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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를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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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를 위한 변명

[기고] 문제는 ‘사회구조’? 속류사회학자들의 '알리바이'

강신주를 위한 변명을 쓰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국 사회가 맞닥뜨리는 대부분의 사안들이 그렇듯 그를 둘러싼 논란 역시 벌써 유통 주기가 끝나버린 듯하다. 그럼에도 뒤늦게 강신주를 둘러싸고 오갔던 갖가지 말들의 잔치에 끼어들려는 것은 그를 둘러싼 논란이 한 개인에 대한 비난이나 비판으로 끝나버리기에는 여러모로 아깝다는 생각 때문이다. 대학에서 인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나로서는 강신주 현상이 현재 대학 인문학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대중 인문학의 현황에 대한 성찰을 비롯해 수많은 논점을 이끌어 내는 훌륭한 매개이자 연결고리로 다가왔다. 그것은 나아가 '인문학'의 본령을 묻는 계기인 동시에 '순수 인문학'이라는 기만적 상징계를 건드림으로써 발생하는 스캔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반응을 살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강신주를 둘러싼 논란들이 생산적인 차원으로 옮아갈 기미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비판들이 강신주가 한 말의 꼬리를 잡거나 그의 과장된 제스처를 비난하거나, 그의 상담을 거론하며 자기 계발의 아류 정도로 치부하는 데 멈추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차라리 강신주에 대한 수많은 비판들이 근거하고 있는 '속류 사회학주의'야말로 불만의 대상이었다. 이것이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다.

속류 사회학주의는 사회구조와 개인의 강고한 이분법에 기초한다. 마치 속류 마르크스주의가 토대와 상부구조의 이분법에 기초해 상부구조에 대한 토대의 결정력을 강조하듯, 속류 사회학주의에서 사회구조는 개인에 대해 토대와 같은 결정성을 지닌 것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속류 사회학주의에 의하면 사회구조를 비판하지 않고-혹은 그것을 결정적인 것으로 취급하지 않고-개인의 품행과 변화를 주문하는 논의는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부과하는 탈사회적이고 탈정치적이며, 그래서 보수적인 주장으로 치부된다.

박권일의 '인문학자 강신주는 어떻게 ‘문화권력’이 되었나'(6일자 <미디어스>)는 이러한 속류 사회학주의의 절정을 보여주는 글이다. 이 글의 결말에서 박권일은 강신주를 "연애상담, '픽업아티스트'의 헌팅요령 강의, 자기계발 멘토링"과 묘하게 등치시키며 이 모든 것을 '자아성형 산업'이라는 개념으로 한데 묶는다. (강신주와 픽업아티스트라니! 박권일은 이 글을 시작하면서 강신주에 대해 "'인문학 팔아먹는 장사치'나 '사기꾼'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다"고 했는데, 과연 그 말은 진심이었을까? 아니면 박권일은 픽업아티스트를 사기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까?)

속류 사회학주의의 절정을 보여주는 글답게, 박권일은 자아 성형산업의 폐해가 한국사회의 문제를 "탈사회적이고 탈정치적"으로 해결하려 한다는 데 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자아성형 산업이라는 용어의 모호성은 차치해두더라도, 강신주의 주장이 탈사회적이고 탈정치적이라는 비판은 사회와 정치를 극히 협소하게 바라보는 속류적 인식에 불과하다.

주체와 자아의 문제는 철학에 있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성찰과 탐색의 대상이다. 사회학에 있어 사회와, 경제학에 있어 경제가 그렇듯 말이다. 따라서 개인의 자아와 새로운 주체화를 요청하는 철학적 담론이 사회와 정치의 문제의식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는 비판은, 철학이 개인의 자아와 주체를 매개로 사회와 정치의 문제를 사고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일 뿐이다.

