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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와 들국화가 마주치는 그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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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와 들국화가 마주치는 그 골목

[정여울의 '마음이 머무는 곳'] 베니스, 길 잃은 여행자에게 내리는 축복

어린 시절 골목길을 걷다가 '막다른 골목'이 나오면 문득 낭패감이 들곤 했다. 막다른 골목이 나왔다는 것은 길을 잃었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정해진 목적지가 있는 상태에서 막다른 골목을 만나면 당혹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예정된 목적지가 없다면, 그저 걷기 자체가 목적이라면. 막다른 골목은 또 하나의 열린 길이 된다. 아무 목적 없이 걷는다는 것은 그렇게 알 수 없는 해방감을 준다.


▲막다른 골목에서 만난 아름다운 풍경. 평범한 이탈리아 국기가 마치 머나먼 곳을 향해 손짓하는 노스탤지어의 깃발처럼 고즈넉하게 나부낀다. 길을 잃지 않았다면 결코 만날 수 없는 수많은 ‘사소한 풍경’들이야말로 베니스의 숨은 매력이다. ⓒ사진 이승원
베니스에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다는 것은 '아, 그럼 다른 길로 가면 되겠구나'하는 식의 기묘한 안도감을 느끼게 한다. 심지어 '이 막다른 골목길조차 참 기막히게 아름답구나'하는 상념에 빠지게 된다. 길을 잃지 않았다면 이 막다른 골목의 오롯한 풍경을 맛볼 수 없을 테니. 한 시간 쯤 전에 같은 길을 걷고 있던 낯선 여행자를 막다른 골목에서 마주치고 서로 멋쩍게 눈인사를 주고받기도 한다. '당신도 길을 잃었군요.' '예, 잃어버린 길도 나름대로 멋있는데요.' 이렇게 말없는 소통의 눈짓이 오고간다.


베니스 거리 어디서나 쉽게 거리의 악사들을 만날 수 있다. 물론 그들의 삶을 요모조모 자세히 뜯어볼 수는 없지만, 연주하는 그 순간만큼은 음악을 빚어내는 자와 음악을 즐기는 자들이 하나가 되는 멋진 순간들을 경험할 수 있다. 음악에는 신비한 친화력이 있어서 국경은 물론 우리를 '다르게' 만드는 모든 이질적인 요소들로부터 서로를 해방시켜준다. 듣다 보면 조금 서툰 연주들도 있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연주해서 '이젠 레퍼토리를 좀 바꾸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볼 때도 있지만, 음악이란 어떤 순간에도 마음의 빗장을 열어젖히는 힘이 있다.


▲내게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물어보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아리랑’을 연주해 주던 베니스의 바이올리니스트. 아리랑이 아니어도 좋다고, 무엇이든 당신이 좋아하는 곡을 연주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었지만, 이태리어를 전혀 모르는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조신하게 그녀의 아리랑을 지긋이 경청했다. ⓒ사진 이승원


읽을 때마다 그 의미가 드라마틱하게 바뀌는 작품들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같은 작품이 그렇다. 오래 전에 첫 번째로 <베니스의 상인>을 만났을 때는 샤일록의 잔혹함이 심장을 오그라들게 했다. 얼마나 원한이 사무쳤으면 돈 몇 푼에 그렇게 기상천외한 '살인의 아이디어'를 생각해낼 수 있을지, 한 사람의 머릿속에 둥지를 튼 분노와 증오의 역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생각해보며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알 파치노가 샤일록을 연기하고 제레미 아이언스가 안토니오로 분했던 영화 <베니스의 상인>을 볼 때는 두 사람 모두 막상막하로 매력적이어서 누굴 응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필요한 돈도 아닌데, 그저 친구가 필요로 하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의 돈을 기어이 빌리려 가는 안토니오의 우정은 인간적이기보다는 맹목적인 '우리가 남이가!' 정신으로 비치기도 했다. 대부호의 딸에게 청혼하러 가는 바사니오의 여행비를 마련하기 위해, 그토록 싫어하던 유태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을 찾아가는 안토니오. 그는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자신의 선박이 위험에 처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지만, 어쩌면 그의 심각한 우울증은 '내 전 재산이 바다 위를 표류하고 있다'는 자본가의 불안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다 속에 셀 수 없이 많은 말뚝을 박아 힘겹게 일구어낸 도시 베니스의 전형적인 풍경. 버스나 지하철은 물론 작은 자동차도 다닐 수 없는 베니스에서 유일한 교통수단은 곤돌라와 수상버스다. 하지만 베니스의 속내를 구석구석 엿볼 수 있는 최고의 교통수단은 뭐니 뭐니 해도 우리의 튼튼한 두 다리다. ⓒ사진 이승원
두 번째로 <베니스의 상인>을 읽었을 때는 포샤의 고뇌가 눈에 들어왔다. 포샤는 대부호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각지에서 몰려온 수많은 구혼자들의 청혼을 받지만, 그녀의 진짜 매력은 '부잣집 상속녀'라는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그녀의 기상천외한 두뇌게임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처음으로 흔들어놓은 남자 바사니오의 은인 안토니오를 구하기 위해 그녀는 남장을 하고 재판관의 역할을 자청한다.


