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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지워진 사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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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지워진 사람들은…"

[인터뷰] <탐욕의 제국> 홍리경 감독

예쁘게 보이고 싶은 소녀들이었다. 방진복 사이로 눈만 내놓고서도, 누가 더 예쁘게 보이는지 기가 막히게 알아채는 그녀들이었다. 머리에 쓴 방진모가 하트 모양이 되면 기뻐했다. 투박한 방진복을 입고도 몸매가 예쁘게 보이기를 기대했다.

그녀들 가운데 많은 수는 여전히 공장에 있다. 또 누군가는 공장을 떠나서 다른 삶을 찾았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는 병에 걸렸다. 삼성전자 반도체 및 LCD공장에서 일했던 여성 노동자들 이야기다.

삼성 반도체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사망한 고(故) 황유미 씨와 그의 아버지 황상기 씨의 사연이 <또 하나의 약속>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많은 이들의 눈물샘을 터뜨렸다. <또 하나의 약속>은 삼성을 사실적으로 다뤘으되, 기본적으로는 픽션(허구)이다. ‘삼성’ 대신 ‘진성’, ‘황상기’ 대신 ‘한상구’가 등장한다.

이번에는 다큐멘터리다. 삼성전자 공장에서 일하다 병에 걸린 이들과 그 가족이 실명 그대로, 맨얼굴로 등장한다. 이들 피해자들과 함께 싸웠던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반올림) 활동가들도 마찬가지. 직업병 피해자가 삼성전자 인사담당 부사장을 만난 장면도 있다. 삼성전자 LCD 기흥공장에서 일하다 뇌종양에 걸려, 제대로 말하지도, 걷지도 못하게 된 한혜경 씨, 그의 어머니 김시녀 씨가 국회에서 삼성전자 최우수 부사장을 만났다. 한 씨와 김 씨 앞에서 최 부사장은 입을 꾹 다문 채 눈을 돌리기만 했다.

고(故) 황유미 씨의 기일인 6일 개봉하는 <탐욕의 제국> 속 장면들이다. ‘푸른영상’에서 활동하는 홍리경 감독이 이 다큐멘터리를 찍기 시작한 건 3년 전이다. 삼성전자 직업병 피해자들, 그리고 반올림 활동가들과 가족처럼 지내며 함께 울고 웃었다. 그 사이,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일하다 뇌종양에 걸려 사망한 고(故) 이윤정 씨다. 이 씨의 생명이 급격히 시들어 결국 세상을 떠나는 과정을, 홍 감독은 가족과 함께 지켜봤다. 직업병 피해자들이 보기에, 삼성전자 공장은 “끊임없이 사람을 지우는 공간”에 다름 아니었다. 이윤정 씨, 황유미 씨 등은 이렇게 지워진 70여 명 가운데 일부다.

홍 감독을 만났다. 지난 4일 오전, 서울 서교동 언론협동조합 프레시안 편집국에서 홍 감독과 나눈 이야기를 간추려 정리했다. <편집자>

▲ <탐욕의 제국> 홍리경 감독ⓒ프레시안(최형락)


"반도체 피해자 다큐가 상 받으니까, 삼성이 영화제 후원 끊었다"

프레시안 : <또 하나의 약속>에 이어 <탐욕의 제국>이 관객들을 만나게 됐다. 하나는 극영화고, 다른 하나는 다큐멘터리다. 그러나 삼성 백혈병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는 점은 마찬가지다. 삼성을 다룬 책이나 영화는 종종 외압 논란에 휘말린다. <탐욕의 제국> 역시 그랬다고 들었다. (☞관련 기사 : 삼성이 그렇게 무섭나?)