▲SBS 예능프로그램 <힐링캠프>에 출연한 철학자 강신주 박사. ⓒSBS 화면캡처

그렇다고 강신주가 사회 구조의 모순과 부조리함을 지적하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최근 조한혜정은 그녀의 퇴임 기념 인터뷰에서 여성주의를 이야기하면서 "꼭 말끝마다 알튀세르를 인용해 '최종 심급은…계급이다' 이러며 못 박아야"만 했던 학계의 경직된 풍토를 거론한 적이 있는데, 내가 보기에 속류 사회학주의자들이 강신주에게 요구하는 것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개인과 자아의 문제를 이야기하더라도, '최종 심급은…사회 구조’라고 못 박길 원하는 것이다. (이게 거꾸로 되어선 곤란하다. 즉, 사회구조를 먼저 거론하고 개인을 이야기하면 안 된다. 속류 사회학주의자들에게는 그것 역시 타당한 의심의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도대체,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미셸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소크라테스의 '네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자기 인식'이 아니라 '자기 배려'를 대표하는 말로 새롭게 해석하면서, 스토아주의적이고 근대적인 '자기 인식'에 의해 억압된 '자기 배려'에 입각한 철학의 역사를 조명한 바 있다. 간단히 말하면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사회를 냉철하게 인식하는 것이 '진실'을 획득하는 방법이 아니라 주체가 자신을 돌보고 배려하는 것이 '진실'에 다가서는 방법이었는데, 근대 이후 '인식'이 특권화 되면서 개인 자아와 주체에 대한 변형의 요구가 억압받고 비판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푸코는 주장은 이렇다. "진실은 주체가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갖기 위해 자신을 변화시키고, 변형시키고, 개선해 어느 정도는 현재의 자신과 다르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진실은 주체의 존재 자체를 내기로 거는 대가로서만 주체에게 주어진다." (물론 박권일이라면 이러한 자기 배려의 주문을 소리 높여 외쳤던 소크라테스야 말로 '자아 성형산업'의 원조로 꼽을 것이다. 게다가 소크라테스의 곁에는 늘 그의 말을 듣고 감탄하길 좋아했던 여러 젊은이들이 있었으니, '인문학 팬덤'이자 '문화권력'의 원조이기도 하겠다.)

강신주 역시 대중들을 향해 ‘그들 자신을 변화, 변형시키고 개선해 어느 정도는 현재의 자신과 다르게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모든 것을 사회 구조와 개인의 이분법으로 나누어 바라보는 속류 사회학주의자들이 흥분하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강신주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단지 사회 구조를 무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식의 개인과 자아의 문제가 사회학이나 정치학이나 경제학이 다룰 수 없는(혹은 다루지 않는) 철학 고유의 쟁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신주에게 왜 정치와 경제를 포괄하는 체계적인 사회구조에 대한 분석을 하지 않느냐고 힐난하는 것은 그에게 왜 사회학이나 정치학이나 경제학을 하지 않고 철학을 하고 있느냐고 비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론 이는 인문학 전공 대학원생들이라면 늘 듣는 익숙한 힐난일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모두들 사회과학만 해야 하나? 모든 것을 사회구조의 반영이나 징후로 읽어야만 봐줄만한 글인가? 윤리적 주체에 대한 탐색과 성찰은 자기 일기장에만 써야 하나?)

