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로브는 모든 것이 매우 흡족했다. 부시의 재선은 결국 성공했다. 특히 그가 정성을 기울였던 남부 기독교인들의 표는 역시 확고했음이 입증되었다. 이만 하면 대통령의 비서실장은 따 놓은 당상이다. 그때 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대통령과 전용으로 사용하는 선이었다.
부시의 자신감 넘치는 육성이 화살처럼 꽂혔다. "칼, 아무래도 자네가 내 곁에서 도와줘야겠어." 예상했던 바였다. 이어 다른 전화 하나가 걸려 왔다. 한국의 J목사였다. 아, 한국은 지금 한참 새벽일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수화기를 들었다. J목사는 한국의 독립기념일에 성조기를 흔들고 미국 국가를 선창하는 등 미국의 맹렬한 친구였다.
J목사는 별로 유창하지 않은 영어로 축하인사를 전해오는 것이었다. "헬로우, 미스터 로브, 모든 것이 아주 잘 되었어요. 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축복해주신 결과입니다. 미국은 정말이지 복 터졌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있어서 말입니다." 분명 아부성 발언이기는 했으나 기분이 나쁠 리는 없었다. "오우, 탱큐. J목사님, 언제 한번 미국으로 들어오셔야지요?" `들어오셔야지요'를 강조하면서 약간 무게를 잡았다.
그래도 전화기 저쪽의 상대는 이 말에 흐뭇했던 모양이다. "오브가 코스지요. 부시 대통령 각하에게도 인사 잘 전해주세요. 우리도 여기서 부시 대통령 당선 축하 예배 준비하고 있습니다." 통화를 마치면서 칼 로브는 중얼거렸다. "음, 한국 요새 많이 컸어. 내가 한국의 일개 목사 전화까지 받고 기분이 좋으니 말이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려 있는 세계지도를 한눈에 쓱 하고 훑어보았다. IRAQ. 그렇게 하나하나 스펠로 읽은 뒤, 신음을 토하듯이 낮게 발음했다. "이라크." 그래, 이제 내부의 전쟁은 완결되었다, 이슬람에 대한 성전을 어떻게 마무리 지을 것인가, 이게 문제다. 그는 마치 스스로가 중세의 십자군을 지휘하는 사령관이나 된 듯이 여겨졌다.
국방장관 럼스펠드는 너무 말이 많다. 오만하고 잘난 척하고 기자들을 자기가 다 요리할 수 있다고 떠벌인다. 그러나 지금 그 꼴이 뭔가. 이라크 전선이 저 모양이 되면서 이젠 기자회견장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지 않은가? 우리처럼 강철 같은 신앙이 없어서 그래.
- 칼 로브는 잠시 회상에 잠기느라 감았던 눈을 떴다. 그렇게 재선 성공으로 들떠 있었던 것이 바로 1년 전. 모든 것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지금 자신은 그가 경멸해마지 않았던 럼스펠드보다 더 못한 신세가 될 조짐이 아닌가. CIA 비밀 누설 혐의로 검찰의 기소가 임박했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뻔질나게 전화해 오던 한국의 J목사로부터도 더 이상 전화가 오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요사이 부시도 자기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사방에서 깨지고 있는 중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차베스에게 한방 먹었고 이제 APEC이 열리는 한국의 부산에서는 어떤 대접을 받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서가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제목은 <미국의 세기>. 아. 영광은 사라지고 이제 혹 황혼이 저물어 오는가? 십자군 전사의 눈에 눈물이 어른거렸다. 선거승리만이 다가 아니었구나.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센타'(오후 4-6시/FM 104.5, www.ebs.co.kr)의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에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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