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이야기 <27> 편에서 이어집니다. - 편집자)
앞편에서 설명했듯, 서울 구로공단 벌집 주택은 20세기 후반 서울이 산업화를 거치며 남긴 부산물이다. 이러한 벌집 구조 주택은 산업 도시화 과정을 겪은 곳이라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비슷한 형태로 나타난다. 특히 19세기 산업혁명의 시발지인 영국, 그 중에서도 당시 강력한 산업 도시성격을 띄었던 맨체스터의 대표적 주택 유형과 매우 흡사하다. 주택의 외양은 조금 다르지만, 맨체스터 역시 층별로 공간을 쪼개놓은 주택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는 주택 소유주가 임대료 수입을 극대화하기 세운 전략이다.
이러한 주택에서 살았던 노동자들의 처참한 삶 또한 여러모로 닮아 있다. 산업혁명 당시 한 성직자가 영국 런던의 노동자 밀집 지역을 묘사했는데, 당시 노동자들 역시 구로공단 노동자들과 비슷하게 좁은 공간에 모여 살았다. 종함하면, 11제곱미터(대략 3.3평) 크기의 방에 부부와 4~5명의 아이들, 그리고 때때로 조부모까지 함께 거주하기도 했다. 구로공단 벌집보다 조금 큰 방에 7~9명이 살았던 것이다.
어린 여성 노동력이 많았던 점도 유사하다. 1844년 영국 하원에서 발표된 연설문을 보면, 당시 직물 산업 주요부분 전체 노동자(41만 명) 중 여성이 남성보다 많았다. 이 가운데 18세 이하 여성 노동자는 전체 여성 노동자(24만 명)의 46%에 달했다. 일반적으로 14~15세부터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하였고, 9세부터 공장 노동에 투욉되는 경우도 있었다. 2교대가 만연해, 한 조는 낮 12시간, 다른 조는 밤 12시간 근무하였다.
1844년 영국 하원에서 발표된 연설문을 보면, 당시 직물 산업 주요 부분 전체 노동자 (41만 명) 중 여성이 남성보다 많았고, 18세 이하 여성 노동자는 전체 여성 노동자 (24만 명) 의 46%(11만 명)에 달했다. 그만큼 어린 여성 노동력이 많이 존재하였다. 공장 노동을 시작한 연령을 보면, 9세부터 공장 노동에 투입되는 경우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14~15세부터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하였다. 2교대가 만연하여 한 조는 낮 12시간, 다른 조는 밤 12시간 근무하였다. ①
물론 당시 영국의 상황은 70년대 서울 구로공단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처참하였다. 하지만, 구로공단의 70년대 역시 만만치 않다. 일반적으로 2평에 3명가량이 살기도 하였으나, 심한 경우에는 6~8명이 같이 살기도 하였다. 또한 신경숙 작가처럼 16세에 공장 노동을 시작한 사례가 많았다. 구로공단에서 역시 여성 노동자가 남성보다 많았고, 18세 이하 노동자 비중 또한 상당하였다. 이들은 19세기 영국 여성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2~3교대로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처참한 조건은 산업 역군과 세계에서 가장 근면한 민족이라는 단어로 포장되었다. 이는 임금이 적었기 때문에 살기 위해 자연히 장시간 근무를 해야만 했던 장시간·저임금 노동 강요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영국보다 약 100년이나 지난 후에야 제대로 된 산업혁명을 경험한 서울에서, 19세기 산업혁명 때의 노동자와 비슷한 삶을 산 노동자들이 존재했고 그들의 터전이 아직도 서울 한복판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서울 구로공단 주변에는 ‘닭장’이라는 이름의 공원들 월세 자취방이 있다. 아마도 그들 스스로가 지어낸 자학적인 이름일성싶다. 한두 평짜리 비좁은 방을 대개 6~8명이 공동으로 세를 얻은 다음 서로 번갈아가며 숙소로 이용한다고 한다. 24시간 쉬지 않고 가동하는 수출공단의 공장들은 흔히 3교대 근무로 공원들이 일을 하기 때문에, 가령 1조와 3조가 각각 4명씩 조를 짜면 근무조가 아닌 4명이 그들이 말하는 닭장에서 잠을 잘 수 있다. 이들은 닭장에서의 잠을 또 ‘칼잠’이라는 색다른 말로 부른다. 방이 너무 좁아 두 사람씩 머리의 방향을 반대로 한 채 다리를 서로 포개고 누워야 한대서 생긴 이름인 모양이다." ②
