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금강산 이산가족 면회소에서 설계기 2차 이산가족 상봉이 열렸다. 지난 20일 열린 1차 상봉 때와 마찬가지로 남북 이산가족들은 60여 년 만에 재회의 기쁨을 나누며 눈물을 흘렸다.
오후 3시 단체 상봉을 시작으로 2차 설계기 이산가족 상봉이 시작됐다. 이번 상봉에 참가한 남측 가족 357명은 3시 10분경 북측 관계자들과 함께 가족들이 입장하자 서로 얼싸안으며 기뻐했다. 가족별로 마련된 테이블 곳곳에서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죽은 줄만 알았던 언니와 만난 김사분(74) 씨는 검은색 꽃무늬 한복을 입고 나온 언니 김태운(79) 씨를 보고 “죽은 줄 알고 흔적도 정리했는데 이렇게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며 부둥켜안았다. 자매는 한동안 서로의 얼굴을 만지며 통한의 눈물을 쏟았다.
한 살 때 아버지와 헤어져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딸과 아버지의 만남도 있었다. 북쪽에 계신 아버지 남궁렬(87) 씨를 만나러 금강산에 온 딸 남궁봉자씨는 면회소에서 상봉을 앞두고 “잠을 잘 못 잤다. 사진을 보니 큰아버지를 닮았더라”라며 북측 가족들이 들어오는 입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윽고 처음 보는 아버지인 남궁렬 씨가 면회소로 들어오자 딸은 아버지를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봉자 씨는 아버지에게 “저 알아보시겠어요?”라고 물었지만 세월이 너무 흐른 탓에 아버지는 알아보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남궁렬 씨는 너무 어린 나이에 헤어지게 된 딸에게 미안한 탓인지 딸의 손만 잡은 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딸과 함께 나온 조카들과 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전쟁 통에 의용군으로···63년 만의 재회
이날 상봉에는 여느 북측 사람들과는 달리 고운 피부를 한 참석자가 있었다. 김민례(87) 씨는 60여 년 전의 일을 정확하게 기억하며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당시의 상황에 대해 조카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가족들에 따르면 김 씨는 6.25 전쟁 당시 이화여대 재학 중에 북측에 의해 의용군으로 끌려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측에서 김 씨는 4명의 아들을 두고 가정을 꾸려 살고 있었다. 2011년 작고한 김 씨의 남편은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한 이후 농업대학 교원으로 일했다. 김 씨의 4형제는 모두 대학을 나왔고 이날 상봉에 함께 나온 맏아들 기철중(60) 씨는 현재 연구소에 재직하고 있다. 북한 내 엘리트 계층으로 보인다.
전쟁 통에 북한에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고 전해진 성하웅(82) 씨는 가족들과 만나면서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힘들어했다. 가족들은 미리 준비한 청심환을 주며 성 씨를 진정시키기도 했다.
성 씨는 6.25 전쟁 당시 모내기를 하던 도중 마을회의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성 씨의 4형제 모두 마을회의 참석 때문에 도화국민학교로 갔는데, 이 자리에서 이들은 북측으로 끌려가게 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성 씨의 다른 형제들은 장남이거나 몸이 약해 남측으로 돌아왔지만 하웅 씨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남측으로 귀환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이산가족들은 이날 오후 5시 단체상봉을 마무리한 뒤 오후 7시 남측에서 주최하는 환영 만찬에 참석한다. 이후 지난 상봉과 마찬가지로 개별 상봉 등을 거친 뒤 오는 25일 작별 상봉을 끝으로 설계기 이산가족 상봉이 모두 마무리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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