홍리경 :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진행하는 다큐멘터리 제작 지원 프로그램인 옥랑문화상을 받게 됐다. 제작 중이거나 기획단계인 작품에 대해 제작비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때가 2012년이었다. 우리는 2011년 4월부터 촬영을 시작했고, 당시엔 계속 촬영 중이었다. 영화제 측으로부터 1500만 원을 받았다. 그런데 그때, 삼성전자 관계자가 영화제 관계자를 만나자고 했다. 삼성전자는 그때까지 영화제 메인 스폰서였다. 영화제 관계자를 만난 자리에서 삼성전자 측이 <탐욕의 제국>이 어떤 영화인지 물어봤다고 했다. 그리고 더는 영화제에 후원할 수 없다는 뜻을 전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영화제 관계자에게 들었다.

실제로 이듬해인 2013년부터 영화제에 대한 삼성전자의 후원이 끊겼다. 2013년은, 내가 완성된 작품을 이 영화제에서 상영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관련 기사 : 삼성, 이번엔 <탐욕의 제국> 관련 외압 논란)

프레시안 : 언론시사회를 준비했는데 대형 상영관이 대관을 거부했다고 했다.

홍리경 : 정당한 돈을 내고 영화관을 빌리겠다는데, 그게 가로막혔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신청하면 별 무리 없이 대관하는 게 관례였다. 내부 회의에서 이 영화로는 대관 못한다고 결정했다는 말을 영화관 측으로부터 들었다. 다른 멀티플렉스 상영관도 대관할 수 없다는 뜻을 전했다. (☞관련 기사 : <또 하나의 약속>을 보며 <삼성을 생각한다>)

"피해자 가족, 활동가들에 대한 편견이 깨졌다"

프레시안 : ‘푸른영상’ 소속이다. <상계동 올림픽>, <행당동 사람들>, <송환> 등 사회성 짙은 작품을 만든 독립영화 단체다. 어떻게 들어가게 됐나?

▲ 홍리경 감독 ⓒ프레시안(최형락)
홍리경 :
중·고등학교 때부터 영화감독이 꿈이었다. 영화들도 가리지 않고 봤고, 영화 잡지도 많이 봤다. 그래서 독립영화계의 맏형 격인 김동원 감독도 알게 됐다. 푸른영상 설립자다. 그때는 내가 꼭 다큐멘터리 감독을 하겠다는 생각은 아니었고, 한국 영화 역사에서 중요한 감독이니까 김 감독의 작품을 찾아서 봤었다. 이후 프랑스에서 영화를 공부했는데, 그때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가운데 하나를 전공으로 택해야 했다. 나는 다큐멘터리를 전공했다. 그때부터 졸업 후엔 푸른영상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프레시안 : 삼성전자 직업병을 다룬 계기가 궁금하다.

홍리경 : 내가 푸른영상에 들어간 게 2010년 10월이다. 수습기간 거치고, 이듬해 첫 작업해야 할 시점이 됐다. 그때 사무실 선배 감독이 권한 주제가 삼성전자 직업병이었다. 원래는 그가 하고 싶었는데, 그는 진행 중인 다른 작업도 많아서 힘들겠다고 했다. 또 여성 피해자가 많다는 점 역시 내게 권한 이유다. 나 역시 여성이니까. 나도 따로 관심을 둔 주제가 있었던 게 아니어서, 제안을 받아들였다.

프레시안 : 직업병 피해자와 그 가족, 그리고 반올림 활동가들을 많이 만났겠다. 그들과 가족처럼 지냈다는 말도 들었다. 가까이서 본 그들은 어땠나.

홍리경 : 아픈 사람들,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 현장이라서 미리부터 걱정이 컸다. 그런데 예상과 달랐다. 막상 현장에 들어가 보니, 즐거운 순간이 더 많았다. 힘든 싸움 속에서도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활동가들에 대한 느낌도 예상과 달랐다. 나는 학생운동을 거친 세대가 아니다. 그래서 운동권에 대해 편견이 있었다. 활동가들은 몹시 냉철하면서 동시에 과격할 것이라는 편견이다. 그런데 막상 겪어보니 달랐다. 따뜻한 사람들이었고, 동시에 유연했다. 나와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다만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하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에게 카메라 들이대도 될까"

프레시안 : 다큐멘터리 찍는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가 언제였나?

