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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의 '잘못된 일본'은 이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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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의 '잘못된 일본'은 이때부터!

[프레시안 books] 고미카와 준페이의 <인간의 조건>

1955년에 일본에서 출간돼 1500만부나 팔렸다는 고미카와 준페이(五味川純平, 1916~1995)의 소설 <인간의 조건>(이와나미 쇼텐 펴냄)은 1959~61년 6부 총 상영시간 9시간 반짜리 영화와 드라마로도 만들어지는 등 여러 가지 기록을 수립한, 이른바 초(超)베스트셀러 소설이다.

▲ <인간의 조건>(전 6권, 고미카와 준페이 지음, 김대환 옮김, 잇북 펴냄). ⓒ잇북
해적판을 포함해서 한글 판본도 여럿 있었으나 1993년판 이후 새 번역본이 없다가 지난해 잇북 출판사에서 6권(김대환 옮김)으로 다시 번역 출간됐다. 여러 판본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지난 시절 한국에서도 상당히 많이 읽힌 책이라고 봐야겠다. 잇북 쪽은 표지 제목 글자를 신영복 교수한테서 받았다며, 신 교수뿐만 아니라 김두식 교수, 배우 최불암 씨 등도 이 소설을 감명 깊게 읽은 사람으로 꼽았다. 서경식 도쿄경제대학교 교수와 권인숙 명지대학교 교수, 최복현 작가는 이번 판 추천사를 썼다. 1993년판 이후 절판되다시피 했으니 이들 연배 이후의 세대, 말하자면 지금의 30대까지는 이 책의 존재를 잘 모를 수 있겠다. 20여 년 만에 새로 번역·출간된 2013년판은 그러니까 이들 잘 모르는 새 세대와 옛 독서 감흥을 간직하고 있는 세대 모두를 겨냥하고 있는 셈이다.


제목 '인간의 조건'이란 말 그대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이는 인간답지 못한 조건, 인간답게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조건, 또는 인간 이하,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것으로 살아가야 하는 조건과 대비시킬 때 개념이 좀 더 선명해진다. 먼저 나온 앙드레 말로의 소설과 같은 제목을 단 고미카와의 <인간의 조건>은 바로 이 인간답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인간이 아니기를 강요하는 조건들에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싸움, 그리고 그들과 인간이기를 포기한 인간 이하, 인간답지 않은 온갖 부류의 비열한 인간들이 벌이는 끝없는 갈등과 사투로 점철돼 있다.

시공간적 배경은 일제 말기인 1943~45년, 전시동원 체제하 제국 일본의 괴뢰국가 만주국 랴오닝성의 거대 제철(제강)기업 및 그 산하 라오후링(老虎嶺) 탄광소와 동북부 소만(소련-만주) 국경지대의 일제 관동군 최전선 부대와 그 주변이다.
 

▲ 영화 <인간의 조건>.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 1959~61년에 걸쳐 6부로 공개되었다.
그 말기적 극한 상황 속에 내던져진 20대 말 나이의 일본인 제철소 노무관리 직원 '가지'. 제국 일본의 파시즘 체제에 환멸을 느낀 진보 좌파 성향의 반전주의자지만, 주류보다는 고뇌하는 지식인형의 양심적이고 건장한 비주류적 주변인물 쯤으로 설정된 인물이다. 가지와 제철소 타이피스트 출신의 순정파적 애인이자 아내 '미치코'의 순애보와 그들 주변 인간들의 인간다움을 유지하려는 필사적 노력, 일제 파시즘 체제에 빌붙은 끔찍한 인간 이하 악인들에 대한 혐오와 저항, 부분적 승리와 좌절, 그것이 안겨주는 카타르시스와 절망의 연쇄가 스토리 전개의 기본 동력인데, 고미카와는 이야기를 단순한 권선징악의 활극적 해피엔딩으로 끌어가지 않는다.


자고로 세상의 모순이란 간단히, 기분 좋게 치유되는 법이 없다. 쉽게 치유되면 드러나는 모순의 깊이도 얕을 수밖에 없다. 감상적 영웅주의가 가미된 통속적·멜로적 요소를 듬뿍 지닌 재미있고 잘 읽히는 소설이면서도 문제의 본질에 육박해 가는 묵직한 울림을 주면서 두고두고 "휴머니즘 문학의 고전", "걸작"이라는 찬사를 듣게 된 데에는 작가의 그런 스토리 전개 전략이 한몫 했을 것이다.


