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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없는 사회, 신 없는 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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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없는 사회, 신 없는 섹스

[프레시안 books] 대럴 W. 레이의 <침대위의 신>

"가서 신이 없는 섹스를 즐겨라!"

이 문장은 수천 년 동안 종교에 의해 억압된 인간 성의 복권을 주장하는 한 무신론자 심리학자의 권리 선언이다. 종교와 인간의 불화는 여러 차원에서 끈질기게 진행되어왔지만, <침대위의 신(원제 Sex and God: How Religion Distorts Sexuality)>(김승욱 옮김, 어마마마 펴냄)의 저자 대럴 W. 레이는 신과 섹스의 불화에 주목한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의 추구를 수치심과 죄의식이란 기제로 왜곡, 억압, 감시, 통제해온 것이 종교의 주된 임무였다면, 이제 이 부당한 간섭에서 벗어나 인간 성의 실상을 정확히 알고 성을 합리적이고 윤리적으로 향유하는 일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침대위의 신>ⓒ
인간은 다른 무엇보다 성적 존재이고, 성의 향유는 번식의 목적에만 쓰이지 않는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이다. 이 본성에 심각한 왜곡을 가져온 것이 종교가 잘못 그려놓은 '성지도'(sexual map)다. 이 지도의 오류를 파헤치고 인간 자신의 본성에 맞는 지도를 다시 그려야 한다. 성적 인간의 복권과 자유롭고 평등한 성의 향유를 위한 합리적 사회계약의 수립, 저자 대럴 레이가 현대 인간이 시급히 수행해야 할 과제라 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저자가 이 책에서 수행하는 것은 세속사회의 건설을 위해 자유의지를 지닌 이성적 인간의 복권과 민주주의 사회계약을 주장했던 근대 초 계몽 사상가들의 지적 작업을 연상시킨다. 그가 복권하고자 하는 것이 이성이 아니라 육체이고, 무엇보다 성적 육체라는 점이 다르지만.

그간 인간의 성에 주목하고 종교의 성적 억압성을 추궁하는 사상적 조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세기 말 등장한 프로이트 정신분석학과 다윈 진화론은 일찍이 이 작업을 수행한 학문적 시도다. 이 중 저자는 진화생물학의 입장을 계승한다. 하지만 그의 시각이 진화생물학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을 신의 창조물이 아니라 오랜 진화과정을 거친 생명체로 본다는 점에서는 진화론의 입장을 공유하지만, 인간의 성을 종의 번식을 위한 수단으로만 설명하는 시각엔 동의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그는 성과 번식, 쾌락과 종의 재생산을 별개로 보는 프로이트의 입장에 가깝다.

자연세계에 존재하는 다른 많은 생물종과 달리, 인간은 번식기라는 특정 시기에 번식이라는 특정 목적을 위해서만 섹스를 하지 않는다. 인간은 시도 때도 없이 쾌락을 즐기고 상호유대감을 형성하기 위해 섹스를 한다. 또 인간 섹스는 유전적 요인 외에 환경적 요인과 문화적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

저자가 "3층짜리 지도"라 부르는 인간의 '성 지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물론 1층에 위치한 유전적 요인이다. 인간도 생물종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생물과 달리 인간은 아주 독특하고 개성적인 성적 취향을 발달시킨다. 인간은 1, 2차 성적 취향을 포함해서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아주 많다. 1차 성적 취향이란 동성애, 이성애, 트랜스 젠더 등 중추적 취향을 말한다. 하지만 이 1차 취향은 성의 발판일 뿐이고, 사람마다 특별히 성적 흥분을 느끼는 대상과 방식은 다르다. 이를테면 가슴에 털이 난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여성, 특정한 크기의 가슴을 지닌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남성, 입술이 관능적이고 키스도 잘하는 남자를 원하는 여성, 유혹적인 옷차림으로 유혹적인 행동을 좋아하는 남성, 지극히 지적인 남자를 좋아하는 남성…… 이 다양한 1, 2차 성적 취향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문화적 요인이다.

▲ 처녀가 임신했다는 이유만으로 가족에 의해 불길 속에 던져진 팔레스타인 여인 수아드의 자서전 <명예살인>(수아드 지음, 김명식 옮김, 울림사 펴냄). ⓒ울림사
종교가 작성한 성지도가 해악을 미치는 곳이 바로 이 문화 층위에서 형성되는 성적 취향이다. 종교는 일부일처제라는(이슬람교는 일부다처제) 결혼제도 안에서 자손의 생산을 위해서만 섹스를 하라고 명한다. 섹스는 신이 주신 "귀중품"이기 때문에 신의 율법에 맞게 신성하게 써야 한다고 지시한다. 신의 율법은 혼전성교, 구강성교, 항문성교, 자위, 동성애 등 생물학적 존재로서 인간이 다른 생물종과 함께 발전시켜온 수많은 성적 취향과 기쁨을 부도덕한 것으로 낙인찍는다. 저자는 이를 "성적 테러"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 테러는 명예살인을 당하는 이슬람 여성에게만 일어나지 않는다. 자위행위를 할 때마다 죄의식에 사로잡히는 사제, 창의적인 섹스를 즐기지 못하는 목사 부부, 자기 딸이 남자친구와 섹스를 했다는 말을 듣고 분노를 폭발시키는 아버지 등 이 테러의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인 사람들은 아주 많다. 종교가 저지른 성적 테러에 직면하여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지켜보며, 복수심이 강한 신이 특정한 성행동만 요구한다는 믿음에 겁을 집어먹은" 인간들은 "성적인 자기실현이나 충족에 이르지 못한 채 겉으로만 순종하면서 속으로는 비참한 삶을 살게 된다."(32쪽)

