게 단축하고, 노사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면 정리해고 없이 해결할 수 있다고 해법을 제시했다. 실제로 '유한킴벌리'는 불황을 그렇게 극복했다. 충분히 가능한 방식이었다. 기업 경영자 출신인데도, 그가 제시한 방식은 노동조합이 제시한 방식과 거의 같았다. 당시 쌍용차 노조는 노동시간 단축·순환 휴직 등 전체 직원이 고통을 분담하는 방식을 제시했고, 이런 주장이 함축된 것이 바로 '함께 살자'는 구호였다. 충분히 합리적인 방식이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경제외적 요인이 중요한 변수였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당시 쌍용차 경영진이 공식 인터뷰가 아닌 기자들과 사석에서 나눈 대화들 중에 "강성노조가 있는 기업에 누가 투자하고 싶어 하겠느냐"는 내용이 언론에 스치듯 나온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말이 쌍용차 사태를 정부와 기업에서 그렇게 몰아간 이유를 웅변한다고 생각한다. 정리해고를 통해 민주노총 금속노조로 대변되는 '강성 노조'를 무력화시키고 싶었던 정치적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목표가 회사, 정부, 경찰, 정보기관, 지역 토호세력 등으로 이루어진 네트워크 속에서 공유됐을 것으로 본다. 노동자를 정리해고하고 그것에 반대하는 노동조합 투쟁 과정에서 핵심 간부를 구속하고, 강성 조합원을 정리해고 대상에 포함시켜 강제 해고하고, 남아있는 노동자를 구슬려 민주노총에서 탈퇴시키는 시나리오가 한진중공업이나 쌍용자동차에서 거의 똑같이 진행됐다. 그런 목적이 아니라면, 노동조합이 제시한 합리적인 해결 방안을 사측에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쌍용자동차뿐만 아니라 재능교육, KEC, 유성기업, 콜트콜텍, 3M 등 현재 진행되고 있는 장기투쟁 사업장의 공통점은 노동운동에 대한 비정상적 혐오감이다. 한국 정부와 기업 등 기득권 세력이 노동운동을 약화시키는 것을 마치 사회 전체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노동조합의 힘이 강해지는 것을 사회 발전의 저해 요소로 간주하면서 아무 죄책감 없이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려고 한다. 문제는 자신의 생각이 흔히 말하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비추어 볼 때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된 인식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마치 애사심의 발로인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들이 회사 경영에 저해요소가 되는 사람들을 진압했기 때문에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노동운동을 탄압한 사람들이 최소한 죄책감이나 굴욕감을 느낀다. '아, 내가 먹고 살기 위해서 참 치사하지만 회사의 지시를 받아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짓까지 해야 하는구나'라고 창피해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그런 사람들은 부끄러움이 없다.

Ⓒ프레시안(최형락)

- 들을수록 답답하다. '선진 5개국 학교노동교육 실태' 보고서를 보면 여타 국가들에서는 초등학교에서부터 모의단체 교섭에 참여하는 등 제도권 내 노동교육을 철저히 시행한다.

다른 나라는 대부분 제도권 교육 과정(학교)에서 노동교육을 시행한다. 우리는 학교에서 노동문제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노동교육을 전혀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기업 중심의 반(反)노동자 의식을 가르치고 있다. 다른 나라의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보면, 한국의 대학원 과정에서 공부하는 내용 못지않게 노동 문제를 높은 수준으로 공부한다. 현재 경기도교육청의 경우, '민주시민'이라는 과목을 만들어 교과서도 출판했다. '민주시민'에는 노동교육에 관한 내용도 포함돼 있다. 앞으로 '민주시민'과 같은 과목을 편성하고 가르치는 학교가 점차 많아질 것이다. 언젠가는 정부의 교육과정 자체가 바뀌면서 전국의 모든 학교에서 노동교육을 하게 될 것이다. 다른 나라들이 100년 전쯤 한 일을 우리는 이제 시작했다. 어쨌든 사회가 이렇게 계속 변화하는 방향에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우리는 '진보한다'고 표현한다.

