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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에 딴죽 걸다 능지처참…연산군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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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에 딴죽 걸다 능지처참…연산군은 왜?

[낮은 한의학] 연산군의 건강학 ①

조선 왕의 건강을 살펴보는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전 대구한의대학교 교수)의 '낮은 한의학' 연재가 매주 수요일 계속됩니다.

이상곤 원장이 조선 왕의 건강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당시 왕들의 모습이 오늘날 현대인의 그것과 아주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왕들은 산해진미를 섭취하였지만 격무와 스트레스, 만성 운동 부족 등으로 건강 상태는 엉망이었습니다. 이 원장은 "왜 왕처럼 살면 죽는지를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현대인의 바람직한 건강 관리법을 알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번 연재의 주인공은 연산군입니다. 연산군은 조선 왕 중에서 폭군의 대명사로 꼽힙니다. 폐비 윤 씨의 아들로서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심적 고통을 겪었던 그의 삶을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실록에 기록된 그의 행적은 보통 사람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연산군의 건강은 어땠을까요? 몰락하기 전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그는 과연 행복했을까요? <편집자>

조선 왕들 중 부모의 비참한 죽음을 알거나 목격한 사람은 3명이다. 연산군, 경종, 정조다.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 씨는 사약을 받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경종의 어머니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하다 사약을 받고 죽었다. 장희빈이 죽은 시점과 경종의 병력(病歷)이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가 복용한 처방들은 간질을 치료하는 것이었다. 정조는 평생 화증(火症)에 시달려 인삼은 거의 입을 대지 못할 정도였다.

스코틀랜드의 정신과 의사 로널드 데이비드 랭은 광기를 이렇게 평했다.

"광기는 정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돌파구다."

조선 역사상 성군(聖君)의 길을 가장 극렬히 역주행한 광기의 폭군으로 기록된 연산군, 그를 바라보는 좌표는 바로 어머니다. 연산군을 '있어선 안 됐던 임금'으로 매도하는 것보다 그의 광기를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는 작업이야말로 '왕의 한의학'이 추구하는 지향점이 아닐까.

어머니와 아이 사이의 애착을 진화론적으로 설명한 이론가는 영국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였던 존 볼비다. 그는 신생아는 완전히 무력하기에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 어머니에게 애착을 느끼도록 미리 설정돼 있으며, 어머니와 아이를 떼어놓는 상황은 아이에게 불안감과 공포감을 형성한다고 규정했다. 연구 결과, 어머니가 없는 아이들은 훨씬 거칠게 놀았고 과도하게 흥분할 때가 많았으며, 감동 결여성 인격 장애를 앓은 것으로 밝혀졌다.

동물 실험에서도 이런 관점은 증명됐다. 미국 위스콘신 대학 심리학과 해리 할로 교수 팀은 원숭이로 실험을 했다. 그때까지의 정설은 갓 태어난 새끼 원숭이가 젖을 먹으려 어미에게 달라붙는다는 것이었다. 실험 결과 새끼 원숭이는 엄마와의 '접촉'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온몸을 철사로 두르고 우유병을 든 가짜 원숭이와 젖병은 없지만 따뜻한 헝겊으로 몸을 감싼 가짜 원숭이를 우리에 놓아뒀다. 그러자 새끼 원숭이들은 후자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그러나 헝겊 인형 대리모와 함께 있던 새끼 원숭이들도 정상적인 원숭이로 크지는 못했다. 그 원숭이들은 우울했고, 다른 원숭이들과 친밀감을 느끼거나 교류하는 등의 행동을 발달시키지 못했다. 마치 자폐증에 걸린 것 같았다. 할로 교수는 그것이 부모와의 상호 작용 부족 때문이란 걸 밝혀냈다. 중요한 건 엄마가 아기에게 반응하고 상호 작용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부재와 불행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1476∼1506년, 재위 1494∼1506년)은 폭군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폭군으로서 연산군의 행보는 이전부터 시작됐다. 일화를 보자. 성종이 세자인 연산군을 불러 다가가려 하는데, 난데없이 사슴 한 마리가 달려들어 세자의 옷과 손등을 핥아댔다. 세자는 사슴이 옷을 더럽힌 것에 화가 난 나머지 부왕이 보는 앞에서 사슴을 발길로 걷어찼다. 이 광경을 지켜본 성종은 화를 내며 세자를 꾸짖었다.

성종이 죽자 왕으로 등극한 연산군은 가장 먼저 그 사슴을 활로 쏘아 죽여 버렸다. <조선왕조실록>은 이렇게 기록했다.

"성종이 승하하자 왕은 상중에 있으면서도 서러워하는 빛이 없으며, 후원의 순록(馴鹿)을 쏘아 죽여 그 고기를 먹으며, 놀이 즐기기를 평일과 같이 하였다."

실제로 연산군이 내린 형벌은 전례가 없는 잔인한 것들이었다. 손바닥 뚫기, 불에 달군 쇠로 당근질 하기, 가슴 빠개기, 뼈 바르기, 마디마디 자르기, 배 가르기,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등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연산군이 특히 좋아한 유희는 탈놀이인 처용무다. 기록을 보자.

"소혜왕후가 늘 왕의 행동이 무도함을 근심하니, 왕이 하루는 얼굴에 처용 탈을 쓰고 처용 옷차림으로 칼을 휘두르고 처용무를 추면서 앞으로 갔다. 그러자 소혜왕후는 크게 놀랐다."

