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연합 군사훈련이 열리는 기간에 이산가족 상봉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던 북한이 14일 남북 고위급 접촉에서 돌연 입장을 바꿔 예정대로 이산가족 상봉을 실시해야 한다는 남한의 요구를 별다른 조건 없이 수용했다. 이를 두고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현 원광대 총장)은 대외 정세를 안정시켜야 하는 북한의 내부 사정이 작용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정 전 장관은 “지난 1월 1일 발표한 북한의 신년사를 볼 때 북한은 정세 안정을 필요로 하고 있다”면서 “내부의 한정된 자원을 농업 발전이나 축산 발전 등 경제 부문에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미 연합 군사훈련에 대응한 군사훈련은 북한에 굉장한 부담이 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대외적인 정세 안정을 위해 한미 연합 군사훈련의 수위를 낮추고 남북관계를 안정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북한이 이날 접촉에서 사실상 조건 없이 남한 정부의 입장을 수용한 것을 두고 정 전 장관은 “이번 합의를 구실로 북한은 추후 다른 것을 요구할 수 있다”면서 “금강산 관광 재개나 5.24조치 해제 등을 위해 이번과 같은 방식의 고위급 접촉을 요구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북한이 이대로 남한의 요구만 수용하고 끝내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남북이 이날 합의에서 “상호 관심사로 되는 문제들을 계속 협의하며 상호 편리한 날짜에 고위급 접촉을 갖기로 했다”고 합의한 것도 이러한 분석에 힘을 실어준다. 북한이 이러한 문제들을 협의하자고 제의할 때 남한이 회담에 나오지 않을 명분이 없다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 이산가족 상봉 합의했는데···제 역할 못하며 밀려난 통일부
이번 회담은 지난 8일 북한 국방위원회가 보낸 한 통의 전통문으로 시작됐다. 국방위는 전통문에서 남북관계 전반에 대해 논의하자면서 수신처를 통일부가 아닌 청와대 국가안보실로 지정했다. 남북관계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의중을 파악하겠다는 의도가 담긴 것이다.
이에 남한 회담 대표단은 김규현 청와대 국가안보실 1차장을 수석대표로 홍용표 청와대 통일비서관, 손재락 총리실 정책관, 김도균 국방부 북한정책과장, 배광복 통일부 회담기획부장 등으로 꾸려졌다. 남북회담의 주무 부서인 통일부가 사실상 회담을 주도하지 못한 것이다. 이에 대해 정 전 장관은 “북한이 국방위 명의로 청와대 국가안보실에 통지문을 보냈기 때문에 북한 요구에 맞게 대표단을 꾸렸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국방위 명의로 통지문을 보낸 북한은 자신들의 대표단 수석대표로 원동연 통일전선부 부부장을 수석대표로 내세웠다. 또 김성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서기국 부장과 전종수 조평통 서기국 부국장을 대표단에 포함시켰다. 5명 중 3명이 북한 내에서 이른바 ‘대남사업’을 관리하는 인사로 꾸려진 셈이다.
북한이 회담에 내세운 인물들의 면면을 봤을 때 남한도 이번 회담에서 통일부를 주축으로 움직였어야 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실제 지난해 6월 남북 당국회담이 무산됐을 당시 정부는 북한의 통일전선부가 통일부의 카운터파트라며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회담 대표로 나와야 한다며 이른바 ‘격’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정부 입장이 그때와 다르지 않다면 북한 수석대표인 원동연 부부장의 상대로 통일부 차관이 회담의 수석대표로 나서야 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정 전 장관은 “이번 회담은 남북이 서로의 최고지도자 의중을 파악한다는 탐색전의 성격이 있었기 때문에 청와대 인사가 수석대표로 나섰을 수 있다”면서도 “향후 진행될 고위급 회담에서는 통일부 인사가 수석대표로 나서야 한다. 이후 회담에서 진행될 내용들은 탐색전이라기 보다는 협상을 해야 할 사안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전담 부서가 나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통일부가 수석대표 문제를 청와대에 건의해야 하고, 청와대도 남북문제에 대해서는 주무부서인 통일부에 맡기고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번 회담 기간 중에 사실상 통지문 전달, 대언론 브리핑 장소 제공 등 실무적인 부분 이외에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못한 통일부가 식물 부서로 전락하는 것이 향후 남북관계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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