2~3층의 양옥 주택에 수십 개의 방이 있는 벌집 구조를 보면,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저소득 서민들 간의 훈훈한 커뮤니티가 존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착각이다. 주인은 세입자에 대해 관심이 없었고, 세입자들도 바로 옆 방에 누가 거주하는지 몰랐다. 또한 비록 한 방에 같이 산다고 하지만, 잠자는 시간대가 달랐기 때문에 같은 방 거주자들이 다 같이 모이기도 쉽지 않았다. 따라서 커뮤니티적인 성격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그 뒤 1989년 2월 가리봉동에 이른바 ‘닭장집’이라는 월세방을 마련해 ‘지옥’같던 기숙사에서 해방됐다. 나는 ‘14호’라는 호칭으로 통했다. 내 방은 가로 180cm 세로 200cm인데, 책상과 비키니 옷장을 들여놓으니 세로가 140cm로 줄어 대각선으로 누워 자야 했다… 아침에는 한 칸밖에 없는 화장실 앞에 남녀 구분도 없이 길게 줄을 선다. 대문을 들어서면 ‘현금과 귀중품은 집에 두지 마시오’라는 글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③
"형과 함께 벌집에서 자취를 하고 있는 이(군)은 ‘세든지 2개월이 넘었지만 옆방에 누가 사는지 모른다’ 며 ‘처음 상경했을 때 가끔 만나던 고향친구들도 이제는 거의 만나지 못하고 있으며 고작 직장동료 3~4명과 어울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 군은 야근을 마치고 오전에 집에 돌아와 연탄불이 꺼진 것을 발견한 경우가 많으나 이웃 방에서 탄불을 얻으려 해도 모두 문이 굳게 잠겨있어 … 이웃 없는 이웃을 이루며 살고 있다. 집주인은 보증금 낼 때 한번 보고 본 적이 없어 탄불을 빌러 갈 생각조차 않는다며 이때는 도대체 사람들이 함께 산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고 때로는 두렵다는 생각마저 든다고 이 군은 말했다. (중략)
지난 76년 여관을 팔아 가리봉동의 방 30개짜리 벌집을 구입, 운영하고 있는 박모 씨는 ‘세 든 사람의 얼굴조차 모른다’며 ‘매달 각 호실별로 방세와 전기료 수도료만 받고 있을 뿐 다른 관계는 없다’고 말했다. 박 씨는 처음에는 각방마다 연탄불을 봐주는 등 세 든 공원들에게 신경을 썼으나 금방 떠나버리는 경우가 많고 나중에는 일일이 세 든 사람을 알고 지내는 것이 오히려 귀찮을 때가 많아 요즈음은 말도 않고 지낸다는 것…." ④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는 사실은 한 방 거주자들끼리는 나름의 룰을 정해서 생활을 하였다는 점이다. 만약 3명이 한 방에 거주하는 경우, 3교대로 서로 자주 만나는 시간은 없더라도 다음과 같은 규약을 만들었다. 옷장, 화장대, 취사도구 등을 들여놓고 같이 공유함에 있어서, 만약 한 사람이 이사를 가면 적당히 감가상각을 해서 새로 들어오는 사람에게서 돈을 받아 나가는 사람에게 준다. 3교대를 하기에 앞서 먼저 잔 사람이 다른 사람 몫까지 해두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따라서 다음 사람을 위해서 밥을 해주는 서로 간의 규약을 정해서 실천했다. ⑤
이를 다르게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비록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을 함께 사용하는 것이기는 하나, 이는 공유 공간을 이용하는 것이다. 즉, 자원을 공유한단 측면에서는 공유 경제의 초기 버전에 해당하며 규약을 정해 서로 실천하는 공동체 생활을 지향하는 측면도 있다. 이는 사실 대단한 성격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일본과 구미에서 1인 가구들이 증가하면서 생겨난 새로운 라이프스타일 주거 형태인 셰어 하우스의 특징(공동 사용 공간 활용, 공유 경제, 커뮤니티 활성화)과 진배없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서로 지켜야 할 룰을 정해 살면서 부엌이나 화장실, 샤워장 등을 같이 공유하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과거 가리봉동 노동자들의 상호 간 규약은 우리나라에서 앞으로 나타날 수 있는 셰어 하우스의 가능성을 이미 몇십 년 전에 보여준 것이다.
① 출처: 영국노동자계급의 상태
②<동아일보> 1984년 2월 6일, ‘직업병에 우는 근로자들’
③ <한겨레>, 1991년 7일 20일, '르포호화빌라촌’원인규명 미흡 닭장 전전하는 노동자삶 서글퍼'
④동아일보, 1987년 1월 8일, 공단 주변 단칸방 벌집
⑤<동아일보>, 1984년 8월 1일, '공단 여성 근로자의 낮과 밤'
* 가리봉동과 '벌집'에 관한 이야기가 다음 주 수요일에 계속됩니다. 김경민의 [도시 이야기]는 책 <리씽킹 서울-도시, 과거에서 미래를 보다>(김경민 지음, 서해문집 펴냄)으로도 출간되었습니다.
김경민의 도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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