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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에서 '선생님' 되기까지… 너와의 긴 인연!

[이명현의 '사이홀릭']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내가 처음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은 것은 대학교에 갓 입학했던 1982년의 어느 봄날이었다. 나는 당시 한 선배의 손에 이끌려서 '과학철학회'라는 그럴 듯한 이름을 내걸고 실제로는 운동권 사회과학책을 읽는 '세미나' 모임에 참가하고 있었다. 흔히 '금서'로 통칭되는 책들을 읽고 토론을 하고, 때로는 행동으로 옮기는 전형적인 80년대 '세미나' 모임이었다. '과학철학회'라는 이름에 걸맞는 책은 <과학혁명의 구조>를 빼면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1970, 2nd editi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선배로부터 건네받은 <과학혁명의 구조>는 1970년에 시카고 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제2판을 송두리째 불법 복사해서 제본까지 한 해적판이었다. 1980년과 1981년에 이미 두 출판사에서 <과학혁명의 구조>의 한국어판을 출판한 것을 생각하면 왜 영문으로 읽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쳐지나간다. 번역된 책들은 금서일지라도 구해서 읽고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들은 해적 복사판으로 읽던 시절이었다. 심지어는 필사본도 있었다. 영어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일본어 책이나 일본어로 번역된 서양 책들을 읽기 위해서 일본어를 공부했던 치기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영문으로 힘들게 독해하면서 읽었던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에 대한 나의 당시 독서평은 잘 생각나지는 않는다. 역시 '패러다임'이라는 단어가 중독성 있게 계속 마음속에 맴돌았었다. 내 주변의 과학자들을 돌아보면서 막연하게 '과학자 사회'라는 개념을 익히고 있었던 것 같다.


2002년 가을, 우연한 기회에 책을 읽고 토론하는 수업을 맡아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나는 내 수업에 대중과학책을 읽고 토론하는 정체성을 부여하려고 노력했다. '과학의 창으로 보는 인간' 정도의 부제를 붙이고 싶었다. 읽을 책을 고르기 위해서 그동안 내가 읽었던 책들, 읽지는 않았지만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서 추천을 받은 책, 많이 읽히는 책 등등을 망라해서 긴 목록을 만들었다. 몇 달 동안 다른 일은 모두 접어두고 하루 종일 그 책들을 꼼꼼하게 읽었다. 짧은 한 학기 동안의 읽을 책 목록을 만들기 위한 예비 작업으로는 좀 과한 면이 있었지만 나름 행복한 시절이었다.


먼저 <과학혁명의 구조>(토마스 쿤 지음, 김명자 옮김, 동아출판사 펴냄)를 읽었다. '최신 번역 보완판'이라는 선전을 표지에 달고 나온 책이었다. 1992년 8월 5일에 초판 1쇄를 찍었다고 적혀있었다. 내가 읽은 책은 1994년 6월 10일 초판 6쇄본이었다. <과학혁명의 구조>의 내용 자체에 대한 논의와는 별개로 두 가지가 마음에 걸리거나 궁금했다. 하나는 번역에 대한 의구심이었고 다른 하나는 <과학혁명의 구조> 그 이후의 이야기였다.


잘 읽히지가 않았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원전보다 더 읽기 어렵게 옮겨 놓고 변명하는 것 같아 쑥스럽기도 하다.' 역자 서문에서 옮긴이 김명자가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예의상 써놓은 말일수도 있다. 하지만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다고 느꼈고 읽는 내내 불편했다. 그래서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제2판을 이번에는 정식으로 구매를 해서 다시 읽어봤다. 훨씬 읽기가 수월했다. 물론 그 사이에 내가 영어로 된 책을 읽는데 조금 더 익숙해져 있었고 <과학혁명의 구조>의 내용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토마스 쿤의 문장이 좀 길고 예를 많이 들어서 번역하기에 무척 힘든 책일 것이라는 동정심도 생겼다. 하지만 여전히 읽어내려 가기 힘들고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잠시 '번역'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만든 책이기도 했다.


