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든 노숙자가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것은 뉴스가 못 되는데, 주가가 2포인트 빠진 것은 어떻게 주요 뉴스가 될 수 있는가?"
어떤 운동권 선동문보다 더 통렬하게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순을 강타하는 이 물음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문 <복음의 기쁨> 중 일부다. 이것만이 아니다. 권고문은 "고삐 풀린 자본주의야말로 '새로운 독재'"라고 규탄한다. 교회 문서에서 늘 보아온 동정과 자선의 호소가 아니다. 회개 대상으로 자본주의부터 지목하고 본다.
바티칸은 이탈리아 좌파의 오랜 골칫거리였다. 전 세계 보수 기독교의 총본부가 수도 로마 한 복판에 버티고 있으니 골치가 아플 만도 했다. 이 나라에서 공산당이 아무리 수백만 당원을 자랑하고 득표를 유권자의 3분의 1로 높여도 가톨릭 교회라는 장애물을 넘어서기는 쉽지 않았다. 정치와 문화의 깊은 연관 관계를 고민한 안토니오 그람시 같은 좌파 사상가가 유독 이탈리아에서 등장한 이유도 이런 배경과 무관치 않다.
그런데 요즘은 바로 그 바티칸이 전 세계에서 가장 활기찬 자본주의 비판 메시지의 발원지가 돼 있다. 아르헨티나 출신 새 교황이 취임하고 나서 세상 사람들은 로마로부터 들려오는 뜻밖의 소식들에 당황하고 있다. 기대치 않았던 위안과 격려에 새삼 힘을 얻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미국의 보수 주간지 <뉴스위크>처럼 "교황이 사회주의자냐"라고 삿대질 하고 나서는 이들도 있다.
어찌 된 일인가? 사실 현대 가톨릭 교회사를 안다면, 최근 상황을 전혀 느닷없는 일로만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현 교황만큼이나 파격적인 행보로 세상을 놀라게 했던 요한 23세가 1962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하면서 가톨릭 교회에는 거대한 자기 혁신의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흔히 라틴아메리카의 특수한 현상쯤으로 치부되는 해방 신학도 이러한 파도의 일부였던 것이고, 이 흐름과 직접 연결돼 있는 아르헨티나인 교황은 한때 잠잠해진 줄만 알았던 혁신의 파도를 다시 풀어놓고 있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시야가 너무 가톨릭에 한정되고 만다. 새 교황을 통해 가톨릭 교회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은 좀 더 근본적인 가능성의 한 자락을 보여준다. 그것은 로마 가톨릭을 넘어, 더 나아가서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인류의 여러 종교 전통들이 현대적 재생을 통해 자본주의 세상에 대한 강력한 비판과 도전, 극복의 토대 중 하나로 부상할 가능성이다.
이런 기대가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여겨지던 때도 있었다. 자본주의의 청년기에는 분명 그랬다. 이 무렵 사회주의와 종교는 서로 앙숙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은 대개 계몽주의의 적자로 자처하면서 무신론을 주창했고, 대다수 종교 전통(사회주의 운동의 출발지가 유럽이었으므로, 주로 기독교)은 이에 맞서 기득권 세력과 동맹하곤 했다. 가톨릭 교회가 지배하던 남유럽이나 정교회 세력권인 동유럽에서는 이러한 적대 관계가 지속됐다. 그리고 이런 대립이 현실 사회주의의 종교 탄압이나 미국-한국 개신교의 극우 반공주의로 이어지기도 했다.
물론 처음부터 예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령 영국 노동당의 주요 기반 중 하나는 감리교회였다. 영국에서는 국교회인 성공회가 주로 기득권층과 연결된 반면 노동자들은 감리교회 같은 비국교회 종파를 선호했다. 그래서 노동당 창당 과정에서 감리교파 노동자 교회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런던 망명 시절에 노동자 집회가 교회에서 열리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내 심원한 변화가 나타났다. 사회주의 운동과 종교 전통의 만남이 더 이상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게 됐다. 19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사회민주당이 급성장하던 독일에서 그런 월경이 시작됐다. 전도자이자 설교자로 인기가 높았던 개신교 목사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가 1899년 돌연 사회민주당 입당을 선언했다. 단지 입당만 한 게 아니라 선거에 후보로 나서는 등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사회민주당 안에서도 그의 입장은 혁명까지 불사하자는 좌파였다. 그의 육성을 들어보자.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 오늘날 노동계급 편에 서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속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세리와 죄인들을 자기의 친구로 선언했던 것입니다. 그는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12명의 프롤레타리아를 자기 제자로 삼았습니다.