- 사회지도층이나 일반 시민들이 지금과 같이 저조한 노동 의식에 갇혀 있거나 노동자들과의 협력을 부정적, 비효율적으로 바라보는 일을 막는데 노동교육의 역할이 있지 않을까?
노동교육의 부재로 나타나는 현상을 활동하는 곳곳에서 만나게 된다. "이렇게 농성하고 단식하고 삭발하는 자학적인 투쟁 말고, 시민들이 웃으면서 연대할 수 있는 부드러운 투쟁 방식으로 바꿀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충고하는 사람들도 있다. 노동자의 경직된 사고 때문에 구태의연한 투쟁 방식에 연연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은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볼 때 그것은 함부로 할 수 있는 충고가 아니다. 그 노동자들이 다양한, 다른 방식의 투쟁을 해보지 않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스로 "죽는 것 외에 다 해봤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길거리에서 7년 동안을 싸운 재능교육 유명자 지부장은 농성천막을 나가며 "그래도 내가 젊은이들과 연대하기 위해 웃으면서 나간다"고 말했다. 그 말 들은 뒤 플래시몹 동영상을 보니까 유명자 지부장이 열심히 동작을 따라 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목이 메고 눈물이 나왔다. 연대하는 시민들 앞에서 웃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가면 우울증'에 걸릴 지경이라고 말하는 노동자들도 있다는 사실을 알까?

콜트콜텍 노동자들은 전 세계 기타의 30%를 만들고 있다. 그런데 기타공장에는 창문이 없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기타 제조 공정상 밀폐된 환경이 필요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나중에 들으니, 노동자가 일하다가 자꾸 창밖을 보면 딴생각을 한다고 사장이 창문을 만들지 못하게 했고, 있던 창문도 다 막아버렸다고 한다. 그렇게 열악한 상황 속에서 최저임금에 가까운 임금을 받으며 일하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설립하자, 사장은 얼마 뒤 공장을 폐업했다. 그때 실직한 노동자들이 올해로 7년째 복직 투쟁을 하고 있다. 3년쯤 전부터는 기타를 배워 요즘은 '콜텍콜텍 밴드(콜밴)'라는 이름으로 연주 활동도 한다. 작년 연말에는 홍대 앞에서 연극 공연도 했다. 딱 9일만 공연한다고 해서 "구일만햄릿"이라는 제목의 연극이었는데 전회 매진되는 바람에 연장 공연을 했다. 한 진보적인 철학 교수는 "해고된 노동자들이 잘 극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가진 게 없어도 풍요롭게 살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내용의 칼럼을 썼다. 물론 애정이 담긴 글이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노동자들은 거의 분노했다. "누가? 우리가?" "행복하냐고 한번 물어보고 쓰든지." "그럼, 우리랑 한번 바꿔 살아보든지." 지금도 그 노동자들은 이미 팔려버린 공장부지 건너편 길가 농성천막에서 자고 있다. 설 연휴도 그렇게 보냈다.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결코 '풍요롭다'고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자칫 책상에 앉아 진보적 생각을 하는 지식인이 가질 수 있는 문제점은 아닌가 생각해봤다. 이런 일을 볼 때마다 나는 그렇게 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만약 제도권 교육에서 노동문제를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교육이 제대로 갖춰졌더라면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그런 얘기를 쉽게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최형락)
얼마 전, 자신을 '치유 활동가'라고 소개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노동운동하다가 마음에 상처 입은 노동자들을 치유하는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기관이나 단체에 '치유 활동가'라는 직책이 당연히 있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을 '치유 활동가'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남들 앞에서 자신을 스스로 '치유 활동가'라고 소개하는 것은 좀 더 신중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노동자들을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만나 왔지만, 노동자를 치유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감히 못 하는데 훨씬 젊은 사람이 남들 앞에서 자신을 그렇게 소개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라고 몇 마디 했다가, 사람들에게 "노동운동 40년 경력 앞세워 꼰대 노릇을 한다"는 질책만 듣고 입을 닫았다. 흔한 말로 본전도 못 건졌다. 그 문제로 논쟁을 벌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어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지만, 문제의식은 계속 남았다. 고통당하는 노동자들에게 동정심으로 접근한 시민들 중에도 가끔 그런 면을 보이는 사람도 있다.

언제부턴가 노동운동이 진보 영역 내에서 가장 진부한 분야처럼 인식돼 버렸다. 하지만 노동운동이 한 번도 제대로 자리매김해 본 적이 없는 이 척박한 사회에서 노동운동은 여전히 진보 영역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영양실조 상태에 있기 때문에 운동 과잉의 부작용을 걱정하거나, 다이어트를 고민할 단계는 아니다. 줄 타는 광대가 줄 위에 올라가서 펼치는 부채는 항상 광대 몸이 기울어져 있는 반대편으로만 펼쳐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양심적인 지식인 중에서는 부채를 가운데로 펴면서 자기가 공정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판사들이 노동자들에게 파업으로 인한 손해배상 판결을 하면서 자신은 자본과 노동 사이에서 공정했다고 착각을 하는데, 틀린 생각이다. 그런 철저한 공정함이 오히려 치우침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있다.

