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신부님 가는 곳마다 살인 사건이...!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신부님 가는 곳마다 살인 사건이...!

[윤영천의 '하우, 미스터리'] G. K.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의 결백>

1.
"이 여섯 번째 인물을 봤을 때 발렝탱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 작달만한 신부는 전형적인 동부 촌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둥글넓적하니 둔해 보였으며, 눈은 북해만큼이나 공허했다."
<푸른 십자가> 중에서


▲<브라운 신부의 결백>(G. K. 체스터튼 지음, 홍희정 옮김, 북하우스 펴냄). ⓒ북하우스
이 초라한 신부의 이름은 J. 브라운이다. J가 무엇의 약자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미국과 남미의 교구를 담당한 적이 있으며 귀국 후에는 에섹스나 캠버웰 등 런던 외곽 지역의 사제로 일했다. 평온과 안식을 몰고 다녀야 할 성직자임에도 불구하고 신부님이 머무르는 곳에는 언제나 사건이 일어나는 것 같다. 물론 신부님이 바라는 것은 범죄자의 징벌이 아닌 그 영혼의 구원이다. 신부님은 한때 이름난 대도였던 플랑보를 회개시켜 탐정으로 만들고서는(?) 종종 함께한다.


브라운 신부는 1910년 펄프 픽션 잡지 <스토리 텔러(The Story-Teller)>에 실린 <푸른 십자가>라는 단편에 처음 등장했다. 이후 다섯 권의 단편집에서 활약했으며 (해리 케멜먼의 랍비 데이비드 스몰이나 엘리스 피터스의 캐드펠 수도사 같은) 후대 성직자 탐정은 물론, 미스터리 소설과 문학 전반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옥중에서 열렬한 찬사를 보낸 안토니오 그람시, 각별한 존경심을 표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등 브라운 신부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일화는 수없이 많다.


2.
셜록 홈스 시리즈와 <스트랜드 매거진>의 성공적인 만남 이후, 엇비슷한 잡지들이 줄을 이었다. 그리고 독특한 개성을 지닌 탐정들도 여기저기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유럽에서 미국까지 폭넓게 걸쳐 있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미스터리 역사에 있어 20세기 초엽은 한마디로, '슈퍼 탐정과 단편 미스터리의 시기'였다. 아마 당시 전 세계의 범죄자들은 편히 잠들 날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셜록 홈스를 비롯해 오스틴 프리먼의 손다이크 박사, E. W. 호눙의 괴도 신사 래플스, 아서 모리슨의 마틴 휴이트, 에마 오르치의 구석의 노인, 자크 푸트렐의 밴 듀슨 교수 등이 활약하던 시기였으니…….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은 100여 년의 시간까지는 이겨낼 수 없었다. 몇몇은 셜록 홈스의 아류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몇몇은 그나마 운도 좋지 않았다. 대부분 미스터리 장르의 역사를 언급하는 이런 글이나, 퍼블릭 도메인 도서로 간간히 모습을 드러낼 뿐 후대에까지 그 생명력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3.
브라운 신부는 한 세기의 시간을 이겨낸 거의 유일한 탐정이다(물론, 셜록 홈스는 제외하고). 이 보잘것없는 작은 신부가 현재까지 찬란하게 빛날 수 있었던 이유를 다소 서둘러 얘기하면, 이야기들이 셜록 홈스의 그것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흔히 셜록 홈스의 이야기에는 '대중적'이라는 수식어가, 브라운 신부의 이야기에는 '예술적'이라는 수식어가 붙곤 하는데 그 차이는 당연히 작가에서 비롯된다.


미술과 문학을 전공한 예술적 배경, 4000여 편의 칼럼과 분야를 가리지 않았던 100여 권의 저작물, 게다가 조지 버나드 쇼, 버트런드 러셀과 벌였던 흥미진진한 논쟁까지. G. K. 체스터튼은 평범한 대중소설 작가로 한정할 수 없는 광범위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미스터리 장르에 예술적인 신념을 불어넣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옹호자(defendant)라는 이름으로 남긴 유명한 칼럼 '탐정소설의 옹호(a defense of detective stories)'에서 체스터튼은 도시 문명을 한 편의 시로 고양시킨 탐정소설을 말한다.


"…… 탐정소설은 예술의 형태로서도 손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확실히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실질적인 가치를 갖고 있다. 탐정소설의 제일 중요한 미덕은 현대인의 삶에서 시적인 면을 표현해주고 있는 유일한 대중문학이면서도 가장 초기 형태라는 데 있다."


