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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디자이너로 지내다보면 온갖 종류의 잡다한 정보와 이미지들을 보게 된다. 그중 대다수는 별 감흥이나 흥미를 끌지 못하는 시시한 것들이지만, 아주 간혹 생각의 틀 자체를 풀어놓았다가 다시 맞춰야 할 만큼 대단한 것들도 있다.
2011년 겨울, 기계비평가 이영준 선생이 기획한 전시 '김한용: 광고 사진과 소비자의 탄생'의 도록 작업 중 보게 된 김한용의 광고 사진들이 그랬고, 그 이듬해 일민미술관에서 열렸던 '고백-광고와 미술, 대중' 전시 때 접하게 된 수천 장의 한국 근현대 광고 자료가 또 그랬다. 이들을 통해 본 일제 강점기와 해방 공간, 50년대와 6~70년대는 내가 읽고, 듣고, 그려온 것에 비해 훨씬 생동감 있고, 화려했다.
이를테면 나는 이렇게 듣고 배웠다. 한국 근대는 흑백, 노동, 경제성장, 억압, 투쟁, 금욕, 침묵의 공간이었다고. 하지만 이 자료들이 내게 펼쳐 놓은 세계는 천연색의 소비세계, 웃음과 젊음, 낭비, 낙관, 그리고 성적 에너지와 소음이 넘치는 장소였다.
도록 <김한용, 광고사진과 소비자의 탄생>(김한용 지음, 가현문화재단 펴냄) 말미에 실린 글에서 이영준은 이 현기증 나는 격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그 기억이 맞는 것일까? 과연 1960년대의 한국은 못살기만 했을까? (…) 그가 1960년대에 찍은 원색의 광고사진은 지금의 첨단 기술로도 되살릴 수 없는 풍요로운 색채, 오늘날의 연예인이나 모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미묘한 표정, 투박하지만 멋진 글씨체로 가득한 감각적 풍요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들은 광고사진들이며 분명 이 안에는 상당한 분량의 거짓과 판타지가 뒤범벅되어 있을 테지만, 그 이미지들에게 나는 대번에 매혹되었다. 그리고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제 강점기의 사람들이, 유신 시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다들 한강물에 뛰어들거나 알코올 중독에 걸리지 않고 살아남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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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디자인>의 시놉시스는 대충 이렇다. 일제강점기는 당연히 근대적 디자인이라는 게 있을 리 없는 암흑의 세계고, 미 군정기는 미국원조에 의해 근대 디자인의 기틀이 마련되었지만 미국이라는 서구의 눈에 의해 선별되고 연출된 세계이며, 박정희와 함께 한 6~70년대는 경제성장이라는 과제와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질질 끌려갔던 세계였다. 80년대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어쨌든 올림픽이 있었고, 그 후엔 국가의 자리를 삼성, 현대, LG가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디자이너들을 이런 시대 조류 위에 동동 떠 있는 돛단배 위에 올려 놓는다. 이런 재미없는 일을 참 끊임없이 잘도 해오고 있었구나 싶다.
이 건조한 세계의 연출가는 국가다. 한국 근대 디자인은 그가 마련한 세트에서, 그가 주문하는 대로 연기하는 모범적인 배우의 모습을 닮았다. 이런 모양새를 위해 저자는 해방 정국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국가 주도의 디자인 정책과 그를 수행하기 위해 설립된 조직의 운영 방식을 세세하게 설명한다.
미 군정기에 미 국무성이 설립한 '한국공예시범소'부터 박정희 정권이 만든 '한국디자인포장센터', 각종 디자인 진흥 법안들과 'GD' 마크까지. 그리고 이 모든 활동의 근저에는 '디자인 국부론'이라는 반쯤 강제된 공감대가 있었다고 서술한다. 그 유명한 박정희 대통령의 '미술수출' 휘호부터 김대중 대통령의 어울림대회 개회사까지 디자인과 국가 경제를 연결시키는 사고 체계는 깊고 강건하다. 저자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대신 한국 디자인사 서술을 위해 동원하는 새로운 기준, 즉 근대주의와 민족주의라는 틀 또한 국가적 차원에서 주도하고 작동한 것들이다.
