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고통의 문제를 견뎌야 하네.
동양에서는 고통을 버림으로써 없애려고 하네.
서양인은 약물로 고통을 억누르려 하네만,
고통은 극복해야 하는 것이며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견뎌내는 것이라네.
-칼 구스타프 융, 빅터 화이트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로마는 참 이상한 장소다. 여행에서 겪는 가장 끔찍한 기억과 가장 아름다운 기억이 아무렇지 않게 뒤섞여버리는 곳이다. 그래서 결국 아름다운 기억이 나쁜 기억마저 꿀꺽, 잡아먹어버린다.
로마에 세 번 방문할 때마다 조금씩 로마의 인심은 각박해졌다. 물가는 끊임없이 오르고, 사람들의 표정은 점점 무표정해졌으며, 관광객들을 상대로 한 경범죄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세 번째 방문에서는 대낮에 큰길가에서 소매치기를 당했다가 소매치기와 치열한 실랑이 끝에 다시 지갑을 되찾기도 했다. 내가 2인조 소매치기에게 대들며 와락 비명을 지르자 다행히도 옆에서 보고 있던 시민들이 그들을 쫓아내주었다. "어디서 왔냐, 한국에서 왔냐, 나도 싸이를 안다, 케이 팝도 안다"는 식으로 접근해 허접스러운 팔찌를 채워주고 돈을 갈취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정말 이상하다. 기회가 된다면 또 다시 로마를 방문하고 싶다.
내가 정말 이상한 사람일까. 로마에 갈 때마다 불쾌한 일이 생기지만, 그래도 나는 로마가 턱없이 그립다. 우리가 '유럽스럽다’고 믿는 모든 것들이 로마에 있으며, 유럽의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가 가장 역동적으로 소용돌이치는 곳 또한 로마가 아닐까 싶다.
로마의 상징 중 하나인 스페인 광장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이게 웬 난리법석인가' 싶었다. 발 디딜 틈 없이 몰려 있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그곳은 처음에 공간의 동선 파악조차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인파를 간신히 뚫고 힘겹게 스페인 광장 계단에 철퍼덕 주저앉으면, 그때부터 신기하게 스멀스멀 행복의 기운이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쏟아지는 햇살 아래 선글라스를 무기처럼 착용한 사람들이 서로의 옆모습을 선글라스 틈새로 흘깃거리며 '도대체 이게 왜 좋단 말인가'를 고민하는 기색이 느껴진다. 그리고는 머지않아 흐뭇이 미소가 터진다. 이렇게 전 세계에서 몰려든 아무 규칙 없는 군중들이 모여 서로를 바라보고, 가장 북적이는 번화가를 구경하며, 형형색색의 젤라또를 야금야금 핥아먹으며, 이상하게도 걱정거리가 서서히 잊혀버린다. 나는 이곳에서 철없고, 걱정 없고, 슬픔 없는 어린아이의 상태로 회귀해버렸다.
로마에서 나는 처음으로 '객고(客苦)'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버렸다. 나그네의 고통, 객고. 사전을 찾아보면 '타지에서 고생을 겪음, 쓸데없는 고생을 하다'라는 의미가 튀어나온다. 그런데 '쓸데없는 고생'이란 말은 틀린 것 같다. 객고(客苦)가 없다면, 객수(客愁)도 없다. 객수는 낯선 곳에서 느끼는 쓸쓸한 마음이라는데, 마음에 찬 바람이 불쑥 파고드는 듯한 이 쓰라린 기분이야말로 여행의 기묘한 중독성을 가미하는 최고의 양념인 것 같다. 객고가 없다면, 객수가 없다면, 여행자의 행복도 없다. 내게는 그랬다.
콜로세움 근처에서 바라본 로마의 풍경들. 입장료를 내지 않고 근처를 서성이는 '나그네의 여행법'이 빛을 발하는 순간들이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도 물론 좋지만, 몇 년 전에 들어갔을 때보다 부쩍 오른 입장료를 보니 왠지 심술이 났다. '여행자들이 봉인가? 로마는 이런 식으로 멀리서 온 여행자들에게 받는 입장료와 시티택스로 돈을 벌겠다는 것인가?' 또 한 번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12유로라는 턱없이 오른 입장료는 순순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 색다르게,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 근처를 발이 아플 때까지 하염없이 걸어 다녔다. 그때보다 더 오래, 그때보다 더 열심히, 그때보다 더 깊고 넓은 로마를 발견할 수 있었다. 로마는 이렇게 '싫은 것'과 '좋은 것'이 마치 처음부터 한 몸인 듯 나란히 섞여 있다. 그래서 결국 미워할 수 없는 장소가 되어버린다.
가끔은 여행사에서 모든 스케줄을 철저히 관리해주는 편안한 패키지여행을 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도 있지만, 그래도 내가 모든 계획을 짜고 모든 변수를 다 감당해야하는 배낭여행을 택하는 이유는 '객고'에 담긴 진정한 여행의 의미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객고라는 성장통이 없다면, 방랑자의 설움을 느껴보지 못한다면, 여행의 기쁨조차 제대로 느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거기 그냥 완벽한 여행의 밥상이 차려져 있고, 나는 설렘이라는 이름의 숟가락만 달랑 들고 남이 차린 밥상을 떠먹기만 하는 여행은 편안하지만 재미가 없다.
예전에는 '객고'라는 말의 의미를 잘 몰랐다. 그런데 10년 동안 유럽여행을 하면서 느낀 점은 '객고'가 없다면 여행의 아름다움도 느끼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아직 유럽여행을 하지 않았을 때, 나는 어떻게든 갈 수만 있다면 유럽은 그저 '마냥 좋을 것'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여행을 해보니 힘들고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매번 내 부족한 외국어 실력을 탓해야 했고, 길치에다가 방향치인 지라 천지분간을 못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어울리지 않게 예민한 성격 때문에 걸핏하면 마음의 상처를 입기도 했다. 길을 걷다가도 '내가 왜 이 고생을 자초했을까' 자문해보며 내 발등을 찍기도 한다.
스스로를 객관화해서 볼 때, 여행의 고통이 49퍼센트 정도라면, 여행의 기쁨은 51퍼센트였다. 하지만 천신만고 끝에 돌아와서는 늘 '더없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일까. 왜 이렇게 감정의 문제에 있어서는 늘 산술적인 계산이 맞지 않는 것일까. 기쁨 51퍼센트에서 고통 49퍼센트를 뺀 바로 그 나머지. 2퍼센트의 차이가 여행의 모든 것을 바꾼 것이었다. 그 2퍼센트의 차이는 그냥 내 나라에서 편안하게 늘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로마에 갈 때마다 별의별 고생스러운 에피소드가 하루에도 몇 번씩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로마를 계속 그리워하련다. 진짜 로마는 어쩌면 지상에서 가장 화려한 왕국을 건설했던 고색창연한 옛 도시를 향한, 우리들의 뿌리 깊은 그리움 안에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