4.
브라운 신부 시리즈의 서막을 연 <브라운 신부의 결백>(G. K. 체스터튼 지음, 홍희정 옮김, 북하우스 펴냄)은 지금 읽어도 무척 근사한 작품이다. 브라운 신부는 이성에 대한 그릇된 태도만으로 가짜 사제의 정체를 파악하는가 하면, 모서리가 이상하게 잘린 종이로 범죄의 전모를 파악한다. 목이 잘린 남자의 다섯 가지 의문을 차례차례 논파하고, 그럴듯한 역사의 이면에 숨겨진 얘기와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 속에 숨겨진 질서를 손쉽게 드러내기도 한다. 특히 발자국 소리에 깃든 사회 계층적 의미를 파악하거나 누구도 볼 수 없는 투명인간의 정체를 파헤치는 이야기들은 당대 어떤 미스터리 단편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독특하다.


▲브라운 신부의 모델인 존 오코너 신부.
브라운 신부의 모델이 체스터튼의 친구인 존 오코너 신부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체스터튼은 조용하고 다감한 신부가 참혹한 범죄의 이면을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브라운 신부는 이렇게 놀라운 아이러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브라운 신부는 단서를 모아 추론하기보다는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탐정으로, 사건 현장을 둘러보기는 하지만 샅샅이 훑어 내려가며 담뱃재나 발자국을 확인하지 않는다. 브라운 신부의 놀라운 통찰력은 사건의 그림을 일시에 바꿔버리는데, 마치 보이는 걸 보지 못하는, 역설의 함정에 빠진 독자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행위와도 같다.


체스터튼은 이런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브라운 신부를 감춘다. 신부의 외모는 평범하다 못해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하며 행색마저 지저분해 남의 시선을 끌지 못한다(지적인 외모의 존 오코너 신부가 이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공식적으로 알려진 기록은 없다). 게다가 작품 초입부터 등장하는 일도 거의 없다. 각각의 이야기는 심리적인 설득력을 잃지 않도록 그 크기가 조심스럽게 조절돼 있고, 시점 등 다양한 서술적 장치와 탁월한 색채 감각을 통해 등장인물과 사건을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어느새 독자의 사각(死角)에서 나타나서는 하나의 경구를 들려주는 브라운 신부는 셜록 홈스 이야기와의 결정적인 차이점이자 체스터튼식 미스터리의 미학이다.


물론, 지나치게 생략된 세부와 현실성을 잃은 듯한 사건, 형이상학의 주변을 맴도는 탐정은 현대의 미스터리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다소 난감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탁월한 미스터리 애호가인 줄리언 시먼스는 브라운 신부의 이야기를 두고 '역사상 가장 뛰어난 단편 범죄소설'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더불어 이런 말도 덧붙였다.

"체스터튼의 단편들은 매일 섭취하기에는 너무 기름진 음식이다. 앉은 자리에서 두세 편을 읽어야지, 예닐곱 편을 읽어서는 안 된다."


4-1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자면 브라운 신부의 이야기는 최근에 영상화됐다. 2013년과 2014년 1월 BBC에서 두 시즌에 걸쳐 총 스무 개의 에피소드가 방영됐는데, 풍채 좋은 마크 윌리엄스가 브라운 신부를 연기했다. 브라운 신부를 연기한 가장 유명한 배우는 아마 알렉 기네스일 것이다. 그는 1954년에 영화 <탐정(the Detective)>에서 브라운 신부 역을 맡았다.

함께 읽어볼 만한 작품들

-<노란 방의 비밀>(가스통 르루 지음, 강호걸 옮김, 해문출판사 펴냄)
수습기자이자 아마추어 탐정 조제프 룰르타비유가 등장하는 시리즈 중 첫 번째 작품. 1907년에 발표된 이래 밀실을 소재로 한 작품 중에서는 가장 오랜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저널리스트 출신인 가스통 르루는 특유의 장황하면서도 세밀한 묘사와 다양한 인물들의 시점을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구석의 노인 사건집>(에마 오르치 지음, 이경아 옮김, 엘릭시르 펴냄). ⓒ엘릭시르
-<구석의 노인 사건집>(에마 오르치 지음, 이경아 옮김, 엘릭시르 펴냄)
스코틀랜드 노퍽의 ABC숍이라는 카페의 구석자리에 앉아 복잡한 매듭을 쉴 새 없이 만드는 구석의 노인은 <이브닝 옵저버>지의 여기자 폴리 버튼에게 역시 복잡하기 짝이 없는 사건의 진실을 자랑스럽게 털어놓는다. 구석의 노인은 흔히 말하는 안락의자 탐정의 전형으로 미스터리 역사에 이채로운 빛으로 남았다.


-<13호 독방의 문제>(자크 푸트렐 지음, 김우탁 옮김, 동서문화사 펴냄)
이름에 거의 모든 알파벳을 사용하는 '생각하는 기계' 오거스트 밴 듀슨 교수(Augustus S. F. X. Van Dusen, PH. D., LL. D., F. R. S., M. D., M. D. S.)가 등장하는 단편집. 연구와 사고, 논증에만 몰두하는 탐정이 등장하는 만큼, 이야기는 기묘한 수수께끼가 주를 이룬다. 작가 자크 푸트렐은 타이태닉호 사건으로 사망, 더 이상 후속 작품을 발표하지 못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