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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불가능의 시대, 당신은 진정 '저자'가 되길 바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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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불가능의 시대, 당신은 진정 '저자'가 되길 바라는가?

[프레시안 books] 클리퍼드 기어츠의 <저자로서의 인류학자>

다른 사회에서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한국은 유독 '현장'을 강조한다. 활동가들은 '현장에 와 봐야한다', '나는 현장 체질이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교사들을 만나면 그들은 교사가 아닌 사람들은 '현장을 모른다'는 말을 즐겨 반복한다. 그럴 때마다 '현장'에 있다고 해서 그 현장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 더 근본적으로는 현장에 '있다'고 해서 '현장'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를 물어보곤 하지만 사람들은 현장에 '있는 것'이 곧 '현장'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확실히 한국에서 '현장'이라는 단어는 어떤 말하기와 글쓰기에 자동적으로 권위를 부여할 수 있는 말, 즉 배제하거나 차별화하는 권력적인 말로 사용된다.

▲ <저자로서의 인류학자>(클리퍼드 기어츠 지음, 김병화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클리퍼드 기어츠가 <저자로서의 인류학자>(김병화 옮김, 문학동네 펴냄)에서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이 이것이다. 현장연구를 중심으로 담론을 생산하는 인류학에서 인류학자는 자신이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의 문제를 만난다. 그곳에 있었다는 그 물리적 사실은 내가 그곳에 대해 쓰는 글에 대해 아무것도 보증해주는 것이 없다. 그 곳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나는 다르게 보았다고 말하는 순간 내가 본 것의 사실성은 무너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곳에 있었다는 것이 명백해지기 위해서 현장연구자는 "자기들이 본 것을 우리도 보고, 자기들이 느낀 것을 우리도 느끼며, 자기들이 내린 결론을 우리도 내릴 것이라고 설득"(28쪽)해야만 한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이후의 조사와 연구에 의해 현장연구자가 세운 가설이나 이론, 심지어는 기술이 뒤집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그 무너진 이론과 증거들을 읽고 거기 쓰인 대로 그랬을 것이라고 믿거나 혹은 그 속의 의미를 받아들인다. "한때 대단한 위상을 차지했던 말리노프스키의 이론적 장치는 대부분 무너졌지만 그는 여전히 최고의 민족지학자로 인정받고"(14쪽) 있으며 누구도 민족성이라는 것을 중요한 범주로 활용하지 않지만 일본인에 대한 베네딕트의 연구는 여전히 중요한 참조점이 되고 있다. 내가 그곳에서 보고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라도 하더라도, 그 텍스트는 여전히 중요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현장에 있다는 것이 자동적으로 그의 글에 사실성을 부여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내 주장의 사실성이 무너졌다고 해서 현장연구자의 말과 글이 모래처럼 무너지는 것도, 나의 '저자됨'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중요한 것은 '저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로서 글을 쓰는 것이다. 저자라니, 글을 쓰는 사람이 곧 저자가 아닌가? 다른 무슨 저자가 있다는 말인가?

이 책에서 기어츠가 공을 들여 설명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내가 수집하고 연구하고 주장한 그 모든 것이 무너진다고 하더라도 글을 쓰고 말을 하는 나는 어떻게 '저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저자가 될 경우에 비로소 나는 그곳에 있었던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곳에 있었던 것은 자동으로 주어지는 사실이 아니라 성취되는 것이다. "저자로서 '그곳에 있기 Being There'는 책장마다 저자 자신의 존재를 강하게 드러내는, 어떤 면에서는 개인적으로 '그곳에 있기'를 성취하기 위한 힘겨운 묘책"(35쪽)이 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저자로서 그곳에 있지 않는다면 그곳에 있기는 성취되지 않는다. 따라서 현장을 모른다는 말이야말로 현장을 모르는 말이다. 저자로서 현장에 있을 때에만 현장은 현장이 된다.

