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은 안녕하시던가요?
설 연휴를 막 지난 때라 '고향'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급한 일도 많지만 이때가 아니면 또 잊기 마련이다. 연례 행사로 되새기는 것 가지고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이렇게라도 생각할 것, 그리고 할 일로 남겨놓아야 한다.
마침 교육부가 얼마 전 '대학 구조 개혁 추진 계획'을 발표했다. 2015년부터 2023년까지 9년 동안 전국 대학의 입학 정원을 16만 명 감축하겠다는 것이다. 대학들로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다. 그 가운데서도 '지방' 대학이 차별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 틀림없다(어법에도 맞지 않는 '지방'이란 표현이 영 마땅찮지만 모두들 쓰는 대로 따르자).
대학 구조 조정은 고등 교육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일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면 이 역시 여러 가지 사회적 불평등의 한 측면이나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수도권과 지방으로 극단적으로 나누어지는 한국 사회의 공간적 불평등.
격차와 양극화는 모든 영역에서 점점 더 심해지고, 더구나 악순환의 고리로부터 빠져 나오지 못한다. 삶의 조건이 나빠지면 사람이 떠나고 그래서 조건은 더 나빠진다. 또 사람이 떠난다. 새로운 계기나 탈출구가 마땅치 않다는 것이 더 심각하다.
교육에서 시작했지만, 사실 의료만큼 격차가 심각한 분야를 다시 찾기는 어렵다. 직접적이고 즉각적이기 때문이다. 분만이나 응급 의료 문제는 어쩌면 너무 익숙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방의 환자가 서울로 몰리는 문제도 낯선 것이 아니다. 모르긴 해도, 이번 명절에 고향을 찾은 많은 사람들이 가족이나 친지로부터 부담과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야기를 들었으리라.
2013년 10월 11일 <강원도민일보>의 보도를 보자. 강원도의 정선, 양구, 인제, 고성, 양양에는 산부인과 병·의원이 아예 없다. 화천과 평창은 보건의료원에 산부인과가 있지만 분만실이 없어 출산은 불가능하다.
이곳에서는 임신과 출산을 위해서 도시로 더 큰 도시로 가야 한다. 이른바 '출산 난민' 신세다. 그 시간과 비용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갖가지 부담이란. 모성 사망비(출생아 10만 명당 출산 중 사망 여성 수)가 서울과 비교해 세 배 이상 높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짐작하는 대로 응급 의료도 상황이 비슷하다. 민주당 남윤인순 의원이 2013년 가을에 내놓은 자료를 보자. (☞관련 기사 : "예산 삭감으로 35개 군 지역 응급 의료 공백 우려") 적어도 전국 9개 시·도 35개 군 지역은 응급 의료의 공백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현실감을 높이기 위해 이 지역들을 여기에 적는다.
△인천 옹진군 △경기 양평군 △강원 횡성군, 화천군 △충북 옥천군, 영동군, 진천군, 음성군, 청원군, 보은군, 단양군 △충남 서천군, 태안군 △전북 무주군, 순창군 △전남 담양군, 곡성군, 구례군, 영암군, 무안군, 장성군, 완도군, 진도군 △경북 군위군, 청도군, 칠곡군, 예천군, 봉화군, 영양군, 울릉군 △경남 의령군, 고성군, 하동군, 함양군, 거창군.
물론, 실제 상황은 더 구체적이고 어려움은 제각기 다르리라. 당연히 행정 구역(군)이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같은 군이어도 광역시나 다름없는 곳도 있을 것이다. 어떤 곳은 명목만 시에 속할 뿐 사정이 더 나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응급 의료 공백의 위협은 행정을 넘어 실재한다. 여기에다 그 많은 곳곳의 취약 지역(예를 들어 섬)을 보태면!
분만과 응급 의료는 어떤 경우에도 기본이 충족되어야 할 의료다. 그러나 결코 덜하다고 할 수 없는 문제가 같이 존재한다. 바로, 1차 보건의료의 일상적인 '결핍'이다. 응급은 아니라도 고통스럽고 기능을 떨어뜨리는 건강 문제는 많다. 이것 역시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사람답게 살기 어렵다.
따로 분석할 것도 없이, 노인 인구 급증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추세가 여러 원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하다. 경북 예천군은 전체 인구의 31.5%, 강원도 양양군은 23.8%, 전남 보성군은 32%가 노인이다. 대부분 농촌에서 초고령사회란 말이 무색하다.
이들 지역에 어떤 보건의료 체계가 갖추어야 하는지는 전문가가 아니어도 쉽게 알 수 있다. 무엇보다, 만성 질환의 지속적인 치료와 관리를 포함한 충실한 1차 보건의료가 충분하게 가까워야 한다.