▲ 홍리경 감독 ⓒ프레시안(최형락)
홍리경 :
병에 걸린 피해자들을 만나는 게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조심스러웠다. 아픈 사람들에게 적절치 않은 행동이나 말을 해서 그들에게 상처를 주게 될까 걱정스러웠다. 너무 조심하다보니 촬영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고(故) 이윤정 씨의 경우, 제가 처음 만났을 때는 뇌종양 진단 받고 수술하고 시한부 경고를 받은 상태였다. (삼성전자 반도체 온양공장에서 반도체 칩 테스트 업무를 맡았던 고 이윤정 씨는 퇴사 후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2년 동안의 투병 끝에, 지난 2012년 사망했다. 이 씨와 함께 삼성에 입사한 동료들 가운데도 희귀병 발병자가 나왔다. - 편집자)

그분은 카메라를 워낙 꺼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가족과 보내야 하는데, 취재에 응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촬영 허가를 얻기도 조심스러웠고, 허락을 얻은 뒤에도 카메라에 찍히는 걸 그가 불편해하지 않을까, 내가 그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망설여졌다. 그러다 더 친해지면 제대로 찍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상태가 악화됐다. (관련 기사 : '시한부 1년', 80년생 윤정씨에게 삼성반도체란… , "맨손으로 만진 반도체, 그리고 어린이날 시한부 선고")

처음 찍었던 장면을, 그때 다시 봤다. 내가 카메라를 들고 섰는데, 거리낌 없이 자기 이야기를 하더라. “남은 삶이 귀하다. 푸른 나뭇잎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다”라고 이야기하는 걸 뒤늦게 보면서, 그가 카메라 앞에서 할 말이 많았겠다고 느꼈다. 정작 찍는 사람이 너무 주저하는 바람에 해야 할 일을 못했던 거다. 무척 미안했다. 그런 때가 힘들었다. 찍어야 할 순간과 찍지 말아야 할 순간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해서 후회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

프레시안 : 이윤정 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 충격이 컸을 것 같다.

홍리경 : 막상 돌아가셨을 때보다는, 중간에 상태가 악화됐을 때가 더 충격이 컸다. 이윤정 씨에 대한 첫 기억은 방송사 시사프로그램 장면이었다. 항암 치료 때문에 온몸이 부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직접 만났을 때는 살이 빠져 있었고, 말도 자유롭게 했다. 당시 이미 의사로부터 1년 시한부 선고를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기적처럼 좋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기대가 있었다. 1년 더, 다시 1년 더, 이런 식으로 계속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두 달 만에 갑자기 상태가 악화됐다. 말을 하고 싶어 하는데, 말을 입으로 내뱉지 못했다. 거동도 할 수 없었고, 사람을 알아보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누워만 있었다. 그런 모습을 봤을 때, 충격이 컸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은 그 무렵부터 마음의 준비가 돼 있었던 것 같다. (☞고 이윤정 씨 빈소 현장 기사 : "저는 삼성이 미운데 아내가 용서하라더군요")

비 내리던 어두운 밤, 찬 바닥에서 울부짖던 그녀를 일어서게 한 한 마디

프레시안 : 미처 카메라에 담지 못했지만,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장면이 많을 것 같다.

▲ 홍리경 감독 ⓒ프레시안(최형락)
홍리경 :
반올림이 진행한 1차 행정소송에서 고(故) 황유미, 고(故) 이숙영 씨 측이 승소 판결을 받았다. 2011년 6월 23일이다. 그 뒤, 반올림 활동가들이 근로복지공단을 찾아가 농성했다. 공단 측이 항소하지 말라는 게 요구 사항이었다.