그렇다면 저자란 무엇인가? 기어츠는 저자를 설명하기 위해 바르트와 푸코를 끌어온다. 바르트는 저자와 작가를 구분했다. "저자는 기능을 수행하고 작가는 활동을 한다"(30쪽)고 말한다. 전자는 '담론성의 창시자'이고 후자는 '텍스트의 제작자'다. 담론성의 창시자란 "자신들의 저작뿐 아니라 자신의 저작을 펴내는 과정에서 뭔가 다른 것, 즉 다른 텍스트의 형성 가능성과 규칙도 만들어낸 사람들"(30쪽)이다. 그를 통해 그들이 수행하는 것은 한 텍스트가 아니라 "담론의 무한한 가능성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레비스트로스라는 이름은 "특정한 작품들뿐 아니라 인류학적인 것을 대하는 방식 전체"(31쪽)가 되는 것 같은 걸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저자란 희귀한 존재들이며, 저자가 희귀한 만큼 글쓰기란 대단히 희박하게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되어 글을 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힘든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기어츠는 4명의 인류학 '대가'들을 저자와 글쓰기의 사례로 불러들인다.(사실 책을 끝까지 읽어보면 4명이 아니라 한 명이 더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기어츠 자신이다. 기어츠가 인류학에서 또 한 명의 저자라는 것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기어츠 자신도 부인하지 않는데 말이다.) 이것을 그들이 수집한 정보와 사실, 그리고 그 이론에 초점을 맞추지 않기 위해 대체적으로 이 4명의 대가들이 쓴 일기나 다른 잡다한 기록들을 가지고 '그곳에 있기'를 '글쓰기'의 문제로 바라본다. "정확한 시선이나 개념의 정밀성 여부"가 아니라 "그들이 실제로 다른 삶에 침투해보았고 이런저런 방식으로 실제 '그곳에 있어본' 결과라고 믿게 만드는 능력"이 더 중요한데, 바로 이 지점에서 글쓰기가 등장하는 것이다.

▲ <슬픈 열대>(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 박옥줄 옮김, 한길사 펴냄). ⓒ한길사
기어츠가 거론하는 4명의 저자 중에서 레비스트로스의 사례를 살펴보자. 먼저 구조주의의 대부 레비스트로스가 있다. 구조주의는 "인류학의 주제보다는 인류학 자체의 의미를 수정"(39쪽)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기어츠는 여기서 레비스트로스가 끼친 공헌은 아마존이든 어디를 뒤져서 건진 "이상야릇한 사실, 또는 그보다 더 이상한 설명"이 아니라 "수사학적 업적"이라는 놀라운 주장을 한다. 그가 수사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민족지학적으로 수집된 "사실을 보여주고 설명틀을 잡기 위해 그가 발명해낸 담론양식"(40쪽)을 말한다. 그리고 기어츠는 그런 사실을 보여주는 텍스트로 <슬픈 열대>를 선택한다.

<슬픈 열대>는 여행지이지만 동시에 민족지 기록이다. <슬픈 열대>는 "지독한 일들이 연달이 일어나는 여행 기록"이지만 동시에 민족지 기록으로서 "하나의 논지"(52쪽)를 펴고 있다. 그것이 "레비스트로스가 사반세기 넘게 추구해 온 것"인 "한 민족의 관심은 항상 특정한 양식에 따라 조화를 이루고, 그것들이 체계를 형성한다"(53쪽)는 내용이다. 그래서 기어츠가 보기에 <슬픈 열대>는 "고유명사로서의 구조주의를 매우 간명하게 표현"(53쪽)한 단 한권의 책이 된다. 이 책이 구조주의에 대한 고유명사인 한 이 책은 동시에 '철학책'이 된다. "서구 사상의 중심 주제인 인간 사회의 자연적 기초"(54쪽)를 다룬 철학 텍스트인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프로이트와 흄을 반박하고 싶어 했고 사회계약론이라는 루소의 모델을 영구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보여주며 그것을 재구축(55쪽)하고 싶어 했다. 재구축하고 싶었다는 것, 그것은 <슬픈 열대>가 철학책이기를 넘어 사회를 고발하는 개혁주의자의 텍스트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어츠는 <슬픈 열대>가 가진 이 복잡하고 다층적인 성격, 그 특징들이 상호작용한 효과가 '신화'이며 이 텍스트 전체를 아우르는 형식은 "성배 추적 이야기"라고 말한다. 인류학 저서로서의 <슬픈 열대>가 '이야기'가 되는 것이며 저자는 그 이야기의 '추적자'가 된다. 그를 통해 레비스트로스가 의도한 것은 "다중적인 텍스트 유형을 그 구조 자체가 주제의 한 가지 사례인 하나의 단일한 구조, 즉 신화논리학으로 묶어"내어 "사회생활의 기초를 드러내고 더 나아가 이른바 인간 존재의 토대를 드러내려는 것"(61쪽)이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왜 레비스트로스가 미국의 인류학자들의 주장하는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그곳에 있기'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62쪽)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실재에 도달하려면 먼저 경험을 거부"(62쪽)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미개인들'을 가장 잘 아는 길은 "개인적으로 친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적 표현들을 누비고 꿰매어 관계의 추상적 견본을 만드는 일"이며 이것은 "계시적인 절정의 경험"(63쪽)을 통해 생겨난다고 했다. 따라서 레비스트로스에게 있어서 '그곳에 있기'는 "그들 속에 개인적으로 투입되는 방식으로는 달성될 수 없으며", "그들의 문화적 생산물을 보편적으로 해석해 직접성을 해체"(64쪽)하는 방식으로 달성될 수 있다.