하지만 지방의 1차 보건의료를 떠받치는 토대는 부실하다. 기본적인 인력이 모자라고 시설도 부족하다. 이를 뒷받침할 재정과 제도는 허약한 상태다. 사정이 나아질 기미가 없다는 것이 더 나쁘다.
의사만 해도 그렇다. 그동안 빈자리를 채우던 공중보건의조차 숫자가 크게 줄어들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전국 공중보건의 배치 현황'을 보면 2009년 5287명이었던 공중보건의의 숫자는 2013년 8월 현재 3881명으로 약 27% 줄었다.
시설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전북 진안군은 2008년 이후 병원급 의료 기관이 한 곳도 없다. 그래서 어려운 사정 가운데서도 군립 의료원을 만드는 중이다. 2014년 1월 17일 <전북도민일보>의 표현을 그대로 옮긴다. "진안에서 의료원은 저렴하게 이용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치료받고 살기 위한 마지막 자구책으로 인식"할 정도다.
더하고 뺌이 없는 현상이고 현실이 이렇다.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지역 불평등을 바라보는 기본 틀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주장한 적이 있다. 경제와 산업의 시각을 벗어나야 한다. 인권, 그 중에서도 '발전에 대한 권리'가 지방 살리기의 핵심이다. (☞관련 기사 : 인권에 기초한 지방 살리기)
오해를 피하기 위해 밝혀 둔다. 여기서 '발전'이란 경제 성장의 다른 말이 아니다. 유엔이 말한 권리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발전에 참여할 권리"를 뜻하는 만큼, 발전이란 경제적 성장은 물론, 정치적, 사회문화적 진보를 모두 포괄한다.
또한 '권리'라는 말도 다시 명확하게 해야 하겠다. 여기서 권리란 발전한 지방, 삶의 질이 높은 지역이 누릴 '자격'과 무관하게 권리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권리가 되는 순간 단순한 시혜를 벗어나 권리를 보장할 책임이 동시에 발생한다. 해도 좋고 안 해도 그만인 것이 아닌, 의무와 책임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책임과 의무의 주체는? 당연히 우리 사회 전체, 그 중에서도 특히 국가가 일차적 주체다. 해석하자면, 국가(그리고 현실적 주체로서의 정부)는 지방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책임을 다해야 한다.
지방 의료원의 예를 갖고 국가의 책임을 말해보자. 진주의료원 폐쇄 사건에서도 이미 보았다. 지방 의료원은 국가가 지방 사람들의 권리에 상응하는 책임을 소홀하게 하는 대표적인 현장이라 불러도 좋다. 건강과 삶의 관점이 아닌, 재정과 경영 효율화의 관점에서 줄기차게 '자력갱생'을 요구한다. 이것이 국가 책임의 현주소다.
조금은 좋은 소식도 있다. 도립인 지방 의료원으론 못 견뎌서 '군립' 의료원을 운영하는 곳이 생겨나고 있다. 울진은 이미 2003년부터 의료원을 운영하고 있고, 전북 진안군은 개원을 앞두고 있으며, 강원도의 정선군 의료원은 올해 착공될 예정이다. 기초자치단체가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는 몸짓으로 해석해도 좋으리라.
하지만 이들 군 의료원도 다른 지방 의료원과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다. 단언하지만 재정 '자립'을 이룰 가능성은 거의 없다. 뻔히 앞이 보이는 상황에서 국가가 책임을 다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특히 중앙 정부가 재정적으로 이들을 지원하고 옹호할 책임을 져야 한다.
경제와 지방 자치의 중요성을 모르지 않는다. 수도권 안에서의 불평등과 불균형도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수도권에 대비되는, 양극화의 한 당사자로서의 지방은 더 후퇴할 곳이 없을 정도로 내몰리고 있다.
보통의 정책을 가지고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데에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공공 기관 지방 이전이 그렇게 시끄러웠지만, 그 정도로도 턱없이 모자란다. 무엇이 되었든 한두 가지 굵직한 정책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그렇다면 다시, 새로운 틀이 필요하다. 그리고 사회적 동력을 여기에 모아야 한다. 경제와 효율, 경쟁과 적자생존이라는 틀은 맞지 않는다. 건강과 삶의 질, 형평성과 사회 연대가 그 자리를 대신해야 옳다.
그냥 부모 형제가 살고 있어서가 아니다. 지방을 더 나은 삶의 현장으로 바꾸어가기 위해서, 그 결과로 한국 사회 전체를 더 나은 공동체로 만들어가기 위해서다. 지역과 지방의 발전(이것이 곧 사회 발전이다), 그 틀을 바탕부터 새로 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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