정애정 씨는 원고 가운데 한 명이었지만, 당시 재판에서 승소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정애정 씨도 공단 측이 항소하지 말 것을, 승소한 다른 피해자 가족과 함께 요구했다. 공단 1층에서 농성하던 황상기 씨와 정애정 씨가 막힌 걸 뚫고 5층 이사장실까지 올라갔다. 거기서 이사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2007년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故) 황유미 씨는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직업병 문제를 세상에 알린 첫 제보자였다. 황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는 삼성의 끈질긴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결국 행정소송에서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황유미 씨와 같은 곳에서 일하던 고(故) 이숙영 씨는 2006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정애정 씨는 고(故) 황민웅의 아내다. 정 씨와 황 씨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만나 결혼했다. 황 씨는 2004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편집자)

다른 활동가들이 내려오라고 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공단 직원들에게 끌려 내려왔다. 비가 내리던 어두운 밤이었는데, 정애정 씨는 공단 밖 계단 밑에 끌려 나와서 바닥에 주저앉아서 울부짖으면서 공단을 향해 뭔가 외쳤고, 황상기 씨는 공단 직원과 몸싸움하면서 다시 들어가게 해달라고 했다. 활동가들은 바리케이드 밖이어서 못 들어갔다.

정애정 씨가 계속 서럽게 우는 거였다. 나는 그때 카메라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애정 씨는 차가운 바닥에서 혼자 울부짖고 있는데, 그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내가 그때까지 봐왔던 정애정 씨는 씩씩하고 당찬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속으로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하는 걸 처음으로 느낀 장면이었다. (관련 기사 : "자식 잃은 부모 앞에서 삼성은 돈 이야기만 했죠" , "삼성에 노조가 있었다면 남편이 그렇게 죽었을까?" , "삼성이 사람을 참 독하게 만들어요")

그날 뒷문으로 몰래 들어가서 정애정 씨에게 다가갔다. “제발 일어나시라”고 거듭 말했지만 듣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이렇게 울다 지치면 못 싸우지 않느냐”고 했다. 그 말에 벌떡 일어나더라. 아무리 설득해도 일어나지 않던 사람이 말이다.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이 사람 편에 서서 내가 뭔가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들도 노동자인데…"

프레시안 : 고 이윤정 씨 영구차가 삼성 본관 앞을 지나려다 보안요원들에게 가로막히는 장면이 있다. 영구차가 지나간다고 삼성이 피해보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한때 같이 일했던 동료의 영구차 아닌가. 그런데 막는다. 대체 왜 그런 걸까. 관객 입장에선 궁금해진다.

홍리경 : 흔한 일이다. 삼성 본관 앞에서 하는 행사는 기자회견이건, 집회건 늘 가로막혀 있다. 피해자들이 일인시위 할 때면, 한 사람당 여러 명씩 보안 요원이 뒤에 따라 붙는다. 정애정 씨가 본관 앞에 매주 가서 일인시위를 하는데, 혼자 피켓 들고 서 있으면 뒤에 붙은 보안요원이 모욕적인 말을 하곤 했다.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말이었다. 몸을 바짝 밀착시켜서 치욕감을 느끼게 하는 일도 있었다. 아무리 삼성 측 보안요원이라지만,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프레시안 : 삼성 앞에서 열리는 기자회견이나 집회를 취재할 때면, 주변을 지나는 다른 삼성 직원들을 보게 된다. 대부분 무관심한 태도다. 이런 모습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나.

홍리경 : 사무직들은 대부분 남의 일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공장에서 일하다 직업병에 걸린 동료들에 대해 말이다. 생산직 역시 직업병 피해자들에 대해 운이 없어서 병에 걸렸는데, 회사 탓을 한다고 여기기도 한다. 공장에서 멀리 떨어진 삼성 본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이런 경향이 더 심할 게다. 그들도 노동자인데, 왜 그걸 부정할까. 마음이 답답해진다.

프레시안 : 삼성 직원 중에는 반도체 공장에서 위험한 약품을 만지는 이들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에서 일하는 이들도 있다. 후자는 전자에 대해 거리감을 느낀다. 하지만 아무리 편하게 일하는 사무직이라고 해도, 그들과 이건희 회장과의 거리가 그들과 직업병 피해자의 거리보다 가깝지는 않다. 이건희 회장과의 거리가 훨씬 멀다. 그런데 그들은 회장의 입장에 눈높이를 맞춘다. 답답한 일이다. “반도체 공장 직업병 피해자가 꼭 삼성에서만 나오는 건 아니지 않느냐, 왜 삼성만 탓하느냐”라고 타박하는 이들도 많다. 역시 삼성의 이익과 자기 입장을 동일시 한 경우다. 다큐멘터리 찍는 동안 이런 말 많이 들어봤을 것 같다.