저자는 이 위선적인 삶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수많은 증거를 제시한다. 독자의 이해를 위해 몇 가지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1. 미국에서 종교 세력이 가장 강한 지역에서 이혼율도 가장 높다.
2. 아동 학대와 성 학대를 예측할 수 있는 최고의 지표 중 하나는 부모의 신앙심이 다. 부모의 신앙심이 깊을수록 자녀를 학대할 가능성이 높다.
3. 포르노 사용빈도가 가장 높은 곳은 유타 주(모르몬교가 우세한 주)와 미시시피 주(원리주의적 종교가 강한 남부 주)다. (…) 종교의 세력이 가장 강한 지역에서 포르노 사용빈도가 떨어지는 것은 일요일뿐이지만, 평일에 그 감소분을 충분히 채울 만큼 따라잡는다. (103쪽)


이 진술은 기독교 목사와 신자들을 격노시킬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한 때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가 무신론자로 돌아선 저자는 종교적 베일을 벗고 사실을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이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진실'이라고 주장한다.


종교라는 "사기극"이 왜곡시킨 인간의 성을 회복하려면 우리가 "당위"라 여기는 것들을 떠나보낼 수 있어야 한다. 그 당위 속에는 일부일처제라는 신화와 그것을 떠받치는 성적 질투라는 감정도 포함된다. 우리는 성적 경쟁자에게 질투심을 보이는 것이 인간 본성이라고 배웠다. 특히 여성의 질투는 칠거지악에 들어갈 만큼 나쁜 것이지만, 여성의 심리 속에 뿌리깊이 박혀있는 본성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질투는 여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자에게도 존재한다. 여성에게 질투는 자신과 아이를 위해 쓰여야 할 자원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감정이다. 반면 남성에게 질투는 여성을 소유하고 통제하려는 욕구다. 저자는 여성이 남성 이외에 다른 가용 자원을 획득할 선택지가 넓어지게 되면, 자원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질투 감정은 쇠퇴하고 질투가 유발하는 파트너에 대한 독점욕도 힘을 잃게 될 것이라고 본다. 저자가 현대사회에서 인간 본성에 반하는 일부일처제의 변화를 예감하는 이유다.

실제로 미국사회 일각에서는 '성적 일부일처제'를 '사회적 일부일처제'(쌍방 합의 하에 성관계는 다수와 맺고 결혼관계는 유지하는 것)로 바꾸거나 '다자간 사랑'(polyamory)을 실험하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저자는 강요된 일부일처제에서 벗어나 다른 성관계를 실험하려면 성적 파트너가 서로 합의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계약"과 "윤리적 지침"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는 고정관념에 도전하고, 자신에게 솔직하며,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잘못된 구획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신이 없는 섹스를 즐기기란 쉽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침대위에 올라서서 인간 성생활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신을 제거하고 성에 관한 문화적 편견에 맞서 싸울 수 있어야 한다. 생물학과 심리학이라는 현대 학문의 힘을 빌려 저자가 이 책에서 하고자 하는 바다. 저자는 성의 미래에 낙관적이다. 종교의 역할은 계속 희미해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새로운 성적 사회계약을 수립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한다. 자유롭고 평등한 몸의 관계를 만드는 일은 근대사회가 이루지 못한 미완의 과제다. 후기 근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떠안아야 할 작업이다. 하지만 종교의 역할이 성적 억압에만 있는 것으로 보는 단선적 시각이나 종교가 쇠퇴할 것이라는 진단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슬라보예 지젝은 "잠자는 거인이 깨어났다"는 표현으로 현대사회에서 종교의 부활을 말한 적이 있다. 도처에 성이 넘쳐나고 '즐기라'는 명령이 또 다른 형태의 외설적 억압이 되어버린, 이 계몽된 세속사회에서 왜 인간은 다시 잠자는 거인을 불어냈을까? 인간을 성적으로 억압하는 종교의 힘만으로 현대사회에서 종교의 부활을 설명하는 것은 단순하다. 종교의 성적 억압에 대한 분석만큼이나 종교의 지속성에 대한 분석도 필요하다. 인간의 종교적 욕구는 훨씬 깊은 곳에서 발원하는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욕구가 특정 종교의 배타적 진리 독점으로 흐르지 않도록 회의적 시각을 갖는 것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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