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늘 패권을 다퉜던 흉노나 돌궐과 달리 무척이나 중화사상을 흠모하여 755년 일어난 당나라의 '안사의 난'에 구원병을 파병하여 이씨 황실을 구하기도 했다. 유목민이면서도 문화를 사랑했던 위구르인들은 마니교를 받아들이고 소그드문자를 이용해 위구르문자를 만들었다. 초원 유목민으로서는 최초로 도시를 건설하기도 했다.
약 100년간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위구르제국도 다시 초원에 나타난 야만의 키르키즈 군대에 멸망하고 말았다. 이들은 난민이 되어 곳곳으로 흩어졌는데 특히 이들이 모여 새로운 나라를 건설한 곳이 타림분지의 투르판이었다. 투르판은 실크로드의 요충으로 서역과 중국 사이에 위치해 중개무역과 농업을 기반으로 중국에서 독립된 왕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곳으로 요나라의 황실의 일원이었던 야율대석이 지나갔다.
금나라에게 침탈당하고 소수의 철기병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던 야율대석은 위구르인들에게 선대의 약속이니 당신들의 초원 땅을 되찾아 주겠다 했다. 하지만 위구르왕은 겸손히 사양하며 "이제 이곳에 자리 잡은 지 오래라 초원을 잊었노라"고 했다. 그는 야율대석에게 후하게 대접하고 군자금까지 무상원조했다. 이후 야율대석은 서쪽으로 가서 서요를 건국하니 유럽인들은 그들을 가리켜 '카라키타이' 또는 동방의 '요한 왕'이라 했다.
이 사진은 투르판의 고창고성의 모습이다. 이제 그 옛날 영화는 간 데 없고 쓸쓸이 바람만이 지나가는 폐허가 되었다. 몽골의 칭기즈칸에 의해 다시 난민이 되었고 이 후 청나라에 의해 복속되어 이제 중국의 일부가 된 것이다. 어찌보면 이들의 난민신세는 끝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전쟁과 난민의 트라우마는 천년을 간다.
사진가,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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