홍리경 : 삼성과 대한민국을 동일시하는 사람이 워낙 많기 때문일 게다. 다른 문제를 다룰 때는 ‘왜 그것만 갖고 그래’라는 말을 잘 듣기 힘들다. 잘못이냐, 아니냐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유독 삼성을 다룰 때는 ‘왜 삼성만 갖고 그래’라는 말이 나온다. 중요한 건 삼성이 잘못을 했느냐, 안 했느냐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부차적인 취급을 받는다. 이상한 노릇이다. 게다가 나는 삼성만 이야기한 게 아니다. 내가 카메라에 담으려 했던 건 직업병 피해자다. 그런데 모든 피해자를 다룰 수는 없으니, 삼성 피해자를 취재했다. 이게 왜 잘못인가.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 앞에서 눈 돌리기 급급한 삼성 부사장

프레시안 : 한혜경 씨와 그의 어머니인 김시녀 씨가 국회에서 최우수 삼성전자 부사장과 마주친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최 부사장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계속 시선을 돌리기만 했다. 아마 직업병 피해자들이 실제 삼성 고위관계자를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홍리경 : 최 부사장이 카메라 앞에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던 건 당연했다. 그가 실제로 무슨 권한이 있겠는가. 당시 국정감사였는데, 원래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을 부르려 했다. 하지만 새누리당의 반대로 무산됐다. 대신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이 최 부사장이었다. 그는 회사 측 입장을 녹음기 틀어놓듯 이야기할 뿐이었다.

당시 김시녀 씨와 한혜경 씨가 최 부사장에게 다가갔을 때 그 옆자리에 있던 참고인으로 나온 다른 공무원이 있었다. 카메라와 함께 다가오는 피해자 모습을 보고 멈칫하고 일어서더니 최 부사장을 향해 몸을 틀더라. 최 부사장을 보호해주려는 듯 말이다. 그 공무원은 이 문제와 전혀 상관없는 참고인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무의식적으로 취하는 행동을 봤을 때, 세상의 권력구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가 눈에 들어오는 듯했다.

또 최 부사장 뒤에는 삼성전자 안전관리 담당자가 앉아 있었다. 한혜경 씨와 김시녀 씨가 최 부사장 앞에 다가오자마자, 어디론가 연락하더니 스마트폰으로 한 씨와 김 씨를 찍기 시작했다. 이런 모습이 당시 내 카메라에 잡혔는데, 잊기 힘든 장면이다.

▲ 홍리경 감독 ⓒ프레시안(최형락)

"전자제품의 소비와 폐기과정에서 발생하는 죽음도 다루고 싶다"

프레시안 : 시사회 때 “전자제품 생산, 소비, 폐기의 전 과정에서 일어나는 죽음을 다루고 싶다”고 했다. 지금은 디지털 시대다. 우리는 전자제품이 없는 일상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전자제품의 생산, 소비, 폐기 과정에서 어떤 죽음들이 발생하는지 잘 모른다. 이번 작품은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죽음을 다뤘다. 앞으로는 전자제품의 소비와 폐기 과정에서 일어나는 죽음도 다루겠다는 말로 들린다.