디자이너 개인의 창작보다 국가의 경제정책, 이데올로기 선전과 맞물린 디자인 경향을 더 중시하는 저자의 관점은 상당 부분 사실에 부합하며, 충분한 설득력을 지닌다. 만약 국가를 지워버리고 디자이너 개개인의 자율성과 창의성에 초점을 맞춰 한국 근대 디자인을 서술한다면 그건 객관적이고 엄정한 역사 서술이 아닌 판타지 롤 플레잉 게임에 가까워질 공산이 클 것이다. 마치 김한용이 반복해 찍었던 광고 사진 속에서 (개발도상국 국민으로선 어림도 없는) 백인 중산층 흉내를 내며 웃고 있는 모델들처럼 말이다.
요컨대 일제 강점기의 광고, 6~70년대 김한용이 찍은 사진의 세계가 보여주는 세계와 이 책이 설명하는 세계 사이엔 거의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인다. 이건 서로 만날 수 없는 양 극단의 세계다. 한쪽에선 윤택하고 기름기 흐르는 글씨체로 포도주와 치약, 껌과 탄산음료를 선전하고 다른 한쪽에선 저음의 목소리로 이 세계를 재단한다. 한쪽엔 백화점과 소비자가 있고 다른 한쪽엔 국가와 정책 입안자와 이를 충실히 수행하는 대리자들이 있다. 이 두 세계의 주인공들은 상징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서로 만날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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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포장이 이렇게 조야하고 상품이나 포장의 디자인이 외국의 것에 비해서 너무 뒤떨어져 있으니 어찌 우리나라의 상품이 팔릴 수 있으며 수출이 잘 되겠느냐."(<디자인포장> 4호, 1971년 8월호)
그래서 그는 한국디자인포장센터를 설립했다.
신군부에 의해 폐간된 월간 <디자인>의 발행인 이영혜 씨는 전두환 대통령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고 한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 (…) 세계 시장에서 이탈리아제 유명 와이셔츠는 한 벌에 1백 48달러에 팔립니다. 그러나 우리 제품은 단돈 8달러에도 겨우 팔립니다. 둘 다 똑같은 면을 쓰고 있습니다. 그 차이는 바로 디자인에 있습니다. 지난번에 폐간된 월간 <디자인>은 국내 유일의 디자인 전문지였습니다. 앞으로는 디자인이 국력입니다. 복간을 청원합니다." (디자인하우스 이영혜 사장이 81년 초 청와대에 낸 탄원서의 일부, 국민일보, 1999년 4월 16일자 '디자인은 국력, 투자해야 열매 맺죠'에서 인용)
그래서인지 월간 <디자인>은 폐간된 잡지 중 유일하게 복간되었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은 이런 연설을 했다고 한다. "우리의 디자인 산업은 선진국은 물론 후발 개발도상국보다도 뒤쳐져 있습니다. 세계 최고 품질의 의류를 수출하면서도 세계적인 유명 브랜드 하나도 갖고 있지 못한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98 한국디자이너대회 '어울림' 축사 중) 그는 디자인 산업의 육성을 100대 국정과제의 하나로 선정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말과 김대중 대통령의 연설 사이엔 30년의 시간이 있다. 그리고 또 십 몇 년이 흘렀다. 그럼에도 우리가 (공식적으로) 디자인에 대해 가장 자주 듣는 말은 대개 엇비슷하다. 디자인은 국가 경쟁력을 키우는 핵심적 역량 중 하나인데 우리 디자인의 현실은 아직 척박하다라는 것. 이를 통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엉뚱하게도 이거다. '40년 동안 도대체 뭘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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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계에서 이런 식의 비관주의는 흔한 것이다. <한국의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그 내용과 방향은 다르지만 저자가 일관되게 유지하는 태도는 냉랭한 비관주의다. 서두에서부터 장탄식은 시작된다. "우리는 우리 디자인의 역사에 관심이 없고, 윌리엄 모리스의 사상이나 바우하우스의 디자인에 대해서만 가르치고 배운다." 그 결과 누구도 우리에게 "현실의 디자인 문화는 이토록 척박한지 설명하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에 대해서 저자는 "불행히도 개방 이후 일제 강점기를 관통하면서 한국 내에서는 어떠한 근대적 움직임도 발견되지 않았다. 비록 형식적인 면에서 한국 사회 내부에 근대화가 진행되기는 했으나,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이루어진 기만적인 근대화로 인해 조형예술 분야는 오히려 퇴보"했다고 서술하며, 미 군정기 디자인 정책에 대해서는 "이방인이 주도한 디자인 진흥 프로젝트는 전통공예품의 질을 떨어뜨렸고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이 반영된 관광 상품으로 탈바꿈시켰는가 하면 미국 문화를 한국 사회에 확산시키는 등의 부작용"이 있었다고 평가한다.