그와 함께 지은이의 직접 체험이 바탕이 된, 자전적 요소가 강한 묘사들의 구체성과 진정성, 그리고 전시동원 체제하의 패전으로 치닫는 일제 말기의 실제 상황이 빚어내는 사실성과 극명한 모순·대립 구조들이 울림을 증폭시킨다. 이를 통해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 이데올로기 대립과 뒤엉킨 당대 만주의 비극적 실상의 단면들이 드러나는데, 이 소설만큼 적나라하게 그것을 간접 체험할 수 있게 해 주는 기회를 만나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그것도 자신이 가해자임을 자각하면서 일본제국과 관동군이 저지르는 악행에 끝없이 분노하고 그것을 폭로하고 싸우는, 약간의 자의식 과잉형 일본 지식인의 눈을 통해.

일본이 가해자로 등장하는 전쟁범죄 기록이나 체험 공개에 일본인들이 매우 인색하다는 통념에 비해 <인간의 조건>은 그와 관련된 묘사들이 매우 사실적이고 풍성하다. 적어도 <인간의 조건>이 출간된 패전 직후의 일본 사회 분위기는 지금과 달랐거나, '픽션'이라는 안전장치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어디까지나 픽션임을 작가는 강조했지만, 배경 설정과 사건 전개가 작가의 실체험과 겹치는 부분이 많아, 픽션이라는 장치를 이용한 일본 파시즘 체제의 추악한 이면 고발 논픽션이라는 느낌조차 주는데, 그런 면이 감동을 배가시키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난 어떤 한 국면에서의 인간의 조건을 궁구하고 싶다는 실로 터무니없는 계획을 세웠다"로 시작하는 서문에서 고미카와는 이런 말을 한다.

"이 이야기는 시간적인 배경을 전쟁에 두고 있지만 역사가 만약 어느 정도 되풀이되는 것이라면 우리들처럼 전쟁을 겪은 세대가 맛본 쓴 즙은 전후 세대와도 무관하지 않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가 앞 세대의 유산으로서 그 전쟁을 고통과 절망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 했던 사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또 다시 염려스러운 유산 상속의 유언이 이루어지려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이들이 조금이라도 그런 공감을 할 수 있다면 나의 바람은 거의 다 이루어지는 셈이다."

 
고미카와는 이 대목에서 전후 일본이 벌써 패전의 교훈을 망각하고 같은 잘못을 되풀이할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 가지의 끈질긴 사투를 통해 고미카와가 그리려고 했던 것은 파시즘적 유산의 추악한 본질 폭로와 청산, 전후 재건의 주역이 될 탈 파시즘적 유형의 새로운 인간 창출이 아니었을까. 이 글을 쓴 1955년은 한국전쟁 특수로 일본이 재건의 기지개를 켜면서 패전 직후의 절망적 공황 상태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때다. 패전 뒤 불과 10년. 이미 그 시점에서 고미카와는 전후 일본의 국가 진로에서 이상 조짐을 간파한 것일까.

 
그가 그걸 자각한 시기는 더 빠를 수도 있겠다. <인간의 조건>의 무대는 일제 패전까지이지만, 이후 미군 점령 시대와 한국전쟁 직후까지 전후 일본 재건의 주역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은 일제 대본영 파시즘 체제에 저항했던 주인공 가지와 같은 유형의 인간들이 아니었다. 주역의 자리를 꿰찬 것은 소련군 진격 앞에 반격다운 반격 한 번 하지 못한 채 일패도지한 관동군 장교들과 같은 구체제의 적자들이었다. 그들은 패전이 임박한 순간 수십만 사병들과 민간인들을 사지에 내팽개친 채 가장 먼저 자신들의 피붙이를 비롯한 일족들과 재산을 챙겨 본국으로 줄행랑을 놓았고, 소련군 포로로 잡혀 가서도 승자들과 담합해 사병들 위에 군림하는 기회주의자들이었다. 가지와 미치코가 겪어야 했던 고난도 바로 그 부패하고 무능한 자들 때문이었는데, 전쟁과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할 그들이 패전 직후 청산되기는커녕 다시 일본 사회의 주역으로 약삭빠르게 복귀했다는 사실을 우리 역시 알고 있다.


 

▲ 영화 <인간의 조건> 1부 순정편 중.


