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다수결이 아니다. 흔히 듣는 말이 다 맞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가방끈 긴 사람이 하는 말 역시 다 맞는 건 아니다. 어느 교수가 '행주치마'가 임진왜란 당시 행주대첩과 관련이 있다고 말하는 걸 듣고 기함을 한 적이 있다. 사실과 다르다. '행주치마'는 임진왜란 전부터 있었다. 어릴 때 들은 이야기를 교정할 기회 없이 나이를 먹은 경우일 게다.
이런 경우가 많다. '복지국가에선 자살이 흔하다'라는 속설도 그런 예다. 이렇게 믿는 이들을 참 많이 봤다. 나름의 이유도 댄다. 대체로 북유럽 국가들이 복지가 잘 갖춰져 있는데, 이들 나라는 기후가 나빠서 사람들이 쉽게 우울해하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복지국가에선 삶의 긴장감이 없어져서 자살 충동에 쉽게 빠진다고도 했다. 모두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북유럽 복지국가의 자살률은 오히려 낮은 편이다. 자살률 최상위권을 기록한 한국보다는 물론 낮다. 그럼 어쩌다 이런 오해가 생겼을까. 흥미로운 건 이런 오해가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오랫동안 스웨덴에 머물며 복지국가 모델을 연구했던, 기타오카 다카요시 일본 메이지 대학 교수가 답을 찾아냈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1960년에 한 연설을 계기로 확산된 오해라는 게다. 당시 아이젠하워는 스웨덴은 자살률이 높은 나라이며 이는 사회주의의 결과물이라고 역설했다.
1960년대 스웨덴의 자살률이 높은 편이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아이젠하워의 주장은 틀렸다. 스웨덴의 자살률은 사회주의와 무관했다. 일단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 모델 자체가 소련식 사회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사회(Social)'라는 단어가 겹칠 뿐, 나머지 공통분모는 없다. 또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체제가 안정 궤도에 오른 1970년 이후에는 자살률이 꾸준히 떨어졌다. 아이젠하워의 연설은 미국과 소련 사이의 첨예한 체제대결 속에서 불거진 억지 선동이었다.
남의 나라 이야기를 길게 했던 건, '자살'에 대한 통념을 돌아보고 싶어서였다. '북유럽 사람들은 날씨가 추워서 자살한다', '복지가 잘 갖춰져 있으니 긴장이 풀려서 자살한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누구나 자기 목숨에 애착이 있다.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사람도, 막상 죽을 고비가 되면 간절히 살고 싶어 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말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런데 날씨가 추워서 자살한다니, 우린 왜 저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믿고 있었을까. 어쩌면 우리의 집단 무의식에는 자살에 대한 너무 가벼운 생각이 있었던 것 아닐까. 마치 일본 전국시대 사무라이들이 삶과 자살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게 일상이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던 게 아닐까. 사무라이들의 전쟁터나 다름없는, 정글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나와 세상을 잇는 끈이 언제든 끊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은 일상이다. 자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정서는, 이런 불안감을 견뎌내기 위한 내면의 방어기제 아닐까. 이렇게라도 이해해야, 잇따른 자살 사건을 대하는 언론과 대중의 가벼운 태도를 견뎌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자살 사건으로 '어뷰징'을 하는 언론의 행태를 견뎌낼 도리가 없다.
"지금 우리의 심정과 상황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통계 수치가 두 가지라고 생각해요. 자살률과 출산율입니다. 자살률이라는 것은, (…) 불행히도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전체 중 1위입니다. OECD 회원국 중 자살률이 가장 낮은 나라에 비해 10배나 높아요. 거의 매일 40여 명 정도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1년이면 1만5500여 명이 비극적 선택을 합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각박한가를 보여주는 수치죠.
출산율이라는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낳은 아이가 앞으로 얼마나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가 하는 기대에 따라 출산율이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해요.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거의 세계 최하위 수준입니다. 자살률이 가장 높고 출산율은 낮은 나라. 한마디로 지금 가장 불행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사회라는 얘기가 아닐까요?" (<안철수의 생각>, 83~84쪽)
안철수 의원이 지난 2012년 대선 출마를 앞두고 한 말이다. 안 의원에게 저작권이 있는 내용은 아니다.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도 사석에서 거의 같은 이야기를 했었다. 이들 외에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들이 많았다. 안 의원은 자기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울러 '높은 자살률과 낮은 출산율'을 언급하며 복지의 필요성을 역설하던,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숱한 정책 전문가들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대선 당시 그들이 하던 말들을, 지금 몇 명이나 기억하고 있을까.
이 와중에, 복지국가에 대한 저작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는 정당의 젊은 지도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당 지도자였으나, 그는 복지사각지대에 맨몸으로 내동댕이쳐진 '싱글맘'이었다. 고(故) 박은지 노동당 부대표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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