7~80년대 디자인의 수동적 태도에 대해서는 "한국 사회 내부에 팽배해 있던 사회적 이슈인 산업재해, 노사분규, 노동 운동, 언론 탄압, 남북문제 등에는 무관심한 채 서구 디자인계의 이슈와 사조를 답습"했다고 힐난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1980년대를 가로질러 1990년대 중반까지 국내의 디자인에 대한 인식은 '수출 증진에 도움이 되는 도구로 활용되어야 한다'는 국부론적 수준을 넘지 못했다. 디자이너 스스로도 디자인을 창작하는 예술가보다는 기법 개발에 중점을 둔 도안 기술자 수준의 인식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고 평가한다.
편협한 독자로서 나는 저자의 이런 일관된 냉소에 동의하기 어렵다. 나는 현실의 디자인 문화가 그렇게나 척박한지도 잘 모르겠고, 일제 강점기에 조형예술이 퇴보했다는 평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든다. 일본이나 미국에 의해 진행되고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지속된 전통의 관광상품화가 불편하긴 하지만 별다르게 다른 방식으로 전통이 살아남을 수 있는 건가, 하는 의문도 든다.
저자는 성실한 태도로 일일이 사례를 들어 예증하지만 나로서는 이 책에 너무 많은 '선판단'들이 들어있다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 그러니까 디자인은 원래 그렇지 않아야 하는데 비정상적인 근대화 과정, 국가적 차원의 경제적 판단에 의해 왜곡, 변형되고 굴절되었다는 선판단 말이다. 그래서 이 책에 열거된 많은 디자인 결과물들은 미리 탑재된 선판단들을 확인하고, 강화하는 기능 외에 어떠한 역할도 부여받지 못한다. 이렇게 말끔하게 정리된 역사는 정당한가. 같은 시기 광고 사진들이 보여주는 '젖과 꿀이 흐르는' 듯 보이는 현실이 거짓인 것처럼, 미리 던져진 명제에 의해 한 줄로 엮여지는 현실 또한 거짓에 가까워 보인다. 현실은 그렇게까지 깔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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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나는 저자에게 이렇게 묻고 싶었다. '한국의 디자인 어느 부분이 당신을 매혹시켰습니까?' 어쩌면 이건 역사 서술가에게 묻기에 적절치 못한 질문일 수 있다. 매혹적인 대상에 대해서만 역사를 써야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역사 서술가 자신이 다루는 대상에 매혹당하지 않는 이상 그 책이 매력적이기는 어렵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나아가 그의 비전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설득해 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대상에 대한 즉각적인 매혹만을 토로하긴 쉽다. 마찬가지로 그에 대한 위험성과 폐해에 대해서만 집중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김한용의 사진이 전자에 속한다면 이 책은 후자에 가까운 자세를 취한다. 그 점이 못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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