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안현수 사태'와 '빙신연맹'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안현수 사태'와 '빙신연맹'

[편집국에서]빙상연맹, 오명 벗을 과제에 응답하라

나에게 사상검증을 강요하는 이념보다 더 황당한 것이 '마음 검증'을 강요하는 이념이다. 이제는 한물 간 줄 알았던 '애국주의'가 '안현수 사태'를 계기로 한 건을 하려드는 모양이다. 쇼트트랙 선수 안현수가 러시아로 귀화해 보란듯이 '빅토르 안'이라는 이름으로 금메달을 따내자, '애국주의' 잣대로 선악을 가리는 '대표 극우언론'에 나온 한 논객은 "개인적으로 불만이 있다고 해도 그렇지...애국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또다른 스포츠 전문가라는 논객은 "안현수의 부친도 문제가 있다"면서 "러시아 측과 흥정해서 상당한 액수를 받기로 하고 안현수를 귀화시켰다"고 흠집을 찾아냈다. '애국주의'라는 종교의 신자들이 아직도 상당수 있고, 이들에게 안현수 부자는 매국노로 비쳐질 수 있다.

그러나 '애국주의'가 유별난 이 극우언론말고 다른 보수언론들조차 "안현수 현상은 스포츠 내셔널리즘을 넘어선 문제"라고 진단하고 있다.

누리꾼들의 반응은 이미 '애국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이들에게 안현수는 "조국에 의해 억울하게 퇴물로 버려진 뒤 세계 최고의 선수로 부활한 인간승리"로 비쳐지고 있다. 마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어려운 외국 학자의 책이 실제로 읽어내는 독자는 별로 없으면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현상에서 보듯, 우리 사회는 '애국심'보다 '정의감'에 불타는 민심이 폭발 직전이다.

이런 여론의 흐름을 눈여겨본 언론이라면, 보수언론이라도 논조를 달리할 수밖에 없다. 애국주의를 거의 종교수준으로 신봉해서 변신이 어려운 극우 언론 빼고 말이다.

왜 '안현수 현상'을 둘러싸고 '애국주의'적 관점이 수세에 몰리는 것일까? 우선 '안현수 없는 한국 남자 쇼트트랙의 지리멸렬' 현상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2006년 토리노 올림픽 때 3관왕에 오른 안현수처럼,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한국 대표팀에 이런 선수가 있었다면, '애국주의' 언론조차 "퇴물인 줄 알았던 한국 출신 안현수가 러시아에서 영웅으로 부활했다"면서 오히려 "한국인의 위대함을 외국에서 떨친 사례"라면서 반가워했을 것이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애국주의'는 독재권력이 자기들의 체제유지와 이익을 위해 피지배층에 강요하고, 그들의 어두운 그늘을 감추는 용도로 써왔다. 조국이 개인에게 제대로 해주지 못하더라도, 그럴 수록 더 나은 조국이 되도록 개인이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 '애국주의' 논리다.

▲지난 15일 쇼트트랙 1000미터 결승전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안현수(빅토르 안)이 기쁨에 포효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파벌과 '1회용 애국 도구'된 선수

그런데 '안현수 사태'를 계기로 정작 주목할 것은 '애국주의 체제'의 대한빙상연맹이 선수 개인을 "조국의 1회용 도구"로만 취급해왔다는 사실이다. 또한 '애국주의'를 내세우는 조직에서 코치가 자기 파벌에 속하지 않는 선수들을 제거하기 위해, 자기 파벌 소속 선수들에게 "다른 나라에 메달을 뺐기더라도 성적을 못내도록 방해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는 '독재 체제'다.

그러다보니 누리꾼들은 빙상연맹을 '빙신연맹'이라고 조롱한다. 훌륭한 선수를 외국으로 내쳐 금메달을 따게 해주고, 정작 대표팀은 최약체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비애국주의적 지시'를 내린 코치도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조직 전체의 성과를 위해 문제가 되는 개인을 제거하는 것이 더 큰 애국이라는 논리로 포장할 수 있을 것이다. 10여년 동안 어쨌든 성적도 좋았다.


하지만 진실을 이렇게 '말장난 명분'으로 포장하는 것도 한 두번이나 가능하다. 시간이 지나면 결과가 보여준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성적이 뚝 떨어진다.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안현수가 3관왕,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이정수가 2관왕을 차지하며 '한국의 금밭 종목'의 위상에는 별 이상이 없는 것처럼 보여졌다. 하지만 소치 동계올림픽에 나선 한국 남자 쇼트트랙팀은 개막 전부터 대다수 전문가들로부터 '노골드' 가능성은 매우 높고, 자칫하다가는 '노메달'까지 우려되는 '역대 최약체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뚜껑을 열어보니 이런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18일 500미터 종목이 남아있지만, 메달권에서 먼 취약종목이다. 이렇게 되면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 이후 12년 만에 '노메달' 성적표를 받게 된다.