이 책에 연이어 등장하는 에번스프리처드와 말리로프스키, 그리고 베네딕트는 또 레비스트로스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저자로서 그곳에 있었던' 인류학자들이다. 에번스프리처드는 자신이 수집하고 경험한 자료들을 강렬하게 시각적으로 제시한다. 그는 "보는 사람의 시점에서의 화법"(86쪽)을 즐겨 구사하며 언어뿐 아니라 사진, 도표화 등을 통해 민족지를 조직한다.

기어츠는 이것을 "눈부신 명료함"(88쪽)이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그는 서구가 가지고 있는 제도적 장치, 즉 교회나 국가 등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서구가 진정한 인간생활의 기초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존재할 수 있는가를 다룬다. 그래서 그의 연구는 늘 "우리 문화에 있는 것이 다른 문화에는 없음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89쪽)한다고 말한다. 레비스트로스가 이것을 "공식적인 보편 질서 속에서" 찾는다면 그는 "다른 존재가 아니라 다르게 사는 존재"(90쪽)로 묘사하며 찾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대상의 삶의 형태를 정당화하는 동시에 자기 삶의 형태가 정당함을 입증"(90쪽)하는 일타이피의 글쓰기를 달성한다. 그들은 그들대로 "자기들의 장소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존재가 된다. (말리노프스키와 베네딕트에 대한 내용은 생략한다. 직접 책을 읽어보시기를.)

그러나 이런 저자가 되는 것이 지금 이 시대에도 가능한가?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인류학의 대가들이 작업하던 시대엔 "훨씬 더 판이한 대상들이 덜 긴밀하게 모여 있는 세계에서 작업"(182쪽)을 했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엔 흔히 현장이라고 지칭하는 '그곳'과 그 현장연구를 종이에 옮기고 토론하고 평가하는 '이곳'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해졌다. 이곳과 저(그)곳은 "훨씬 덜 고립되고 훨씬 불분명하고 훨씬 덜 대조적"이다. 물론 기어츠는 대조가 불분명하다는 것이 깊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말하지만 말이다.

공간 사이의 교섭이 증가한 것만이 아니다. 소위 '현장'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연구자들이 나타났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곳에서 비행기 타고 날아 온 사람이 그 문화에 대한 언어를 독점할 수 없게 됐다. 나는 아니요, 라고 말할 수 있는, 그것도 '저곳'의 언어가 아니라 '이곳'의 언어로 말할 수 있는 '현지인'이 생겼다. 연구자가 아니어도 된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에 대해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모니터링하고 평가할 수 있다. 현장연구의 의도와 과정, 윤리 등등에 대해서 저곳과 동떨어진 이곳에서 "전문가들만의 비밀스러운 분위기로 은폐되지 않고 공개적으로 논의되기 시작"(173)하면서 현장연구를 하는 사람은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대답해야만 하게 됐다. 글이든 무엇이든 문화 생산과 소비의 '국지성'이라는 것이 사라졌다.

이제 우리만 보는 그런 문화 생산과 글쓰기는 없다. 예를 들어보자. 작년에 개봉한 영화 <바람이 분다>가 좋은 예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물론 대가이고 그는 그 영화를 일본에서'만' 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영화를 한국에서'도' 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 영화가 일본에서'만' 개봉되었다면, 그리고 일본인들'만' 소비하였다면 관동대지진 장면은 문제적인 장면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영화를 한국인들'도' 봤다. 그리고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그 장면에서 관동대지진에 희생당한 한국인들의 이야기는 완벽히 제거되어 있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고, 그 영화가 문제적이라고 말했다.

