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1일 대지진이 있던날, 센다이 동북초중급학교도 사태는 심각했다. 땅이 앞으로 옆으로 흔들리는 3분간의 진동은 30분, 아니 3시간도 더 되는 듯했다. 교사들의 책상 앞으로 벽이 무너져 덮쳤고 학교 유리창은 사정없이 깨졌다. 워낙 낡은 건물이라 피해는 더 심각했다. 학생들은 운동장으로 대피했고 초등 2,3학년생들은 1학년들을 꼭 껴안고 공포를 견뎠다. 학교 운동장도 심하게 균열이 일어났고 두 달이 훌쩍 지났지만 그 균열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나마 동북학교의 사정은 나은 편이다. 미야기현(縣) 민족학교는 건물이 심하게 훼손돼 전교생을 다른 학교로 보내야 했다. 지진이 있은 후 한 달만에 수업이 재개되면서 동북학교 교사들은 기숙사로 쓰던 공간을 꾸며 학생들이 수업을 받을 수 있는 교실을 만들었다.
11일 열린 '동북초중급학교 지진피해 대책위원회'는 지금의 학교 터에 다시 학교를 짓기로 결정했다. 학교건물이 너무 낡아 피해가 심했던 옛 학교터에 예전의 규모만큼은 아니더라고 지금의 아이들이 충분하게 활동할 수 있는 건물은 다시 지어야 한다는 것이 학부모와 민족학교를 후원하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언제까지 임시 교실에서 수업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자금이 문제다. 십시일반 모이는 동포들의 지원금이 있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그런데 어딘가에 지원금을 기대할 형편도 아니다. 민족학교는 일본에서 유럽계나 미국계의 외국학교들처럼 일본의 학교 교육법 제1조교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지 못하고 있는데다 민족학교에 대한 일본 내 분위기도 우호적이라고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처음 민족학교를 보낼 때의 의지와는 다르게 고학년이 될 즈음이면 일본학교로 전학을 보낸다. 일본 학교에 가면 나중에 취업 조건이 낫다는 이유다. 한국에서도 총련계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학교로 인식돼 상당히 배타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기숙사에 임시로 마련한 교실에는 알록달록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아이들이 지진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도록 한 교사들의 배려였다. 학생수 26명에 교사가 12명인 센다이 동북초중급학교. 이 학교 교사들은 학생 하나하나를 자신의 동생처럼 자식처럼 돌보고 있었다. 교사들은 이 아이들이 선조들처럼 식민지 국가의 국민으로 차별받지 않기를 바라며, 자신들이 겪었던 정신적 식민 상태로 살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한 바람과 열정이 지금의 민족학교를 지탱해주고 있는 원천인 듯했다.
먼 땅에서 고국을 잊지 않고 지내는 한국인의 지진 피해를 살피러 찾아간 민족학교였지만 걱정스러운 사정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우리의 기억에서 멀어졌던 일본의 민족학교를 이제는 생각해 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번 시련을 계기로라도 우리의 관심과 온정이 미치길 기대해 본다. 센다이 민족학교에서 만난 사람과 풍경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민족학교는 해방 전부터 일본의 차별에 맞서 싸우기 위해 민족성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교육을 원했던 동포들이 만든 학교로, 작은 우리말 공부방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1956년부터 북한이 보내준 교육지원금으로 학교가 세워졌고 이 때문에 총련계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학교로 인식돼 남한에서는 민족학교에 대해 상당히 배타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3번의 교육개혁을 거치며 현재는 동포들이 일본사회에 적응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쪽으로 교육방향을 전환했다. '민족성, 과학성, 현실성'을 담은 커리큘럼은 일본 학교의 교육수준에 비해 손색이 없도록 일본어와 외국어 수업을 강화해 실용성에 중점을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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