한편 속류 사회학주의자들의 주장은 푸코가 말한 “행동의 윤리적 주체를 포기”하는 것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에서도 문제적이다. 이 과정에서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은 개인이 윤리적 주체가 되기로 결단하는데 따르는 고통에 대한 면죄부 역할을 도맡는다. (강신주를 신도들의 ‘간증’을 이끌어내는 부흥사로 치부할 수 있다면 속류 사회학주의자들은 ‘개인’에게 면죄부를 남발하는 교황청의 사제들로 간주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문강형준은 강신주의 대중 인문학이 ‘힐링’의 연장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는데, 그런 식이라면 ‘이건 네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 구조의 책임’이라고 냉철하게 분석하는 과학적 담론 역시 ‘힐링의 연장’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과학적이고 지적인 담론에 의해서만 ‘힐링’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것이 ‘힐링’으로 환원될 수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그것이 힐링인지 아닌지를 갖고 비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가령 강신주가 비판받은 노숙자 관련 글에 대한 반응을 보자. 이에 대해 영화감독 이송희일은 “노숙자에게 필요한 건 수치심이 아니라 자립과 재활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이라는 것쯤은 초등학생도 알겠다”며 강신주를 비판했다. 이 역시 속류 사회학주의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발상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수치심의 회복을 이야기하는 강신주보다 노숙자들을 “재활”되어야만 하는 존재로 바라보는 이송희일의 ‘유사 임상의학적 강박’이 더욱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노숙자들이 원하는 것이 그냥 그렇게 머무는 것인지, 혹은 그들을 자립시키고 재활시킬 수 있는 ‘시설’에 입소하는 것인지 그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물론 그가 말하는 사회적 안전망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 노숙인의 자립과 재활을 돕는 사회안전망(시설)은 아마도 우리의 시선에 포착되지 않는 곳에 지어질 가능성이 많다. 강신주라면 “당신은 진심으로 노숙자들을 위하고 걱정하고 존중하는 듯 말하지만 실은 그들은 부담스러운 짐일 뿐이고, 그래서 그 짐을 국가와 사회가 떠맡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들은 그저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존재라서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냥 잘 지낸다고 내가 생각하며 살 수 있길 바라는 것 아닙니까? 결국 당신은 나를 비판했지만 노숙자라는 타자와 당신이 맺는 관계는 전무한 것이 아닙니까? 어쩌면 당신은 노숙자와 아무런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아서 국가와 사회라는 추상물 뒤로 숨는 것은 아닙니까? 그것은 기만이자 위선 아닙니까? 차라리 노숙자의 뺨을 때린 보들레르가 정직하지 않습니까?”라고 되물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강신주에 대한 비판들을 통해 지금 한국 사회에서 노숙자를 각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을 수 있었다. 문제는 사회 구조에 있는 것이지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온당한 항변의 말들도 수없이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노숙자에 대한 태도를 위시한 그들의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그지없는 태도’가 한국 사회에서 노숙자를 비롯한 사회적 타자의 삶을 보다 더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 것이라는 기대는 끝내 가질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강신주라는 개인 자체에 분노할 뿐, 노숙자를 비롯한 사회의 타자들과 어떻게 관계 맺는 것이 윤리적인 길인지를 고민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사회 구조’는 주체의 모든 책임을 방기하는 알리바이로 기능하기 시작한 듯하다. 더불어 속류 사회학주의가 널리 퍼지면서 주체의 윤리적 책임을 고민하는 일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묻는 일이, 어떻게 사는 것이 진실한 삶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탈정치적이고 탈사회적인 것으로 비난받는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 뿌리 깊은 정치우선주의, 사회절대주의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것이야말로 박권일이 비판하는 어떤 ‘큰 타자’의 대표 격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 변화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하기 힘들어 자기 자신은 쏙 빠진 사회라는 추상물에 우리의 모든 윤리적 책임을 전가하는데 익숙해진 것은 아닐까? 강신주가 불편한 이유는 아마도 그가 이러한 우리의 익숙해진 ‘편안함’을 방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강신주는 우리에게 윤리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진실에 접근할 수 없으며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은 엄청난 용기와 고통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차라리 쉬운 것은 사회라는 구조를 분석하면서 그 영속성과 강고함에 압도된 채 실천의 책임을 묻어버리는 일이다.

이 명령에 반응하든 아니면 다시 ‘사회’라는 것에 그 책임을 넘겨버리는 익숙한 방식을 선택하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개인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그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조금 더, 기꺼이 강신주라는 불편함을 감수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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