미 점령군에 재빠르게 빌붙은 그들에 대한 파시즘 체제 피해 대중들의 불신과 원망, 저항은 한국전쟁 특수와 함께 시작된 일본의 고도경제성장의 '기적'과 더불어 이미 꺾이기 시작한 것일까. 아베 신조 정권에 이르는 전후 일본의 '잘못된' 궤적은 그때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버린 게 아닐까. 이런 점이 <인간의 조건>의 현재적 의미를 더욱 강화시켜 주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조건>에서 가장 충격적인 묘사 중의 하나는 제2권에 나오는 왕시양리의 수기다. 왕시양리는 라오후링 광업소 관할 관동군 헌병대가 광업소에 관리를 떠넘긴 600명에 가까운 '특수 광부'들 중의 한 사람으로, 그들 집단의 지도자다. 특수 광부란 관동군이 저항의 씨를 말리고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공비'·'비적' 또는 항일분자 소탕 명목을 내걸고 점령지역 일대의 중국·만주인 마을들을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불태운 뒤 끌고 가 '전쟁 포로'로 만들어버린 민간인 성인 남성들이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은 10대 어린 소녀들을 포함한 부녀자들을 마음대로 겁탈하고 폭행한 뒤 잔혹하게 죽였다. 일본군은 자신들의 그런 악행의 흔적을 없애버리기 위해 더욱 악랄한 짓을 했다. 써먹을 수 있는 노동력 외에 모든 것을 말살해버렸다. 보는 대로 다 죽이고, 다 태우고, 다 빼앗는다 는 이른바 '삼광작전'의 처참한 실례가 대학 조교수였던 왕시양리의 17살 약혼녀와 그 가족 등의 수난을 통해 구체적으로 묘사돼 있다.


15쪽도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짧지만, 그 수기의 인용이라는 이례적인 형식은 일본 제국주의와 관동군이 조선과 만주, 중국대륙을 어떻게 침략하고 유린했는지, 그 씻을 수 없는 끔찍한 죄악상이 어떠했는지를 압축적·상징적으로 보여주려고 고안해낸 장치 같다. 그것은 비국민이나 매국노로 매도당하기 십상인 가지 등의 집요한 제국 일본 파시즘 체제 비판의 정당성을 강화해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1만 여 명의 중국·만주인들이 혹사당하는 라오후링 탄광소의 비참을 통해 생생하게 드러나지만, <인간의 조건>이 보여주는 주요 갈등 구조 중의 하나가 바로 우월한 '지배민족' 일본인과 중국·만주인 등 타민족간의 민족 모순이다. 사실상 관동군과 일본 대본영 파견 관리들이 통치한 괴뢰국가 만주국이 내걸었던 일본인과 한족, 조선인, 만주인, 몽골인의 '5족 협화'는 일본의 차별적 민족주의를 떠받치기 위해 날조된 허구였다. 노동조건과 임금 수준, 일상적인 삶의 수준에서 일본인은 단지 지배민족이란 이유만으로 압도적 우위를 차지했고 나머지 민족들은 철저히 서열화 돼 열등인종 취급을 당했다.

▲ 영화 <인간의 조건> 제1부~6부.

이 소설에서 조선인들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조선은 장명찬이라는 음흉한 광부 빼돌리기 밀거래업자, 혹은 만주인 마을과는 다르지만 일본 패잔병들이 신뢰할 수 없고, 그렇다고 그들에 완전히 적대적이지도 않는 조선인 마을처럼 애매하고 미약한 존재로 등장한다. 일본인과 중국·만주인 사이에 낀 조선인들은 존재감이 없다. 일본인들에게 그들은 상황에 따라 친중국적 존재나 친일본적 존재라는 양극을 왔다 갔다 할 뿐 자기 고유의 자리가 없는 존재다.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서,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제6권 75쪽에 나오는 간도지역 묘사가 그나마 의미심장하지만 딱 한 줄에 그친다. 소련군에게 완패한 일본군 패잔병들이 살 길을 찾아 남만주로 탈출하는 장면에서 주인공 가지는 간도지방으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며 이런 말을 한다. "무사히 넘어간다 해도 지엔따오 성(간도성)이야. 전쟁 중일 때도 항일지역이었던 곳이라고. 그걸 각오하고 가겠다면 모르겠지만."

 
작가 자신의 현지 체험을 바탕으로 쓴 이 소설의 이런 묘사는 조선 사람들이 많이 거주했고 그들이 항일저항 운동을 주도했던 당시 간도지역이 간도 특설대 등을 앞세운 관동군의 끊임없는 '토벌·소탕'에도 불구하고 일제 패전 때까지 일본인에겐 위험한 저항지대로 남아 있었음을 보여준다.
 
