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동안 어딘가에 갇혀 단 하나의 TV 채널만 볼 수 있다면? 영화 <올드보이>의 오대수 같은 상황을 상상하고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면, 단언컨대 요리 전문 케이블 채널이다. 식탐이랄까 음식에 대한 관심이 보통 사람에 비해 적은 편이고, 직접 요리를 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요리 관련 프로그램 보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 연륜 있는 요리연구가 선생님이 우아한 손놀림으로 밑반찬을 만드는 아침 방송 프로그램부터 호주 어린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놀라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푸드TV <주니어 마스터셰프>나 각종 식도락 탐방 프로그램까지, 마땅히 볼 게 없네 하며 리모컨 채널을 돌리다 멈추는 곳은 늘 올리브 채널이나 푸드TV다.
최근 가장 재밌게 보고 있는 두 개의 프로그램 역시 올리브 채널과 푸드TV에서 발견했다. 바로 올리브 채널 <정재형의 프랑스 가정식>과 푸드TV <굿 잇츠>
음악 요정 정재형이 요리 요정으로 변신한 <정재형의 프랑스 가정식>은 새로운 콘셉트의 요리 예능이다. 정재형이 오랫동안 프랑스에서 유학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온몸으로 부딪히며 익힌 요리 실력과 불어 실력, 그리고 최근 몇 년간 활발한 방송 활동을 통해 익힌 예능감을 한데 집대성해 보여준다.
원래는 열 두 단계였는데 최근에는 줄어서 다섯 단계라는 프랑스 요리의 코스 단계에서 알 수 있듯이, 프랑스 요리에는 고고한 이미지가 있다. 그런데 우리의 요리 요정, 정재형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요리들은 <정재형의 프랑스 가정식>이라는 제목과 무척 잘 어울리는 ‘집 밥’ 같은 모습이다. ‘블랑켓 드 뽀’, ‘크래프 수제뜨’ 같이 불어라는 이유만으로 왠지 주눅이 드는 이름의 요리들이 정재형의 손에서는 뚝딱 뚝딱 쉽게 만들어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정재형의 프랑스 가정식>의 매력은 예능에 방점이 찍히는 요리 쇼라는데 있다. 제이미 올리버에게 허당 두 스푼을 가미한 것 같은 정재형은 “이거 안 찍어요?”라며 카메라맨에게 원샷을 요구하고, 듬성듬성 썬 토마토에 카메라가 가까이 다가오면 “크기는 다른데, 보지 마 자세히. 아항항항항”하며 웃는다. 달군 프라이팬에 손을 대고는 “앗, 뜨거!”라며 화들짝 놀라고는 부끄러워하고 열심히 자기 일 하고 있는 스태프에게 “너 놀지마. 이거 와서 쥐어봐”라며 수프를 젓게 한다.
MBC <무한도전> 출연을 기점으로 예능 프로그램에서 활약해 온 정재형의 캐릭터를 <정재형의 프랑스 가정식>은 영리하게 활용한다. 쉽게 자화자찬을 하지만 또 금세 수줍어하는 이 요리 요정은 이를테면, 학교 식당에서 마주치면 인사도 안 받아줄 것 같은 까칠한 얼굴을 하고서는 어느 날인가 손을 잡아끌고 가서는 직접 끓인 김치찌개에 따뜻한 밥을 먹여줄 것 같은 선배를 연상시킨다.
자신만만하게 베이컨을 잘랐지만 정작 너무 짧게 잘라 요리 모양이 흐트러지는, 한 마디로 ‘헐렁한’ 요리 쇼가 <정재형의 프랑스 가정식>의 색깔이라면, 푸드TV <굿 잇츠>
푸드TV가 속한 푸드 네트워크(Food Network) 내의 수많은 요리 프로그램 진행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말솜씨와 지식을 뽐내는 알튼 브라운은 <굿 잇츠>
알코올로 요리의 잡내를 날리는 이른바 ‘불 쇼’를 하면서 눈썹 한 번 움직이지 않는 알튼 브라운과 첫 회에 방송 시작하자마자 칼에 손을 베이고는 반창고를 찾는 정재형. 양식에서 빼놓을 수 없다는 ‘카라멜라이즈(Caramelize)’를 할 때도 두 사람의 차이는 극명하다. 알튼 브라운이 쉭쉭 여유롭게 휘저으며 진행을 이어가는 반면 정재형은 빨리 익지 않는 양파를 도중에 꺼내 황급히 잘게 썬다. 극과 극에 있는 두 진행자의 캐릭터와 이를 극대화한 연출로 만든 두 요리 쇼를 볼 수 있다면, 15년은 무리겠지만 15일의 감금 정도는 버틸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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