홍리경 : <탐욕의 제국>을 만들 때, 처음에는 삼성이라는 틀 안에서 직업병을 바라봤다. 하지만 피해자들을 꾸준히 만나면서 보다 큰 틀에서 보게 됐다. 전자제품은 우리에게 편안함을 주는 제품을 주지만, 그걸 만드는 사람들의 삶은 그렇지 않다는 것. 첨단 기술이, 그걸 다루는 인간의 노동조건이나 환경을 개선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발전됐다는 것 말이다. 결국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루려면 전자제품의 생산과 소비까지 이야기해야 한다. 다만, <탐욕의 제국>에선 삼성 이야기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프레시안 : 마지막에 나오는 중국의 전자제품 폐기장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홍리경 : 작품이 삼성과 싸운 피해자들 이야기로만 끝나면, 삼성 비판 영화로 끝난다. 나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전자제품이 소비되고 결국 쓰레기장에 버려지듯이, 그걸 만드는 이들의 삶도 현장에서 소모되고 결국 폐기된다. 전자제품 폐기장 장면은 그래서 복합적인 의미를 띤다. 우선, 이런 문제의식을 다음 작품에서 더 확장하고 싶어서 넣은 장면이다. 그리고 “전자제품을 만드는 이들은 결국 기업에 의해 쓰다 버려지는 삶이다”, “전자제품 쓰레기는 그 자체로 새로운 문제를 낳는다” 등의 메시지를 담고 싶었다.

프레시안 : 중국의 전자제품 폐기장에서 벌어지는 보건 문제도 심각하다고 들었다. 폐기장은 가난한 시골 마을에 있다. 생산 현장에서도 제일 위험한 일은 그 사회의 약자들이 맡았는데, 폐기장 역시 약자들이 사는 곳에 있다. 편리함을 누리는 이들과 위험을 겪는 이들이 분리된 구조다. 삼성 반도체 피해자들 가운데 서울 강남에서 자란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지방의 실업계 고교 출신 여성이 대부분이다. (☞관련 기사 : "<탐욕의 제국>, 위험은 언제까지 약자의 전유물이어야 하나" , <변호인> 천만 관객, 좋아할 일만은 아니다 , <프레시안> 기자는 왜 조선소 하청으로 취업했나?)

홍리경 : 그렇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은 처지에서 삼성 취업을 택한 경우다.

"반도체 제조 현장은 사람을 지우는 공간"

프레시안 : 삼성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이 다들 하는 말이 있다. 공장에 처음 들어갔을 때, 예상과 너무 달라서 놀랐다는 게다. ‘초일류 기업’이라는 삼성의 광고처럼, 완벽한 안전관리가 이뤄지는 곳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홍리경 : 텔레비전에서 애국가가 나올 때 반도체 공장이 화면에 뜬다. 많은 이들이 이런 이미지로 반도체 산업을 바라본다. 삼성에 취업했던 이들도 대개 그랬다. 최첨단 시설이 갖춰진, 아주 깨끗한 환경. 그런데 막상 공장 안에 들어가 보면, 그게 아니다. 사람이 직접 손으로 움직여야 하는 수동 설비도 많다. 자동화 된 설비 역시 사람 손을 타야 하는 경우가 많다. 늘 이상한 냄새가 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다. 방진복 역시 작업자의 몸을 지키기 위해 입는 옷이 아니다. 게다가 막상 입어보면 무척 불편하다.

프레시안 : 눈만 내놓고 온 몸을 감싸는 방진복, 몸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도체에 이물질이 떨어지는 걸 막기 위해 입는 방진복. <탐욕의 제국> 도입부에서 반도체 공장 여성 노동자들이 그런 방진복을 입은 채로도 예쁘게 보이고 싶어 했다는 대사가 나온다. 방진모를 머리에 썼을 때, 하트 모양이 되면 좋아한다고도 했다. 이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기업 경영진이 보기에 노동자들은 쓰다 버리는 소모품 같은 존재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남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고,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메시지가 담긴 듯 했다. 감독이 여성이라서 이런 장면을 담을 수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홍리경 : 남성들은 자신의 삶을 전달하는 방식이 여성처럼 사적이고 촘촘하지 않다. 무장을 풀지 않은 채 이야기를 하는 느낌이다. 반면, 여성들은 조금만 분위기가 편해지면 자신의 삶을 가감 없이 풀어놓는다. 방진모 이야기는 그렇게 해서 들은 것이다.