소설이 자전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은 고미카와의 실제 삶의 궤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는 1916년 만주 랴오둥 다롄만의 한 어촌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그곳에서 다닌 뒤 1933년 만철 장학생으로 도쿄 상과대(지금의 히토쓰바시대학교) 예과에 들어갔다가 이듬해에 자퇴한다. 문학에 심취했던 그는 1936년 다시 도쿄 외국어대학교 영어부 문과에 들어갔다. 그 다음해에 일본군의 중국 본토 침공으로 중일전쟁이 시작됐고, 또 그 다음해인 1938년 도쿄 외대생 고미카와는 독서 동아리 연구회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특별고등경찰(특고)이 검거한 공산주의 학생 조직 사건에 연루돼 고문을 당했다.

 
그리고 아마도 진보(좌파)적 반전주의 청년이 발붙이기 어려운 전시동원 체제하의 군국 일본을 혐오하고 나름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서였겠지만, 만주로 다시 간 그는 1940년 그곳 거대 군수회사 쇼와제강소(昭和製鋼所)에 취업한다. "이때가 생활상의 필요와 감상적 휴머니즘을 유착시켜서 자기 존재의 정당화와 합리화를 위한 궤변적 조작이 시작되는 시기다."

▲ 만주의 쇼와제강소.


1943년 가을, 산하 광업소 노무관리에 종사하면서 탄광의 악인들인 일본인 현장감독과 관동군 헌병대 중사의 농간으로 '특수 광부'들을 일본도로 처형하는 자리에 입회했다가 저항한 뒤 군에 끌려간다. 그가 탄광소 노무관리로 간 것은, 그의 노무관리 능력을 높이 산 본사 채광부장이 채광 효율을 높여주면 군 소집 면제를 보장해주겠다는 제안을 그가 수용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결정이 결국 자신을 파시스트들의 '양치기 개'로 전락시키는 것이고, 미치코와의 사내 결혼 허용도 양치기 개를 효과적으로 부려먹기 위한 계산된 선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자각하면서도 그는 적극적 저항을 포기하고 그 길을 택한다.


소설 속 묘사까지 감안해 유추해 보면, 그곳 피지배 노동자들의 인간적 대우를 통해 생산성을 높이려던 휴머니스트 가지의 계획, 그의 그런 선택을 그나마 합리화시켜 준 그 계획은 실제 효과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특수 광부들의 집단 탈출을 계기로 민족적 우월의식에 절은 현장 하급관리들과 헌병대의 눈 밖에 나면서 모진 고문과 함께 허사가 되고 만다. 소집 면제는 취소되고 그는 군대로 끌려간다.

 
그 뒤 그는 일제 패전 때까지 약 2년간 동북부 소만 국경지역 부대를 떠도는 나이든 보충병으로 초년병 교육 조수 노릇을 하다가 일제의 무조건 항복 이틀 전인 8월 13일 소련군의 진격으로 소속 부대원 158명이 4명만 빼고 몰사당한 가운데 살아남는다. 그리고 포로가 됐다가 1948년 생환한다.

 
<인간의 조건> 사건들의 기본 줄기가 고미카와의 이런 실제 삶의 궤적을 따라 흘러간다. 주요 에피소드들도 소설에 그대로 녹아 있다. 소설의 또 다른 기둥인 군대 내부의 장교와 사병 간 모순, 사병 내의 고참병들과 신병들 간의 모순, 악인과 선인들 간의 모순과 처절한 갈등 구조 역시 지은이의 실제 체험을 토대로 한 것으로 보인다.

 
보도나 문학작품, 피해자들의 폭로 등을 통해 많이 알려진 한국 군대와 병영생활 문제들의 원형이 바로 옛 군국시대 일본군 문제이며, 한국군 내무반 생활 비리가 옛 일본군이 안고 있던 악폐의 복제품이라는 걸 <인간의 조건>의 적나라한 묘사들이 실감나게 보여준다. 어쩌면 그리도 닮은꼴인지.

 
<인간의 조건>에서 묘사되는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의 충돌과 갈등, 사투는 민족 간 모순보다 일본군, 일본기업 등 일본 내부 모순에 집중된다. "침략당한 민족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불충분한 점이 많지만, 전쟁의 한복판에서 '인간의 조건'을 일본인 스스로 자문한 작품"이라는 점을 높이 산 서경식 교수의 평도 그런 면과 연관이 없지 않을 것이다.

 
왕시양리와 만주인 저항조직 또는 팔로군 얘기를 좀 더 밀고 나가 가지와 그 주변의 사투와 엮었다면 이야기가 좀 더 깊고 넓게 전개될 수 있지 않았을까. 소련군과 소비에트 혁명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호의, 일부 동료들의 투항, 그리고 전투 패배 뒤의 실망과 스탈린주의에 대한 엇갈리는 시선 등은 본격적인 냉전 개시 전후의 소련과 사회주의를 바라보는 일본 지식인의 과도기적 사유의 단면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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