내친 김에 1980년에 사회학자인 조형이 번역한 <과학혁명의 구조>(토마스 쿤 지음,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펴냄)도 찾아서 읽었다. 개인적인 취향을 바탕으로 말하자면 이 책이 김명자 번역본 보다는 조금 더 수월하게 읽혔다. 그래도 여전히 읽기 불편하자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옮긴이의 말에서 조형이 "순수과학의 연구사례들이 기본 자료로 제공되고 있어서, 학문적인 욕심만으로 번역을 시도한 사회과학도로서는 옮기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고 고백한 것처럼 그녀 역시 번역의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 <과학혁명의 구조>(토마스 쿤 지음, 김명자 옮김, 정음사 펴냄). ⓒ정음사
김명자가 1981년 번역한 <과학혁명의 구조>(토마스 쿤 지음, 정음사 펴냄)도 함께 읽어봤다. "그리고 하나 더, 번역이 한창 피크에 이르렀을 때, 이화여자대학교의 조형 선배가 이것을 옮기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맥도 빠지고 망설이기도 했지만, 내친 걸음이라 끝낼 수밖에 없었다." 옮긴이의 말에 김명자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그랬다면 사회학자와 화학자인 두 사람이 의기투합해서 한 권의 번역본으로 완성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학문적인 배경이 다르니 서로 보완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을 것이고 그만큼 더 정확하고 풍성한 번역본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이 있다. 이런 일이 우리 사회에서 결코 쉽게 일어나지 않는 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지나간 일을 두고 이런 망상을 하는 내 자신이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각설하고, 아쉬운 대목이었다.


<과학혁명의 구조> 번역의 문제는 (나는 '불편함'이란 말에 더 정감이 간다.) 이 책을 만날 때마다 나를 괴롭혔다.


한편 <과학혁명의 구조>를 둘러싼 논쟁이나 그 이후의 <과학혁명의 구조>의 논쟁적 행적이 늘 궁금했다. 2002년 겨울에 번역된 <현대과학철학 논쟁>(토마스 쿤 외 지음, 조승옥·김동시 옮김, 아르케 펴냄)은 <과학혁명의 구조>를 둘러싼 초창기 논쟁을 엮은 책이다.


"이 책은 1965년 7월 11일부터 17일까지 런던 리젠트 공원에 있는 베드포드대학에서 개최된 1965년도 국제 과학철학 세미나 논문집들 중 네 번째에 해당한다."


'책머리에' 첫 문장에 서술된 것처럼 <과학혁명의 구조>를 둘러싼 논쟁을 엿볼 수 있는 좋은 텍스트였다. 토마스 쿤을 비롯해서 칼 포퍼와 폴 파이어아벤트 등 당시 과학철학의 정점에 서있던 사람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많은 이야기들이 이 책에 실려 있었다.


그런데 행간을 잘 읽어보면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내용을 좀 희화화해서 이야기해보면 이렇다. 토마스 쿤과 생각을 같이 하는 진영에서는 반대 진영이 <과학혁명의 구조>는 물론 '패러다임' 자체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따라서 (좀 극단적으로 해석하자면) 오개념에서 비롯된 모든 반론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반면 상대 쪽에서는 오히려 쿤을 옹호하는 쪽에서 그런 무지를 드러내고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정작 쿤은 자신의 개념의 모호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논리를 전개해 나가고 있다. 서로 너희들은 뭘 몰라, 그러고 있는 형국처럼 보였다. 그만큼 뜨거운 논쟁이라는 증거다.


당시의 열기를 느끼기에 <현대과학철학 논쟁>은 꼭 그 만큼 적합한 책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과학철학과 과학사를 포괄하는 논의가 시들해진 것도 원인이겠지만 <과학혁명의 구조>의 현재적 의의에 대해서도 '꼭 그 만큼 적합한' 정보를 알려주는 책이나 아티클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몇 권의 책 제목을 들 수는 있지만 '꼭 그 만큼 적합한'에 해당하는지는 확신할 수 없는 다소 무거운 책들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지' 살짝 알려주면서 더 큰 궁금증을 유발할 그런 가벼우면서도 콤팩트한 문건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오래도록 해왔다.


'독서와 토론'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강의를 하면서 <과학혁명의 구조>도 읽을 책 목록에 포함시켰다. 학생들이 책을 읽고 수업에 참여하면 나는 토론을 위한 준비 작업을 학생들에게 쪽글에 답을 하도록 한다. 쪽글 질문은 이렇다.


(1) 과학자들이 용어나 개념 등을 깨우칠 대 주로 사용하는 방식은?
(2) 패러다임이란?
(3)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4)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사회학자들이 왜 열렬하게 환호했었다고 생각하는가?
(5) 오늘의 토론 주제 한 가지를 제시하라. 제안 이유는?


학생들이 토론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일종의 워밍업으로 글을 쓰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도록 하기 위해서 준비한 질문이다. 내 자신에게 늘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나는 학생들이 <과학혁명의 구조>의 내용을 도식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이 책이 갖고 있는 복합적인 의미를 파악하고 논쟁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쿤이 '진짜로' 하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묻는 '밑밥' 성 질문을 던졌다.