'마녀사냥'과 '애국주의' 차원 벗어나야


사태가 이 지경이 되다보니. 지금 인터넷 공간에서는 '마녀사냥'이 한창이다. 안현수가 러시아로 귀화하는 결정을 하도록 영향을 줬을 것으로 짐작되는 개인이나 단체를 '사이버 수사대'들이 찾아내 실명을 공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수사대 활동'은 '정의감'을 앞세운 또 하나의 폭력일 수 있다. 심지어 박근혜 대통령이 '안현수 문제'를 거론하면서 비리 척결을 주문하자, "제2의 안현수가 나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며 나선 새누리당 일각에서는 '안현수 사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들고 있다. 안현수의 소속팀이었던 성남시청팀을 해체한 이재명 성남시장이 안현수의 러시아 귀화를 결정할 수밖에 없도록 내몰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아들의 '금빛 복수' 성공으로 한결 여유를 찾은 안현수의 부친 안기원 씨는 17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성남시청 빙상팀이 해체되기 전 이미 러시아행이 확정됐고, 팀이 해체되지 않았어도 러시아로 떠나기로 결정했다"면서 "팀 해체가 귀화의 동기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또한 안기원 씨는 일일이 '마녀사냥'을 당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 사람 때문이 아니다"고 해명까지 해주고 있다.

하지만 안 씨가 분명하게 반복해서 거론하는 단 한 명이 있다. 안기원 씨는 언론인터뷰에서 "한체대 지도교수님이자 연맹의 고위임원으로 계시는 분 때문에 안현수 선수가 많은 피해와 고통을 당해서 러시아로 가게 된 것"이라면서 "그분의 말씀이라면 문제가 있어도 모든 것이 다 승인된다는 것은 빙상 부모님들 사이에서는 다 알려져 있는 내용"이라고 밝힌 바 있다. 실명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대한빙상연맹의 전명규 부회장이다.


이미 전명규 빙상연맹 부회장 겸 한국체육대 교수의 블로그에는 비난 댓글들이 쇄도하고 있다. 사실 전 부회장도 억울한 면이 있다. 안현수를 '특혜 시비'를 무릅쓰고 국가대표로 발탁되게 힘을 쓴 인물이 바로 전 부회장이기 때문이다. 쇼트트랙 계에서는 안현수가 '한체대의 황태자'로 비한체대의 '공적 1호'가 된 파벌의 수혜자로 알려진 것은 역설적이다. 사실 전 부회장의 독재적 결정으로 안현수는 16세 때 선발전도 치르지 않고 대표팀에 발탁됐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안현수 같은 '쇼트트랙 황제'조차 생사여탈권이 같은 사람에게 달려있는 '전횡 구조'가 뿌리깊다는 것이다. 안기원 씨에 따르면, 전 부회장의 지시를 거부하면서 안현수에게 각종 불이익이 따랐다고 주장하고 있다.

'불이익'이 어떤 것인지 회자되는 내용은 여러 가지다. 국가대표 선발전 방식이나 시기를 안현수에게 불리하게 일방적으로 갑자기 바꿨다는 것도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진위는 좀 더 따져볼 필요가 있다. 특정 선수 한 명을 배제하기 위해 특정 임원 한 명이 국가대표 선발전의 방식이나 시기까지 바꿨다는 것은 정말 믿기 어렵다.


오히려 안현수가 러시아에 귀화까지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버려졌다"는 섭섭함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안현수는 2008년 1월 훈련 중 무릎을 크게 다쳤고 2년 동안 3차례 수술을 받았다. 안현수 아버지는 "그때 현수가 재기할 수 있도록 빙상연맹에서 도와줘야 했다"면서 "다치니까 나몰라라 하는 식으로 신경 쓰지 않은 게 너무 섭섭했다"고 말했다.

빙상연맹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이는 한 매체의 기사에 따르면, 안현수에게 특별히 못해준 것은 아니라고 한다. 안현수와 같이 토리노 올림픽 3관왕이었던 여자 쇼트트랙의 진선유도 부상을 당한 뒤 결국 은퇴했고, 이정수·곽윤기 등도 부상 때문에 이번 대표팀 선발전에서 탈락한 것에서 보듯, 안현수가 '올림픽 3관왕'이라고 잘 돌봐주는 것이 오히려 '특혜 시비'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진선유 역시 외국에 귀화해서 안현수처럼 금메달리스트로 화려하게 부활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 뿐, 안현수와 판박이처럼 '버려진 선수'의 아픔을 겪었다. 당시 코치가 자기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진선유가 대표로 선발되지 못하도록 "중국에 져도 좋다"면서 다른 선수들에게 방해할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진선유가 2011년 불과 23세의 나이에 은퇴한 것에서 보듯, '올림픽 3관왕'도 '1회용 애국 도구'로 쓰이고 버려지는 풍토가 '한국 쇼트트랙 몰락'를 가져온 토양이 아닐까.


안현수가 29세의 나이에도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세계 최고의 실력을 보여주는 것을 보면 진선유의 은퇴도 '자발적인 은퇴'로 보기 어렵다. 전명규 부회장은 대표팀 감독으로 안현수를 발탁한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때부터 남자 쇼트트랙의 전성기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파벌 논란을 부른 전횡과 금메달리스트도 임무가 끝나면 버려지는 풍토를 '성공공식'으로 붙들고 있다가 지금 '제2의 솔트레이크 노메달' 참사에 직면한 셈이다.

파벌싸움 때문에 좋은 선수를 길러내지 못하고, 선수들이 소모품으로 전락하는 시스템을 바꾸는 과제에 빙상연맹이 응답할 때다. 그래야 '빙신연맹'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