-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많은 사람들이 이념에 대해 회의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며 민주화운동을 접을 때 많이 흔들렸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내린 결론은 '고전적 휴머니즘'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고전적 휴머니즘'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내 삶의 중요한 테마 중 하나가 고전적 휴머니즘이다. 한국의 운동권은 90년대 초반 소비에트가 해체되고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동구에서 연달아 무너졌을 때, 가장 많이 축소됐다. 소비에트는 '인류 역사상 가장 과학적인 이데올로기로 70년 동안 무장했다'고 자랑했던 나라였는데, 급속하게 해체됐다. 이러한 상황을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위대한 승리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40살 넘은 운동권 친구들이 졸업장을 받아야겠다고 대학에 복학하고, 영어회화 공부를 시작하고, 사법고시·공인회계사 시험 준비를 했다. 그리고 많이 붙었다. 사법고시를 준비 중인 법대 학생들이 "운동권 선배들 합격률이 높아서 우리가 힘들다"라고 푸념했을 정도였다. 그 무렵 가치관, 세계관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 분야에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하는 일 속에 고전적 휴머니즘의 충족감을 주는 내용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치거나 병든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인정받도록 하는 일, 해고된 노동자가 다시 복직하도록 하는 일 등이 내가 했던 상담과 교육의 주된 내용이었다. '내가 이 노동자를 붙들고 두어 시간 상담을 하면, 내가 이 자료 뭉치를 붙들고 밤을 새워 서류를 만들면, 저 노동자와 가족들이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고, 실제로 그런 일들이 꽤 많았다. 이런 일들이 나를 오히려 구원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어려운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자기 자신의 행복만 추구하는 삶은 천박하다는 생각만이라도 최소한 가졌으면 좋겠다. 자기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짐승도 한다. 인간이 짐승과 구별되는 중요한 차이 중에 하나는 가족이 아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무언가 수고하고 희생할 수 있는 점이라는 생각을 애완동물을 키우면서 하게 됐다. 햄스터도 자기가 낳은 새끼들은 끔찍이 사랑한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무언가 수고하고 희생하는" 대표적 활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운동이라고 생각한다. 민주노총 산하 많은 조직들에서 민주노총 간부를 맡는다는 것은 정년퇴직할 때까지 진급을 포기한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아직도 우리 사회가 그렇다. '대기업 정규직 기득권'이라고 비난받는 대기업 노동조합들도 민주노총 사업장은 대개 그렇다. 물론 어용노조는 다르다. 노동조합 간부가 오히려 빨리 승진하고 경영자와 친분을 유지한다. 내가 볼 때 한국 사회에서 절반 정도는 그런 어용노조다. 우리 사회 모든 청년들이 어용노조가 아닌 민주노총의 간부처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선택을 한 번쯤 해봤으면 좋겠다.

- '하종강'에게 자유란?

PC통신 '나우누리'는 한글 아이디 사용이 가능했다. 당시 내가 썼던 아이디가 '자유혼'이었다. 영화 <벤허>를 보면, 주인공 벤허가 함선 밑창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노 젓는 노예로 일하고 있을 때 로마군 사령관과 눈이 마주쳐 사령관이 벤허에게 "노예로 일한 지 몇 년이나 됐느냐"고 묻는 장면이 있다. 내 기억이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벤허는 "당신들에게는 3년이지만 나에게는 300년이다"라고 답한다. 그러자 사령관이 부하에게 "저놈의 사슬을 풀어주어라. 저놈의 눈에는 자유혼이 있다. 자유혼을 가진 놈은 노예가 될 수 없다"라고 명령한다. 나는 그 말이 너무 멋있었다. 목사인 최완택 선배도 그런 얘기를 했다. 크게 공감해 내 아이디를 '자유혼'으로 정했다. 나에게 자유는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의지다. 부당한 권력에 침범당하면 자유는 사라진다.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고 부당한 권력에 저항할 때,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신비스러운 가치가 있다. 나는 이러한 현상이 과학적으로도 증명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을 하면 특정 호르몬이 분비된다고 하던데, 마찬가지로 손해를 감수하는 정의로운 행동을 할 때에도 그런 작용이 있지 않을까 싶다. 억압받지 않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일에 저항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다.

Ⓒ프레시안(최형락)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인터뷰는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전공 윤예지 씨가 진행하고, 정리는 정치경영연구소 손어진 연구원이 맡았습니다.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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