개인 정보 관리가 지나치게 철저한 현대사회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참으로 '매력적인 빈틈'이 많았던 당시의 베니스 사회에서는 여성의 남장 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의 재판관으로의 변신도 가능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이 처음부터 가능할 리는 없고,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어버린 포샤의 진정한 용기가 <베니스의 상인>의 새로운 테마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 이야기의 배경이 현대사회였다고 하더라도 포샤는 약혼자의 은인을 구하기 위해 어떤 위험도 불사했을 것이다.


얼마 전에 세 번째로 <베니스의 상인>을 읽었을 때 내 눈에는 비로소 란슬롯이 보였다. 란슬롯은 <춘향전>의 방자 같은 인물이다. 주인공은 아니지만 이 인물이 없으면 극이 흘러갈 수가 없다. 나는 세 번째로 <베니스의 상인>을 읽었을 때야 샤일록의 진정한 불행은 전 재산을 잃은 것도, 딸이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야반도주를 한 것도, 베니스 전체에 망신을 당한 것도 아니라, 오랫동안 하인으로 두었던 란슬롯을 잃어버린 것임을 알게 되었다.

안토니오의 '살점 1파운드'와 샤일록의 전 재산이 왔다 갔다 하는 이 심각한 분위기에서 관객에게 '이 이야기는 그렇게 우울한 것만은 아니랍니다'라고 속삭이는 단 하나의 인물. 그가 바로 란슬롯이다. 숨이 막힐 것 같은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한 것이다'라고 속삭여주는 인물은 바로 방자나 란슬롯처럼 '비극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유머'를 간직한 사람들이다.


▲베니스 저잣거리의 풍경. 국내와 국외를 가릴 것 없이 어딜 가나 가장 생동감 넘치는 곳은 바로 장터다. 시장은 물건을 사고 팔려하는 욕망의 전시장에 그치지 않는다. 베니스의 시장은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로의 사람살이를 엿보는 순수한 인간적 호기심이 들끓는, 거대한 연극무대이기도 하다. ⓒ사진 이승원
여행자의 눈에는 그저 밝고 환하게만 보이는 베니스에도 사실 걱정거리는 많다. 늘 홍수와 침수의 위협을 걱정해야 하고, 일자리를 구하기도 쉽지 않으며, 물가 또한 많이 올랐다. 하지만 여전히 베니스 사람들의 행복 지수는 다른 선진국의 대도시들에 비해 훨씬 높다고 한다. 비가 왔다가도 금방 거짓말처럼 햇살이 환하게 도시를 감싸는 베니스의 축복받은 기후만큼이나 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활기차다. 맛있는 음식과 향기로운 술, 끊이지 않는 수다와 거리의 음악소리야말로 베니스를 여전히 살아있게 만드는 '란슬롯의 정신'이 아닐까 싶다.


란슬롯처럼 유머 넘치는 재담꾼이 우리 집에 있어만 준다면, 나는 천금을 준다 해도 그와 다른 사람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란슬롯은 이 모든 무거운 걱정들, 심각한 고민거리를 한꺼번에 날려주며 이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걱정해봤자 뭘 합니까. 오늘도 해는 떠오르고, 술은 넘쳐나고, 여인들은 저토록 아름다운데. 자, 걱정일랑 모두 잊고 한 잔 하십시다!' 란슬롯은 좀 덜 떨어진 조르바 같기도 하고, 좀 더 호들갑스러운 방자 같기도 하다.


나도 '웃음이라는 최고의 가면'을 쓰고 오늘도 힘차게 내게 주어진 삶이라는 등짐을 지고 콧노래를 부르며 다시 살아야겠다. 요새 내 콧노래의 테마곡이 되어버린 들국화의 '걷고 걷고'와 함께, 오늘도 씩씩하게, 걷고 또 걸어야겠다.


걷고 걷고

전인권 작사/작곡, '들국화' 연주와 노래


걷고 걷고 또 걷는다
새벽 그대 떠난 길 지나
아침은 다시 밝아오겠지
푸르른 새벽 길

꽃이 피고 또 지고
산위로 돌멩이길 지나
아픔은 다시 잊혀지겠지
끝없는 생각들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
모두 어쩌면 축복일지 몰라
걷고 걷고 또 걷는다
멀리 반짝이는 별지나

걷고 걷고 또 걷는다
새벽 그대 떠난 길지나
아침은 다시 밝아오겠지
푸르른 새벽 길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
모두 어쩌면 축복일지 몰라
걷고 걷고 또 걷는다
멀리 반짝이는 별지나

걷고 걷고 또 걷는다
새벽 그대 떠난 길지나
아침은 다시 밝아오겠지
푸르른 새벽 길

꽃이 피고 꽃이 지고
꽃이 피고 또 지고
아픔은 다시 잊혀지겠지

▲베니스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가면의 퍼레이드다. 첫 번째 베니스 여행에서 나는 가면을 고르고 고르다 지쳐 가장 무난하고 얌전해 보이는 가면을 사놓고 정작 가면은 써보지도 못한 채 황급히 비행기에 탑승해야 했다. 언젠가 베니스에 또 한 번 갈 수 있는 행운이 찾아온다면, 이 사진처럼 현란하고 강렬한 가면, 내가 누구인지 아무도 알아챌 수 없는 가면을 쓰고 내 안에 꿈틀거리는 강렬한 페르소나를 끄집어내보고 싶다. 나도 모르는 나, 그러나 왠지 반드시 내 안에 있을 것만 같은 또 다른 나는 어떤 모습일까. ⓒ사진 이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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