▲ 애니메이션 <바람이 분다> 중.

나의 초점은 그래서 그 장면에 재일조선인이 등장했었어야하는가 마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이곳/저곳에 대한 이야기를 이곳에서 할 때 저곳에 있는, 혹은 이곳에 있었던 저곳 사람들도 그것에 대해 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이곳'을 위한 혹은 '이곳'에서의 글쓰기는 불가능해져버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야오뿐만 아니라 현장에 대해 글을 쓰는 모든 사람들이 부딪치는 문제다. 그래서 나는 누구를 지금 제외하고 있는지에 대해 긴장하지 않고서는 글을 쓸 수가 없다. 또한 역설적으로 내가 누구를 제외하고 있는지에 대해 긴장하다보면 역시 글을 쓸 수가 없다. 이래도 글을 쓸 수가 없고 저래도 글을 쓸 수가 없다. 기어츠가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현장연구가, 현장에서 글쓰기를 지배하는 감정은 "초조함"(165쪽)이다.

그 결과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기어츠가 말한 것처럼 "더 단순화할 수 없을 만큼 기이해진 것은 이제 타자가 아니라 문화 서술 그 자체"(168쪽)가 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저런 위험과 요구사항, 주의사항을 훑고 나면 현장연구자는 깨닫게 된다. "쓸 권리 자체가 위험에 처해"(167쪽)있다는 것을 말이다. 글쓰기 자체가 기이한 일이 되면서 '글'은 넘쳐나는데 '글'쓰기는 점차 불가능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 솔직하게 말하면, 현장연구라는 것 자체가 가능한 것인지를 질문해야할 지경이다. 이에 반해 과거의 대가들은 "자신들이 세운 기획의 정당화에 대한, 혹은 그것의 수행가능성 자체에 대한 공격"은 받지 않았다.

이런 문제점에서 기어츠는 다시 글쓰기의 가능성을 말한다. 그는 '인류학적 소명의 중요한 한 측면이 문학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위험을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류학 혹은 현장연구는 여전히 "어느 특정한 장소에 있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언어로 전달"(178쪽)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타인의 생활 형태를 대하는 한 집단의 의식"을 열고 "그 과정에서 그들 자신의 생활 형태도 개방적으로 보게"(178쪽)하는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드러내고자하는 그녀의 목소리와 관점을 "제대로 표현하는 일, 그녀의 시를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일, 그녀의 현실을 지각 가능하게 만드는 일, 그녀가 존재하는 문화적 틀을 밝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장연구자의 글쓰기란 "그것이 어떤 것인지 사람들이 얼마쯤은 이해할 수 있는 지면 안에서 그것들을 충분히 표현되도록 한다는 뜻"(181쪽)이다.

이것이 인류학의 문학적 측면이고 그 중요성이다. 현장연구가 언어로 이루어지는 구성물인 한에서 "실제의 번역이고 특정한 방식으로 표현된 생명력"(178쪽)이기 때문이다. 특정한 방식이라는 점에 주목하자. 그렇기에 현장연구자는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현장뿐만 아니라 자신의 '종이'에도 집중해야한다. 그 종이위에 나는 어떤 언어로, 어떤 문체로, 어떤 정조로 그 현장을 담아내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렇기에 현장연구자는 현장에 대해 섬세해야하는 만큼이나 자신의 글에 대해서도 섬세해야한다.

이 섬세함으로만 독자를 설득할 수 있다. 기어츠는 현장연구자의 글쓰기는 "'이곳에 있기'와 '그 곳에 있기'를 연결하는 작업이며 '기록된 장소'와 '기록된 대상' 사이의 공동 구역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구축하는 작업"(179쪽)이라 말한다. 무엇보다 이런 공동기반을 구축하여 이곳과 저곳을 연결하는 언어, 글 쓰는 현장연구자와 글을 읽는 독자를 연결하는 언어, 글을 읽는 독자와 글에 담겨 있는 저곳을 연결하는 언어를 만드는 것, 그것이 글쓰기다.

여전히 글쓰기는 공동의 세계를 창조하는, 점점 불가능하지만, 매혹적인, 더럽게 불가능하고 더럽게 매혹적인 일이다. "현장과 학계에서 새로운 것이 등장했으니, 종이 위에도 새로운 것이 나타나야 한다."(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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