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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생각하는 중년, '내 세대' 역사 앞에 절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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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생각하는 중년, '내 세대' 역사 앞에 절망하다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의 최후] 헨닝 망켈의 <불안한 남자>

여기, 초로의 형사가 있다. 스웨덴 남부 소도시에서 사십 년간 형사로 일한 쿠르트 발란데르. 육십을 눈앞에 두어 은퇴가 머지않았다. 수사에만 묻혀 산 그이지만, 얼마 전에는 도심의 아파트를 떠나 시골에 바다가 보이는 집을 마련한다는 오랜 꿈을 이뤘다. 검정 레트리버 강아지도 들였다. 이름은 스웨덴 불세출의 테너에서 따서 유시라고 지었다.

개보다 더 중요한 가족도 새로 생겼다. 역시 경찰관인 딸 린다가 손녀 클라라를 낳은 것이다. 오래 전 이혼하고 경찰 동료 외에는 친구도 없는 발란데르에게 이제 사위도 생겼고, 사돈도 생겼다. 걱정이라면 심해지는 건망증 정도일까. 당뇨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까. 체중 조절에 번번이 실패해서 인슐린 주사도 맞아야 하는 게 성가시긴 하지만 별수 없다. 외로움도,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불안한 남자>(헨닝 망켈 지음, 신견식 옮김, 곰 펴냄). ⓒ곰
그러나 뜻밖의 방향에서 사건이 발란데르를 찾아온다. 사돈인 퇴역 해군 장교가 어느 날 감쪽같이 실종된 것이다. 얼마 지나서 안사돈까지 종적 없이 사라진다. 부유하고 보수적인 부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딸 때문에 발 벗고 나선 발란데르는 사돈 부부의 실종에 심상치 않은 배후가 있음을 간파한다.


사돈은 1980년대 초 스웨덴 앞바다에 정체불명의 타국 잠수함들이 출몰했던 사건에 평생 집착하며 당시 올로프 팔메 총리를 독대하여 진상 규명을 탄원할 정도였는데, 최근 부쩍 불안해하고 경계했던 모습으로 보아 아무래도 그 일과 관계있을 것 같다. 안사돈이 시체로 발견되고 그 소지품으로 구소련 기밀문서가 나오면서 심증은 사실로 밝혀진다. 발란데르는 팔자에 없던 스웨덴 현대 정치사 공부를 하면서 과거를 뒤진다. 자신이 제삼자가 아니라 조연으로 포함된 최후의 사건을 파헤친다.


그렇다. 이것은 발란데르 형사 최후의 사건이다. <불안한 남자>(헨닝 망켈 지음, 신견식 옮김, 곰 펴냄)는 쿠르트 발란데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추리소설 시리즈의 열 번째이자 마지막 권이다.


무뚝뚝하고 일밖에 몰라 사적인 인간관계는 실패투성이지만 수사관으로서의 통찰력이 뛰어난 발란데르의 이야기들은 결코 멋지거나 통쾌하지 않다. 되레 씁쓸하고 우울하다. 범죄가 해결되어도 뒷맛이 개운치 않다. 돈, 치정, 복수 등 시대를 초월하는 인간의 동기들이 살인, 사기, 납치, 협박 등 시대를 반영하는 갖가지 강력 범죄들로 나타나고, 그 앞에서 발란데르와 동료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둑을 가까스로 막고 있다는 무력감에 시달린다. 발란데르에게는 초능력도, 천재성도, 고도의 지성도 없다. 두꺼운 분량의 대부분은 그가 희박한 단서를 쫓아 이리저리 발품을 팔고, 허방을 짚고, 막다른 골목에 부딪치는 내용이다.


중년 남성의 피로감이 뚝뚝 떨어지는 그 문장들이 왜 중년 남성도 아닌 내게까지 카타르시스를 줄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어설피 분석할 마음도 애저녁에 접었다. 어쨌거나 분명한 점은 카타르시스가 있다는 것이니까. 자칭 중년 탐정 애호가로서 숱한 소설을 뒤져 온 내가 결론적으로 가장 사랑하는 인물도 여전히 발란데르이다. 억지스럽지 않은 그의 불완전함은 내 결함을 돌아보게 하고, 그의 탓만은 아닌 그의 쓸쓸한 삶은 내 삶을 돌아보게 한다.


발란데르를 창조한 스웨덴 작가 헨닝 망켈은 1991년부터 1999년까지 정확히 일 년에 한 권씩 9권의 발란데르 소설을 썼다. 주인공의 매력, 그리고 현대 스웨덴 사회의 명암을 예리하게 묘파한 이야기로 스웨덴은 물론이고 스칸디나비아와 독일에서 일찌감치 인기를 끌었던 시리즈는 2008년 영국에서 방영되기 시작한 BBC 드라마의 원작으로서 영어권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리고 2009년, 망켈이 정확히 10년의 공백을 깨고 내놓은 것이 바로 <불안한 남자>다.

