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월세와 공과금 70만 원을 봉투에 넣은 뒤 죄송하다는 글을 남기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분의 명복을 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이하 협정) 이행 3년 차에 접어든 지금, 이 협정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평가하고 싶다. 그 까닭은 협정은 흘러간 과거도, 이미 완성된 현재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 내부에는 미래를 통제하는 시간표가 장착되어 있다. 예를 들면 발효 2년 안에 개인 금융 정보를 미국에 보내어 처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발효 3년 안에 미국에만 있는 ‘의약품 허가-특허 연계 제도’를 시행해야만 한다. 이행 5년 차가 되면 미국산 냉장 오렌지 주스에, 그리고 15년 차가 되면 미국산 담배와 쇠고기에 관세를 매겨서는 안 된다. 우리의 삶이 미래로 이어지는 한, 이 협정의 문제를 회피할 수는 없다.
나는 2006년에 낸 <한미 FTA 마지노선>에서 기업이 국가의 공공 정책에 대항해서 세계은행 산하 기관의 국제중재에 정부와 국회와 법원을 끌고 가는 ‘국제중재 회부제’를 협정에 넣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계속 이 협정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7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의 경제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이 협정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5회에 걸친 평가에서 나는 그 이유를 제시할 것이다. 견해가 다른 분들의 비판을 기대한다.
수출 증가가 목적?…“왜 미국이 세금 더 붙여도 가만있나”
먼저 왜 협정은 경제 민주화의 문제인가? 여기 작은 도표를 소개하고 싶다. 아래 표는 A국과 B국의 대 미국 수출액이다. (자료 산업통상자원부. 엔 달러 환율 102.7엔 기준) 그런데 두 나라 중 한 나라는 미국과 협정을 체결했고 다른 나라는 미체결국이다. 표를 보자. 미국과 협정을 한 나라는 A일까, B일까? 2012년 3월 15일(협정 발효일)을 기준으로 비교하면 A가 B보다 대미 수출 증가율이 더 높다. A와 B의 대미 수출액의 차이는 더 벌어졌다. A는 과거 대미 수출이 감소했다가 다시 상승으로 반전한 반면 B는 과거의 대미 수출 증가 추세를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표에서 미국과 협정을 체결한 나라는 A(일본)가 아니라 B(한국)이다. 나는 이 작은 표를 내세워 협정의 경제적 효과가 보잘것 없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표에서 알다시피 협정의 경제적 효과를 사후에 검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며, 노무현 정부가 협정을 추진하고 이명박 정부가 이를 더 악화시켜 추진한 것은 수출을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수출을 늘리는 것이 협정의 최고의 목적이었다면 왜 한국은 협정 이후 오히려 더 자국의 산업에 편향되어 한국 기업에 상계 관세를 부과하는 미국에 강력히 항의하지 않았는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애플에 편향되어 거부권을 행사하였을 때에 한국 정부는 무엇을 하였는가?
유감스럽게도 노무현 정부가 협정을 추진하겠다고 결심하게 된 구체적 계기가 무엇이었는지는 더 이상 알 길이 없다.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독대하여 협정 추진을 결심하게 하였다는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은 <김현종 한미 FTA를 말하다>는 책에서 2003년에 일본과 FTA가 성사될 경우 ‘까딱하면 제 2의 한일합방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빈틈없는 로드맵을 만들어 대통령에게 보고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강하게 들었다’고 썼다.(30쪽) 그러나 지금 박근혜 정부는 환태평양 동반자 협정(TPP)을 통해 일본과 FTA를 체결하겠다고 사실상 선언했다.
한미FTA가 만든 우리 '안'의 전쟁터
왜 협정은 한국에서 2012년 3월 15일 발효되었을까? 나는 지난 7년의 경험을 통해 이렇게 평가한다. 1997년의 세계통화기금(IMF) 사태를 계기로 한국에 형성된 신자유주의가, 헌법 제119조의 경제 민주화 조항으로 상징되는 1987년 민주화 대투쟁 체제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협정을 추진하였다.
협정은 헌법의 경제 민주화 조항을 폐지하기 위하여 한국에서 발효되었다. 협정의 최종 목적지는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다. 그리고 마침내 생명을 얻게 된 협정은 지난 2년간 한국의 경제 민주화 규제를 심각하게 손상하고 있다. 그리고 외환위기 사태(IMF 사태) 이후 도래한 신 빈곤 시대를 더욱 비정하게 악화시키고 있다.
그 대표적 사례를 제시하면서 첫 회 글을 마치려고 한다. 국민의 다수는 철도 민영화를 반대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이미 현행 철도산업발전기본법에 규정되어 있다. 법은 2003년의 노무현 정부의 철도 민영화 포기와 공사화 추진에 따라 아래와 같이 국가 건설 철도의 철도공사 운영 전담 원칙을 규정하고 있다. 즉 옛 철도청이 운영하도록 되어 있는 노선은 철도청에서 공사로 전환한 철도공사가 운영해야 한단 것이다.
<철도산업발전기본법> 제21조 (철도운영)
③ 국가는 철도운영 관련 사업을 효율적으로 경영하기 위하여 철도청 및 철도고속철도건설공단의 관련 조직을 전환하여 특별법에 의하여 한국철도공사(이하 “철도공사”라 한다)를 설립한다.
그리고 한국철도공사 설립 이후 처음으로 마련된 정부의 제1차 철도산업발전 기본계획(2006~2010년)에서도 “기존 철도청을 공사 체제로 전환하여 철도 영업을 전담토록 하고, 철도 시설은 국가가 소유하며 안정적으로 투자”한다고 명시하여, 철도공사가 철도 영업을 전담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국의 국내법은 국가 건설 철도에 대해선 한국 철도공사의 전담권을 규정하고 있으나, 협정은 국내법을 위반하여, ‘한국철도공사만이 2005년 6월 30일 이전에 건설된 철도 노선의 운송 서비스를 공급할 수 있다(부속서 I)’고 규정해 버렸다. 그래서 국가 건설 철도라고 하더라도 이른바 신규 노선, 즉 2005년 6월 30일 후에 건설된 노선에 대해서는 한국 철도공사의 전담권을 일방적으로 배제하고 철도 민영화가 가능하도록 했다.
협정이 발효 2주년이 다가오는 지금 새누리당은 수서발 KTX가 협정에서 민영화가 가능하게끔 정한 신규 노선이라며 철도 민영화 방지법은 협정에 위반되므로 입법이 불가능하고 강변하고 있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올해 타결된 한-호주 자유무역협정은 아예 한국 철도공사의 전담권을 모두 삭제해 버렸다. 그리고 한국인 소유 법인이면 위 노선에 대해서도 운송 사업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협정의 주된 전쟁터는 미국 시장이 아니라 한국 내부이다. 협정은 경제 헌법의 경제 민주화 조항을 폐지하기 위해 발효되었다. 그러므로 경제 민주화를 위해선 협정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국가 건설 철도에 대해서는 철도 공사의 전담권을 규정한 국내법과 어긋나는 협정의 철도 운송 조항을 국내법에 맞게 고쳐야 한다. 다음 제2회에서는 협정이 지난 2년간 한국의 경제 민주화 규제를 어떻게 좌절시켰고 앞으로 어떻게 한국의 제도를 변경할 것인지를 통해 이 문제를 더 고찰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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