눈만 내놓고 일하는 반도체 공장은 자신을 철저히 감춰야 하는 곳이다. “(반도체 제조) 현장은 끊임없이 사람을 지우는 공간”이라는 말도 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욕망하는 존재다. 또 자신을 드러내려 애쓴다. 그러나 그게 방진복 안에 감춰진다.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19살에 취업했다. 20대 초중반 나이, 얼마나 하고 싶은 게 많은 때인가. 그러나 그녀들은 욕망을 그저 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야기들이 내개 큰 울림을 줬다. 관객들에게도 이들이 그저 피해자만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누르고 살아야 했던 사람으로 비쳤으면 한다.

▲ 홍리경 감독 ⓒ프레시안(최형락)

"'그 일' 안 했으면 건강하게 살아갔을 사람들이었다"

프레시안 : 반도체 공장의 현실을 잘 모르는 이들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대목도 있다.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그곳을 평생직장으로 여기지는 않았다는 대사다.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곳은 따로 있고, 공장은 그리로 건너가기 위한 징검다리 정도로 여겼다는 게다. 그래서 시간이 나면 다른 공부를 했다는 대사도 나온다. 한국의 많은 직장인들이 이렇게 살아간다. 노동과 자아실현이 분리된 삶이다. 직업병 피해자들이 산업재해 인정을 받는 게 시급하다. 그러나 그밖에도 중요한 문제가 많아 보인다.

홍리경 : 산재 인정은 중요하다. 그래야 안심하고 치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들은 사과를 받고 싶어 한다. 자신이 몸 바쳐 일하고 자랑스러워했던 회사에 대한 배신감도 큰 분들이다. 알고 보니 회사가 위험 속에 나를 방치했다는 것이다. “그래 너희가 일했던 현장은 위험하다. 미안하다. 다시는 이런 일이 안 생기도록 바꾸겠다.” 회사한테서 이런 말이 듣고 싶다. 피해자들이 교섭하면서 요구하는 것도 그런 것들이다. 진심어린 사과와 재발 방지 대책이다.

걱정도 많다. 어린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위험한 일을 지금도 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안쓰러워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일하다가 나중에 밖에 나와서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많으시다. 자신도 보상받고, 사과 받고, 안에 있는 사람들, 노동자들에 대한 걱정도 크다.

프레시안 : 반도체 공장에 있는 분들이 이런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텐데….

홍리경 : 그렇다. 당장 자기는 건강하니까, <탐욕의 제국> 속 장면이 남 이야기처럼 여겨지는 사람도 있을 게다. 직업병 피해자의 사례가 분명히 모두의 얘기는 아닐 수 있다. 그렇지만 일하다가 병에 걸린 사람들이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 일'을 안 했으면 건강하게 살 사람들이었다.

"삼성의 잘못 두둔하는 이들도 '희생당하는 소수' 될 수 있다"

프레시안 : 반도체 공장에서 발생한 직업병 문제를 다룬 기사를 보면, 종종 달리는 댓글이 있다. 삼성이 생산 설비를 중국으로 옮기면 어쩌냐는 내용이다.

홍리경 : 일단 분명히 할 건, 반도체 공장 직업병 피해자들의 주장이 삼성을 무너뜨리자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삼성을 변화시키자는 것이다. 또 지금 공장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안전하게 일하게끔 하자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소수의 아픈 사람들 있다고 해서, 훨씬 많은 일자리를 만드는 삼성을 비판해서야 되겠느냐고. 삼성이 해외로 공장을 옮기면 어떻게 할 거냐고. 나는 이런 생각에 반대한다. 아픈 사람들이 설령 소수라고 해도, 그들이 다수의 이익을 위해 희생돼서는 안 된다. 기업의 이익을 위해 사람을 쓰다 버리는 게 당연하다는 게 우리 사회 분위기 아닌가. 이런 폭력적인 분위기에서라면, 삼성을 비판하면 안 된다는 이들도 언젠가는 희생당하는 소수 안에 포함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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