<과학혁명의 구조>는 감미로운 멜로디로만 이루어져 있는 노래가 아니다. 단순화된 모형이 멜로디처럼 흐르는가 하면 많은 과학사적 예들이 풍성한 배음으로 몰려오기도 한다. 쿤 자신이 억제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과학사책으로도 읽힐 수 있다. 과학자들의 집단적인 행동양식을 고발하는 책으로도 독해할 수 있다. 패러다임이 얼마나 다양한지 그 걷잡을 수 없는 변주를 담은 소곡집이기도 하다. 그렇게 풍성하게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어주길 늘 바라고 있다. 물론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책을 보는 연습을 그들과 같이 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학생들에게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어보라고 권하면서 늘 사족을 달곤 했다. 텍스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의 일정 부분은 번역의 문제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너무 자책하지 말라는 당부의 말도 진담 반 농담 반 덧붙였다. 빨리 더 나은 번역본이 나와야만 한다는 말도 강조해서 꼭 덧붙였다. 또 한 가지 당부는 오래 전에 나온 이 책의 현재적 위치에 대한 인식을 갖고 책을 읽으라는 것이었다. 내가 <과학혁명의 구조>에 대해서 갖고 있던 문제의식을 투영한 것이었다.


▲ <과학혁명의 구조>(토머스 쿤 지음, 김명자·홍성욱 옮김, 까치 펴냄). ⓒ까치
언젠가부터 <과학혁명의 구조>가 새롭게 번역되고 있다는 소문을 학생들에게 해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출간 50주년 기념 제4판'이라는 표제어를 달고 새로운 <과학혁명의 구조>(김명자·홍성욱 옮김, 까치 펴냄)가 2013년 9월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 반가운 일이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과학혁명의 구조>를 권하면서 꼭 '출간 50주년 기념 제4판'을 읽으라고 당부를 한다.


"이번 번역은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이 번역한 제3판의 내용을 기초로 미국에서의 제4판의 출판을 계기로 해서 과학기술사와 과학기술학을 전공한 홍성욱 교수가 가독성에 초점을 맞추어 손을 본 것이다. "이언 해킹의 서론"은 이 책의 출간 50주년을 기념하여 추가된 글이다. "후기-1969"는 서울대학교에서 과학철학을 강의하는 천현득 선생이 수업을 위해서 번역해놓은 것을 많이 참고했다. 이 지면을 빌려 천현득 선생께 감사를 드린다. 원고의 정리에는 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공부하고 있는 이주영 군이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이번 출판을 계기로 쿤의 과학사와 과학철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서 쿤이 쓴 다른 책들도 번역되어 국내의 독자들에게 과학에 대한 흥미로운 철학적, 역사적 논점을 제공하기를 기대한다."


토머스 쿤의 '출간 50주년 기념 제4판' <과학혁명의 구조>가 번역된 것은 하나의 큰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번역의 문제가 제기된 채로 방치되어 있는 대중과학의 명저들이 꽤 있다. 다시 번역하면 좋겠지만 번역자의 고집도 있고 다른 문제들도 겹쳐있어서 쉽지가 않은 모양이다. <과학혁명의 구조>가 이 책을 번역할 수 있는 적임자 중 한 사람인 홍성욱이 가세해서 다시 번역되어 나온 것은 정말 환영할만한 일이다. 이런 고전일수록 여러 전문가의 손때를 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새로운 <과학혁명의 구조>를 정독해서 읽어보았다. 그동안 내가 갖고 있던 번역에 대한 불편함이 상당 부분 해소되었다. 학생들에게 <과학혁명의 구조>를 권하면서 번역의 흑역사 이야기는 계속하겠지만, 이번 번역본에 대한 칭찬도 같이 할 생각이다.


이 책은 또한 내 궁금증 중 하나를 해소해주는 단비 같은 책이기도 했다. 50여 쪽에 달하는 '이언 해킹의 서론'은 <과학혁명의 구조>의 내용과 역사적 의의뿐만 아니라 현재적 관점에서의 의미와 맥락도 '꼭 그 만큼 적합한' 정도로 잘 정리해 놓고 있다. 역자 해설도 이런 기능을 돕는데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조금 더 당당해질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책이다.


다음 주 월요일에는 한 두문장의 인용을 위해서 도서관에서 빌려온 <과학혁명의 구조> 이화여자대학교 초판본과 정음사 초판본을 반납해야겠다. 연체료가 걱정된다. 올해가 가기 전에 나와 <과학혁명의 구조>의 32년 인연을 이어가기 위해서 제4판 영문판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특리 이언 해킹의 서문을 찬찬히 읽어볼 생각이다. 이 글을 여기서 마감하고 아마존에서 책 주문부터 해야겠다.


사족: 지은이 이름은 그 책이 나오던 당시의 번역본 표기법을 따라서 토마스 쿤과 토머스 쿤을 병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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