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에 대한 일방적인 특혜와 투자가 여전한 상황에서 우리 대학에서 한국어는 교육언어로서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 이른바 상위권 대학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이 문제는 공론의 장에서 시급히 논의되어야 할 정도로 심각하다.
1월 29일자 창비주간논평에서 윤지관(尹志寬) 교수는 교육부의 대학구조개혁안을 비판하면서 우리 대학의 구조적인 문제로 강고한 대학서열구조와 사학(私學)의 과도한 비중 두 가지를 거론했다.(전문 보기) 그중에서 대학서열구조는 한국대학이 직면한 교육언어 문제의 근본적 배경이다. 그런데 이때의 서열구조는 소위 'SKY'로 표상되는 국내판이 아니라 그것을 업그레이드한 수상쩍은 국제판이다.
대학교육의 질은 실제로 어떠한가
한국대학들은 해외의 이름난 대학평가에서 자신의 서열을 올리는 일에 온 힘을 쏟고 있다. 법인화된 서울대학교의 경우 영국의 대학평가 기관인 THE(The Times Higher Education)에서 실시한 2013년 세계대학평가에서 44위를 기록하여 한해 전의 59위에서 15계단이 상승했고, 영국의 또 다른 기관 QS(Quacquarelli Symonds)의 평가에서 37위를 달성했음을 안팎으로 내세운다. 세계대학평가에 이름을 올리기 힘든 여건의 대학일지라도 교육부의 국제화 지표에 맞춰 점수를 올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세계 대학랭킹을 올리는 지름길은 외국인 교수와 학생 비중을 높이고 각종 국제교류 프로그램을 확대하며 영어로 진행하는 강좌의 비율을 높이는 것이다. 물론 해외기관의 대학평가가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는 별도로 따질 문제이다. 그러나 소탐대실, 본말전도라는 말이 딱 맞아떨어질 정도로 한국대학은 교육언어에 대한 성찰이 부재하여 교육의 질이 떨어지는 사태를 방치하고 있다.
필자가 직접 겪은 사례를 하나 들어보겠다. 지난 학기 학부 영국소설 수업에서 필자는 시험 외에 짧은 보고서를 영어와 한국어로 각 하나씩 받고, 기말논문은 국문 제출을 원칙으로 했다. 우리말로 진행하는 이 수업에는 정규교육과정 12년을 외국에서 마친 한국 국적의 학생('글로벌인재특별전형II' 입학생)이 다양한 전공에 걸쳐 여러 명 있었다. 한국어 읽기와 말하기에는 지장이 없지만 글쓰기는 태부족한 이 학생들을 고려하여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국문 기말논문이 정말 자신 없는 학생은 사전면담을 통해 영어논문 제출을 허락받고 A4 1장의 국문초록(抄錄)을 더 내는 동시에 감점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포학생이더라도 짧은 국문 보고서가 어느 정도 수준이 되면 사전면담을 통해 기말논문도 한국어로 쓰도록 유도할 작정이었다.
우리말을 못해도 문제는 없다?
그런데 뜻밖에도 국내에서 자란 비영문과 학생 하나가 영어로 논문을 쓰겠다고 나섰다. 외국어고 국제반(해외대학 진학반) 출신이라 3년 내내 영어로만 글을 써서 한국어로는 글을 잘 쓰지 못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미 중등과정에서부터 국제중고, 외고 등은 한국어를 교육언어로 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대학 4년 동안 한국어 실력 없이 영어능력만 가지고 해나갈 수 있다고 믿는 학생이 점점 늘어나는 현실에서 새삼 이 일은 선생으로서 충격이었다. 영어라는 단일종목에서 승리하면 그만이라는 (부모세대가 주입한) 근시안적 사고는, 우리 젊은이들의 미래가 한국어를 주종목으로 하여 영어 혹은 다른 외국어까지 포함된 이종경기 내지 다종경기에서 성과를 거두는 데 달려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또 다른 예로, 외국인 대학원생의 경우 논문제출자격시험에서 영어답안 작성 허용은 관행이 되어 있다. 이것이 이공계 등 일부 전공에서는 무방할 수도 있겠지만, 한국어 구사능력이 모자란 석박사학위 소지자 배출이 서울대의 위상에 장기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지 전공에 따라서는 심각하게 따져봐야 마땅하다. 중국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의 외국어시험 답안지를 영어로 작성하는 경우에 이르면, 해당 언어의 전공교수가 채점하면서 수험생들로부터 영어실력을 시험당하는 꼴이니 우스갯거리감이다.
순수한 외국인을 뽑는 '글로벌인재특별전형I' 지원자는 1)TEPS 551점이나 그에 준하는 공인영어시험 성적, 2)한국어능력시험(TOPIK) 3급 이상의 성적, 3)앞의 둘에 해당하는 능력을 입증하는 서류 중에서 하나 이상을 제출하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 한국어를 전혀 몰라도 영어성적만 있으면 입학이 가능하지만, 그런 학생까지 감당할 정도로 입학 후 한국어 교육체계가 준비되어 있는지는 매우 회의적이다. 학부와 대학원의 한국어 입학자격 기준이 똑같이 '3급 이상'으로 설정된 것도 수긍하기 어렵다.
이 사례들은 서울대에 국한된 것이지만, 우리 대학당국과 교수집단에게 교육언어에 관한 기본 철학과 공감대가 부재함을 보여준다. 우리말이 서툴지만 잠재력 있는 지원자를 뽑으려면 그들이 수학(受學)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개별지도를 포함하는 알찬 한국어 교육체제를 갖춰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한국대학은 이 문제에 대한 원칙과 비전, 그에 따르는 투자가 부족해서 사실상 겉치장을 위해 학부교육을 망치는 위험한 불장난을 하고 있다.
교육현장에서 한국어의 위상을 바로 세워야
외국의 영어학교를 다닌 학생이 한국어 글쓰기 과제를 중시하는 수업에서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앉아 있을 때, 졸업을 앞둔 교포 학부생이 찾아와 한국에서 취직해서 살아야 하는데 우리말 글쓰기가 시원치 않아 고민이라고 털어놓을 때, 글로벌인재 특별전형이 얼마 안 되는 규모의 정원 외 전형이라서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대학당국에 화가 치미는 것은 급한 성질 탓만은 아닐 것이다.
근대 국민국가 중에 우리처럼 단일언어 공동체는 예외적인 사례이며 이중언어 내지 다중언어 공동체가 일반적이다. 언어, 인종, 문화뿐만 아니라 중앙집권화된 정치공동체의 측면에서 한국은 비교적 동질적인 공동체를 장기간 유지해왔다. 이런 특수한 사정 때문에 한국인은 하나의 민족국가가 하나의 민족어를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편협한 경향이 많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 대학은 더더욱 외국어교육과 국제화에 제대로 투자함으로써 다양성의 도전에 응전력을 키워야 하며, 대학의 영어 및 외국어 강의는 탄탄한 원칙 위에 강화되어야 옳다. 바람직하지 못한 면도 많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대외개방적 경제를 운영하는 대한민국이 아니던가.
그러나 이 모든 것에는 한국어(교육) 정책 또한 제대로 수립되고 충분한 재정적 뒷받침을 받아 그것이 실행된다는 전제가 앞서야 한다. 한국을 배우려는 외국인 학생들이 크게 늘어나는 고무적인 상황에서 대학의 교육언어로서 한국어의 위상을 분명히 정립하고 이를 뒷받침할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국어를 무시하는 자기비하적 자세일 뿐이며 영어에만 투자하면 그만이라는 사이비 국제주의와 직결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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