(…) 나는 매일 (…) 편지들과 자문을 통해 인간들의 참상과 고통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받은 충격이 너무나 강렬해서 견딜 수 없는 심정 가운데 목회자의 길을 통해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 내가 만나 본 모든 노동자들은 한결같이 변화의 필연성을 말했습니다. 그들은 나의 동지요 나는 당신들의 동지입니다.
1900년 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을 이제 우리가 다시 실천하려고 하는 것일 뿐인데 왜 우리가 그것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되어야 합니까? (…) 나는 전력을 다해서 여러분의 편에 서서 사회주의 사회 건설에 매진할 겁니다." (<혁명적 신앙인들>(손태규 엮음, 한국신학연구소 펴냄, 1987년), 25~26쪽)
블룸하르트 목사를 움직인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마주한 절박한 현실이었다. 모든 노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한 자본주의의 현실. 이에 대적하고 이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깨달음에 비하면 복음서의 구원과 사회주의 사회 건설이 얼마나 같고 다른지는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였다. 기독교 전통과 변혁 운동이 함께 힘을 모아 자본주의 문명을 이겨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자본주의의 눈 먼 질주는 끊이지 않고 제2, 제3의 블룸하르트를 낳았다. 당장 그의 후배와 제자들 사이에서 '종교 사회주의' 운동이 시작됐다. 그 가운데에는 독일 사회민주당이 제1차 세계 대전을 지지하자 당을 혹독히 비판하면서 혁명 노선을 지지한 이들도 있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칼 바르트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라틴아메리카의 해방 신학도 발단은 다르지 않았다. 중남미 민중을 고통에 빠뜨린 제국주의와 군부 파시즘에 대한 각성이 출발점이었다. 이러한 질서는 복음과 공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기독교도라면 마땅히 이 질서와 대결하고 그로부터 해방을 쟁취해야 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가 이러한 각성에 중요한 한 계기일 수는 있었지만 그게 중심은 아니었다. 기독교가 계속 기독교이기 위해 맞서 싸우지 않을 수 없는 대적의 발견이 핵심이었다.
해방 신학, 민중 신학 등 각성의 언어는 진화에 진화를 거듭했다. 그러나 각성의 원형은 다르지 않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기독교 신앙과 공존할 수 없는 또 다른 신앙임을 깨닫는 일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블룸하르트 시대보다 훨씬 더 강력해진 신앙 체계다. 그것은 신도 인간도 아닌 자본을 주인으로 모시는 광신적 종교다. 이 종교와 기독교를 같이 신앙할 수는 없다. 두 주님은 있을 수 없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단지 이것을 확인하는 것일 뿐이다. 이야말로 가장 '정통'적인 기독교다.
기독교만이 아니다. 어떠한 위대한 종교 전통도 자본 숭배와 공존할 수는 없다. 기독교가 자본의 우상 숭배와 맞서 싸워야 하는 것처럼, 불교도 자본을 우리 운명의 주인마냥 실체화하는 맹신을 타파해야 할 입장이다. 이슬람도 마찬가지고, 동학도 그렇다.
모두들, 자본주의가 인류 역사상 가장 무서운 힘을 획득한 광신임을 직시해야 한다. 이 우상과 대결하기 위해 위대한 종교 전통의 모든 상속자들과 계몽주의의 모든 계승자들은 연대해야 한다. 바티칸의 새 바람에 대한 세계인의 뜨거운 관심과 기대는 이러한 연합전선이 지금 얼마나 절박하게 필요한지 보여주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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