"왕이 풍두무(풍두라는 탈을 쓰고 추는 춤)를 잘 췄으므로, 매양 궁중에서 스스로 가면을 쓰고 희롱하고 춤추면서 좋아하였으며, 사랑하는 계집 중에도 또 사내 무당놀이를 잘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모든 총애하는 계집과 흥청(興淸) 등을 데리고, 빈터에서 야제(夜祭)를 베풀었는데, 스스로 죽은 자의 말을 하면서 그 형상을 다하면 모든 사랑하는 계집들은 손을 모으고 시청하였다. 왕이 죽은 자의 우는 형상을 하면 모든 흥청도 또한 울어, 드디어 비감하여 통곡하고서 파하였다."

흥청은 연산군 10년에 나라에서 모아들인 기녀를 말한다. 탈과 가면은 얼굴에 드러나는 표정이나 그로 인해 알아차릴 수 있는 마음속 인격체를 숨긴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어릴 적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경우가 많다. 그때의 상처는 자기보호 기질을 발동시켜 스스로 마음을 닫게 한다. 종종 마음을 열 때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서둘러 자신을 꽁꽁 감추고 만다는 게 심리학적 분석이다. 연산군은 어쩌면 마음속 깊이 어머니의 부재와 불행을 느끼고 있었는지 모른다.

▲ 영화 <왕의 남자> 속 연산군(정진영). 그는 실제로 춤을 즐겼다. ⓒcinemaservice.com

천리(天理)보다 인욕(人慾)

본격적인 폭정의 계기가 된 것은 연산군 10년에 일어난 갑자사화다. 그 중심엔 어머니 폐비 윤 씨 문제가 있다. 사실 실록의 관점은 사관의 관점이고, 사관의 관점은 성리학이란 틀 속에서 유학적 성군을 기준으로 정립된 것이다.

조선의 왕도는 근본적으로 내성외왕(內聖外王)을 추구했다. 내부적으론 성인의 마음가짐을 배워야 하고 밖으론 왕 노릇을 하라는 뜻이다. 중국 북송의 유학자 주돈이의 저서 <태극도설(太極圖說)>은 성인(聖人)의 기준을 이렇게 규정한다.

"성인은 중정(中正)과 인의(仁義)를 본성으로 삼고 마음이 고요하면서 욕심이 없게 함으로써 사람이 걸어가야 할 도리를 세우는 것이다."

중국 원나라 주진형이 편찬한 의서 <격치여론(格致餘論)>에선 욕심을 음식남녀(飮食男女)라고 말한다.

"남녀의 욕정은 인간에게 관계된 바가 크고 음식에 대한 욕심은 몸에 있어 더욱 절실하다. 세상에는 이 둘에 빠진 사람이 적지 않다."

일부 사가(史家)들은 연산군의 잘못에 대해 패자의 기록으로 진실을 은폐한다고 하지만 조선 왕이라는 통념적 기준에서 본다면 연산군은 확실히 패륜적인 왕이다. 주자(朱子)의 어록을 집대성한 책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 음식에 대한 기준은 엄격하다. 주자는 제자들이 "음식에서 무엇이 천리(天理)이고 무엇이 인욕(人慾)이냐"고 묻자 "음식은 천리이지만 좋은 맛을 찾는 것은 인욕"이라고 대답했다.

실록 2년 2월 19일 연산군은 "사당(沙糖), 채단(綵緞), 술독을 푸는 빈랑·괘향(掛香)·각양의 감리(甘梨), 용안(龍顔) 등속의 물건을 성절사(聖節使)의 내왕편에 사가지고 오게 하라"고 명한다. 실록 8년 12월 4일엔 중국에 가는 사신을 보고 수박을 구해오라고 시킨다. 이에 장령(사헌부에 속한 정사품 벼슬) 김천령이 아뢴다.

"지금 듣건대, 북경에 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수박을 구해오도록 했다고 하는데, 그 종자를 얻으려고 한 것이겠으나, 대체로 먼 곳의 기이한 음식물도 억지로 가져오는 것이 불가하온데, 하물며 중국에서 구하는 일이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북경에 갔을 적에 들으니, 중국의 수박이 우리나라 것과 그다지 다른 점이 없다고 했습니다. 또 수개월이 걸리는 여정에 반드시 상하게 될 것이니, 우리나라에는 이익이 없고 저쪽 나라에서 비방만 받을 것입니다."

이후 김천령은 능지처참을 당한다. 연산군은 가감 없이 수박에 대한 보복임을 명시한다.

"이는 오로지 곧 천령의 짓인데, 전일에 재주를 믿고 마음을 오만하게 한 자다. 내가 일찍이 중국의 수박을 보고 싶어 하였거늘, 그때 천령이 크게 주장하여 막았다. 과연 임금이 다른 나라의 진기한 물건을 구하면 말하여 막아야 하는가? 이것이 어찌하여 그르다고 감히 말하는가? 아뢴 대로 능지, 적몰(중죄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가족까지 처벌하던 일)하고 그 자식은 종을 만들고, 그 나머지 민휘 등은 처음부터 사수(死囚)로 가두라. 또 천령, 덕숭은 효수하여 전시(展屍)하고, 권헌 등의 소는 삭제하여 버리라."

실록 11년 4월엔 "이번 성절사 가는 길에 용안(龍眼), 여지(枝)를 많이 사오고, 수박, 참외 및 각종 과일을 많이 구해오라"고 명한다. 여지는 양귀비가 좋아한 과일로 당나라 현종이 남방에서 생산되던 것을 장안성까지 실어오느라 백성들의 원망을 들었던 대표적 과일이다. 연산군은 거리낌 없이 여지를 구해올 것을 주문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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