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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골목길을 걷는 은밀한 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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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골목길을 걷는 은밀한 쾌락

[정여울의 '마음이 머무는 곳' <4>] 피렌체의 야경

여행초보자였을 때 나는 실외보다 실내 공간을 선호했다. 야외처럼 춥거나 덥지도 않고, 힘들 땐 언제든 벤치에 앉아 쉴 수도 있고, 화장실 찾아 삼만 리를 떠나야 할 필요도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길을 잃을 염려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외공간보다 돌발 변수가 훨씬 적고, 사방의 벽들이 나를 조용히 엄호하는 것만 같은 안온한 느낌이 좋아서, 나는 '실내의 여행'이라는 안전한 도피처를 좋아했다.

그리하여 여행 초보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한 곳은 박물관이나 미술관이었다. 영화나 책에서만 보던 유명 화가의 걸작들을 직접 눈앞에서 보는 감동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체험이었다. 늘 활자중독증에 걸려 있던 내게 활자와는 전혀 다른 회화나 조각의 시각적 이미지는 사유의 폭을 넓혀주기도 했다.


글을 쓰기 위한 자료를 머릿속에 저장하는 기능적인 독서가 아니라, 삶 자체를 위한 경험, 다른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순수한 경험이 내게는 절실했던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데는 물론 그림을 보는 데도 전혀 조예가 없는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을 끄는 그림 앞에서는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느닷없는 감동에 휩싸이곤 했다.


힘겨운 20대의 끝자락을 붙들고 우울의 밑바닥을 천천히 기어가던 시절,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고흐의 작품을 보고 펑펑 울기도 했다.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에서는 모네의 작품이 마치 거대한 원형경기장처럼 파노라마식으로 전시된 모습을 보고는 '그냥 여기서 텐트 치고 주저앉아 며칠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의 엉뚱함에 화들짝 놀라 웃기도 했다.


▲프로이트 박물관의 소파. 비엔나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박물관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프로이트 박물관은 ‘그림 없는 박물관’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흥미로운 공간이다. 소파에 누운 환자를 바라보며 환자의 꿈과 무의식과 트라우마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프로이트의 모습을 상상하며 소파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기억이 새롭다. ⓒ이승원

여행초보자에서 여행중독자로 변해버린 지금, 나는 이제 '입장료를 내지 않는 공간의 아름다움'에 점점 깊이 빠져들고 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도 좋긴 하지만 광장이나 골목길이나 공원 같은 '공동의 장소'에서 천변만화한 사람살이를 바라보는 즐거움이야말로 여행의 백미라는 것을 천천히 깨달아가고 있다.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이 아련하게 엿보이는 골목길. 이런 골목길에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아서 더더욱 여행자의 은밀한 기쁨이 배가 된다. ⓒ이승원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에서 뉘엿뉘엿 해가 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의 처연한 아름다움. 로마의 스페인 광장에서 '도대체 왜 이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곳에 모여서 서로의 일거수일투족을 흘깃거리며 은근히 미소를 짓고 있을까'를 생각하며 약간 정신 나간 사람처럼 키득거리는 시간들. 파리의 뤽상부르 공원에서 자기 집 안방만큼이나 편안한 자세로 저마다의 우정과 연애와 사색에 빠져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는 방만한 사람들에게 감탄하던 순간들. 이런 장면들이야말로 이 세상에 마지막 숨을 내쉴 때 한 번이라도 더 떠올려보고 싶은 아름다운 추억의 한 페이지라는 것을 알아가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몇 년 전 건축과 미술의 도시 피렌체에서 나는 마치 온라인 게임의 '미션 클리어'처럼 하나둘씩 위대한 작품들을 독파하는 즐거움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러다보니 여행도 책읽기처럼 공부가 되어버리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시려왔다. 백면서생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 여행의 거창한 포부 중 하나였는데. 여행도 공부처럼 예습하고 복습하는 내 모습이 한심했다.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물론 원본은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지만, 나는 박물관에 고스란히 보존된 실내의 다비드상보다 이렇게 밤낮으로 탁 트인 광장에서 뭇 사람들을 굽어보며 그들 모두와 열린 마음으로 눈 맞춤 하는 ‘광장의 다비드’가 훨씬 좋다. ⓒ이승원
그런데 '공부하지 않는 여행'에도 또 다른 학습이 필요했다. 무언가를 읽는 것처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감각의 문을 활짝 열고 가만히 보는 연습을 필요로 했다. '저게 무슨 음악인가'라는 질문 없이도 그냥 음악 그 자체를 듣고 기뻐하는 감각의 훈련이 필요했다. 제대로 놀고 쉬고 풀어지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노는 공부'야말로 자기 능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심각한 도전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내 마음과 몸을 가지고 갖가지 사소한 실험을 하다 보니 비로소 조금은 '풍류를 아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혼자 뿌듯해 하곤 한다. 물론 진정한 풍류와 멋, 음주가무의 재능을 천부적으로 타고 난 사람들에 비하면 여전히 '학습된 놀이'에 지나지 않겠지만. 가끔 '너는 놀이조차도 책으로 배우는구나!'라고 스스로를 책망하기도 한다. 조금씩 '놀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가는 나의 모습이 꽤나 기특하기도 하고 턱없이 가엾기도 하다. 공부를 하지 않을 때도 늘 성적을 걱정하고, 공부만 하는 것도 아니면서 항상 공부의 스트레스로 신나는 놀이에 방해를 받던 학창시절의 어리석은 습속을 아직도 버리지 못한 내가 한심하기도 하다.


그런데 여행은 그런 '나 자신을 바라보는 나'의 끈질긴 시선의 끈을 불현듯 확 놓아버리게 만든다. 나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나를 피곤하게 분석하는 나의 시선을 세상 바깥으로 돌려, 다만 바라보고, 다만 듣고, 다만 사랑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여행이 내게 준 최고의 선물들 중 하나였다.


▲마음을 여니 비로소 보이는 풍경들이 이제 시도 때도 없이 여행중독자의 가슴에 노크를 한다. 피렌체의 밤길에서 사랑스런 파스타집을 발견했다. 마치 엄마가 손만두를 빚듯 정성들여 온갖 파스타를 매만지는 앳된 요리사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가슴에 오래 남았다. ⓒ이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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