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초보자였을 때 나는 실외보다 실내 공간을 선호했다. 야외처럼 춥거나 덥지도 않고, 힘들 땐 언제든 벤치에 앉아 쉴 수도 있고, 화장실 찾아 삼만 리를 떠나야 할 필요도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길을 잃을 염려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외공간보다 돌발 변수가 훨씬 적고, 사방의 벽들이 나를 조용히 엄호하는 것만 같은 안온한 느낌이 좋아서, 나는 '실내의 여행'이라는 안전한 도피처를 좋아했다.
그리하여 여행 초보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한 곳은 박물관이나 미술관이었다. 영화나 책에서만 보던 유명 화가의 걸작들을 직접 눈앞에서 보는 감동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체험이었다. 늘 활자중독증에 걸려 있던 내게 활자와는 전혀 다른 회화나 조각의 시각적 이미지는 사유의 폭을 넓혀주기도 했다.
글을 쓰기 위한 자료를 머릿속에 저장하는 기능적인 독서가 아니라, 삶 자체를 위한 경험, 다른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순수한 경험이 내게는 절실했던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데는 물론 그림을 보는 데도 전혀 조예가 없는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을 끄는 그림 앞에서는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느닷없는 감동에 휩싸이곤 했다.
힘겨운 20대의 끝자락을 붙들고 우울의 밑바닥을 천천히 기어가던 시절,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고흐의 작품을 보고 펑펑 울기도 했다.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에서는 모네의 작품이 마치 거대한 원형경기장처럼 파노라마식으로 전시된 모습을 보고는 '그냥 여기서 텐트 치고 주저앉아 며칠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의 엉뚱함에 화들짝 놀라 웃기도 했다.
여행초보자에서 여행중독자로 변해버린 지금, 나는 이제 '입장료를 내지 않는 공간의 아름다움'에 점점 깊이 빠져들고 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도 좋긴 하지만 광장이나 골목길이나 공원 같은 '공동의 장소'에서 천변만화한 사람살이를 바라보는 즐거움이야말로 여행의 백미라는 것을 천천히 깨달아가고 있다.
몇 년 전 건축과 미술의 도시 피렌체에서 나는 마치 온라인 게임의 '미션 클리어'처럼 하나둘씩 위대한 작품들을 독파하는 즐거움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러다보니 여행도 책읽기처럼 공부가 되어버리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시려왔다. 백면서생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 여행의 거창한 포부 중 하나였는데. 여행도 공부처럼 예습하고 복습하는 내 모습이 한심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내 마음과 몸을 가지고 갖가지 사소한 실험을 하다 보니 비로소 조금은 '풍류를 아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혼자 뿌듯해 하곤 한다. 물론 진정한 풍류와 멋, 음주가무의 재능을 천부적으로 타고 난 사람들에 비하면 여전히 '학습된 놀이'에 지나지 않겠지만. 가끔 '너는 놀이조차도 책으로 배우는구나!'라고 스스로를 책망하기도 한다. 조금씩 '놀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가는 나의 모습이 꽤나 기특하기도 하고 턱없이 가엾기도 하다. 공부를 하지 않을 때도 늘 성적을 걱정하고, 공부만 하는 것도 아니면서 항상 공부의 스트레스로 신나는 놀이에 방해를 받던 학창시절의 어리석은 습속을 아직도 버리지 못한 내가 한심하기도 하다.
그런데 여행은 그런 '나 자신을 바라보는 나'의 끈질긴 시선의 끈을 불현듯 확 놓아버리게 만든다. 나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나를 피곤하게 분석하는 나의 시선을 세상 바깥으로 돌려, 다만 바라보고, 다만 듣고, 다만 사랑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여행이 내게 준 최고의 선물들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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