▲BBC 드라마 <발란더>에서 주인공 발란더(발란데르의 영어식 발음)를 연기한 배우 케네스 브래너. ⓒBBC


망켈은 왜 10년이나 지나서 후속작을 선보였을까. 영국 <가디언>에 실린 인터뷰에 따르면, 망켈은 발란데르의 삶 자체가 사건에 휘말리는 이야기를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불안한 남자>를 읽고서 돌아보면, 이 말은 곧 발란데르를 통해서 자기 세대의 삶을 돌아보고 싶었다는 뜻인 듯하다. 좌파 활동가로도 유명한 망켈에게 자기 세대의 삶이란 자기 세대의 정치 사회적 역사를 뜻한다. 그동안 별 생각 없이 아버지를 따라서 사민당에 투표하는 인물로 그려졌던 발란데르에게 자신의 인생을 더 폭넓은 맥락에서 되짚을 기회를 안긴 것이다. <불안한 남자>에 등장하는 1980년대 잠수함 사건은 아직까지 미제로 남은 실제 사건이다. 스웨덴이 중립을 표방하면서도 사실상 미국에 줄 선 것이나 다름없었다는 망켈의 시각이 책에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그런데 망켈이 <불안한 남자>를 쓴 것은 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불안한 남자>는 무엇보다도 늙어감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발란데르는 침대에 누워 죽음을 생각하는 일이 잦아진다. 인생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옛 애인이 암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본다. 그래서 슬퍼하다가도, 죽어가는 것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내심 안도한다. 과거의 과오가 떠올라 후회하다가도, 어차피 다르게 살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자위한다. 젊음은 먼 기억이고 중년은 지나갔다. 이제는 어떻게든 웃으면서 무대를 떠날 수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남아 있는 유일한 낙이 수면제로 잠을 청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절로 자기 연민에 빠진다. 그러나 자신은 평생 나쁜 편이 되지 않으려고 애썼다는 데서 만족해야 한다고 체념한다. 누구의 인생이든 다 그렇지 않을까? 글쎄, 발란데르는 모른다. 몰라서 두렵다.


발란데르의 이런 모습은 고스란히 망켈에게 겹친다. 망켈이 자신과 똑같이 1948년생으로 설정한 발란데르는, 망켈은 한사코 인정하지 않지만, 작가의 분신일 수밖에 없다. 발란데르가 겪는 늙어감의 어려움, 인생을 돌아보고 의미를 부여하고픈 욕구, 여생에 대한 두려움, 그럼에도 차마 버리지 못하는 희망은 망켈의 일면이 아닐 수가 없다. <불안한 남자>는 주인공과 작가가 함께 여정을 마무리하는 지점이다.

▲작가 헨닝 망켈. ⓒDavid Shankbone (출처 Wikimedia Commons)
그러나 그 방식은 얼마나 냉정한가. <불안한 남자>의 맨 마지막 문단은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잔인하고 애달프다.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더는 밝힐 수 없지만, 그 마지막 문단 때문에라도 이 책은 시리즈 최후의 작품이 될 수밖에 없다. 주인공에게 끝까지 일말의 연민도 허락하지 않는 작가의 태도는 잔혹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발란데르 시리즈의 매력이 원래 그런 것이었다. 카타르시스도 거기에서 나온다.


이쯤에서 이 글을 마무리할 수 있다면 좋겠다. 시리즈의 완결을 아쉬워하며, 울적하긴 해도 고마운 마음으로 발란데르에게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다면.


그런데 그럴 수가 없다. <불안한 남자>가 발란데르 최후의 사건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생겼기에,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불과 일주일 전, 헨닝 망켈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폐와 목에 종양이 있고, 다른 부위로도 전이되었을지 모른다는 소식을. 망켈은 지금부터 항암 치료를 받는 과정을 스웨덴 일간지에 기고하겠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글은 망켈의 회복을 기원하면서 두서없이 황망하게 맺는다. <불안한 남자>를 비롯한 열 권의 발란데르 시리즈가 망켈의 전부는 아니었고(그는 희곡과 청소년 소설도 많이 썼다), 발란데르 시리즈를 즐기기 위해서 꼭 망켈을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이렇게 되고 말았다. <불안한 남자>가 그의 모든 것을 다 담게 되어버렸다.


사족 1)
발란데르 시리즈를 '프레시안 books'에서 예전에도 소개한 적이 있다. 무엇무엇이 번역되어 있는가 하는 이야기는 그때 했기에 이번에는 하지 않았다. 함께 읽어주시면 고맙겠다. (☞바로가기 : "'도가니'에 빠진 스웨덴, 그 남자가 나섰다!")


사족 2)
발란데르가 등장하는 책이 사실 딱 열 권은 아니다. 망켈은 쿠르트 발란데르의 딸 린다 발란데르를 주인공으로 삼아 일종의 스핀오프를 쓰겠다고 밝히고, 2002년에 예정된 삼부작의 첫 권을 냈다. 그러나 스웨덴 TV 시리즈에서 린다 발란데르를 연기했던 여배우가 2007년 자살하는 일이 벌어지자, 더는 쓰지 못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니 린다 발란데르 시리즈에서 쿠르트 발란데르가 등장할 일도 이제 없다.


사족 3)
발란데르 시리즈가 열 편으로 마무리되는 게 자연스러운 이유가 또 있다. 발란데르 시리즈는 스웨덴 부부 작가 페르 발뢰와 마이 슈발이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썼던 마르틴 베크 형사 시리즈에 빚을 지고 있다. 오늘날 '스칸디나비아 느와르'라는 이름으로 세계적 열풍을 일으킨 북유럽 추리소설들은 모두 그 부부 작가의 경찰 소설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그 마르틴 베크 시리즈가 딱 10년 동안 딱 10권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래서, 순전히 개인적인 망상이지만, 나는 망켈이 일부러 10권을 채웠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망켈이 인정하든 말든, 발란데르 시리즈는 마르틴 베크 시리즈에게 바치는 오마주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닮았다. 특히 장점이. 언젠가 마르틴 베크 시리즈도 소개할 수 있기를 바라는 사사로운 욕심을 굳이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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