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합의제 민주주의
요즈음 국회와 각 정당 그리고 시민사회 일각에서 권력구조의 개편을 위한 개헌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권력독점형에서 권력분점형으로의 헌법 개정 요구는 ‘87년 체제’의 성립 이후 끊임없이 분출돼왔지만, 최근의 것은 과거의 것들과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다양한 주체가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며 상당히 체계적인 방식으로 개헌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만약 ‘승자독식’ 체제에서 벗어나 ‘합의제’ 혹은 ‘협의제’ 민주주의 체제로의 발전을 목표로 하는 것이라면 이는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의원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전환 그 자체가 바로 합의제 민주주의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합의제 민주주의를 얘기할 때 그 ‘합의’ 형성의 현실 주체는 정당이다. 다수의 유력 정당들이 의회 및 정부에 포진하여 그들이 각기 대표하는 사회경제적 이익집단들의 다양한 선호를 테이블 위에 모두 올려놓고 정치적 협상과 타협을 통해 상생의 정책을 만들어 갈 때 합의제 민주주의가 작동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이념과 정책 중심으로 ‘구조화된 다당제’의 확립은 합의제 민주주의 발전의 전제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합의제 민주주의의 실현은 ‘정당의 구조화’가 이루어졌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전제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 곧 자기만의 분명한 이념과 정책 기조를 유지함으로써 사회의 특정 이익을 안정적으로 대표하고 각자가 정부의 정책결정과정에 직접 참여하거나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다수의 유력 정당들이 확고히 서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어떠한 권력구조도 합의제 민주주의를 제대로 구현해내지 못한다. 심지어 섣부른 권력구조의 개편은 합의제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하기는커녕 자칫 개악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
따라서 권력구조 개편 논의는 앞으로도 계속 진전시켜가되, 그 실천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점진적․단계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아래에서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한국 민주주의의 합의제로의 발전을 위해선 권력구조의 개편에 앞서 우선 선거제도가 비례성을 충분히 확보하는 방향으로 개혁돼야 한다. 그래야 정당의 구조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2. 최근의 개헌론
현재 가장 강력한 개헌 추진 집단은 새누리당의 나성린·남경필·이재오·이한구·정몽준·정병국·진영 의원 등과 민주당의 김진표·박병석·박영선·박지원·신기남·원혜영·유인태 의원 등이 초당적으로 구성한 ‘개헌추진 국회의원 모임’이다. 이들은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을 분산하기 위한 개헌안을 2월까지 마련하여 4월 국회 발의를 거쳐 6월 지방선거 때 국민투표에 부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 모임의 야당 간사인 민주당 우윤근 의원은 “새로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다수결에 의한 승자독식의 제왕적 대통령제를 폐하고 협의 민주주의 형태의 분권형 또는 내각제 개헌이 이뤄져야 한다”며 “이제는 ‘87년 체제’의 종언을 고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벌써 여야 의원 130여명이 서명한 터라 발의 요건인 150명 채우기는 크게 어렵지 않을 전망이다. 따라서 개헌론의 열기로 자신의 국정 주도력이 약화되거나 심지어는 조기 레임덕에 빠져들 수도 있음을 우려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경계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에서의 개헌 논의는 조만간 더 뜨겁게 달아오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 움직임에 앞서, 강창희 국회의장은 이미 지난 해 제헌절 경축사에서 19대 국회에서 모든 정파가 참여해 ‘제2의 제헌’을 각오로 개헌 논의를 하자는 제안을 한 바 있다. 그리고 그는 올 초 신년사에서 “우리사회에 맞는 새로운 시스템, 새로운 헌법의 틀을 갖추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많은 국민들이 하고 있다”며 ‘국회의장 헌법자문위원회’를 발족하여 “국민적 지혜를 결집하는데 최선을 다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가 말한 국회의장 직속 ‘헌법개정 자문위원회’는 김철수 서울대 명예교수를 위원장으로 하여 곧 출범할 것이며 5월 말까지 구체적인 헌법 개정 권고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한편, 민주당은 이젠 '87년 체제'를 종식하고 권력분점을 모색해야 할 때라며 당 차원에서의 개헌론을 연초부터 적극 제기하고 나섰다. 전병헌 원내대표는 “국민은 분명히 새정치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무한경쟁의 정치문화를 유발시키는 근본구조인 제왕적 대통령제를 대수술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권력구조 개편을 통한 정치문화의 근간을 바꾸는 노력에서 (새정치는) 시작되어야 한다”며 국회 개헌특위 구성을 제안했다. 정의당도 개헌론에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천호선 대표는 신년 기자회견에서 “개헌론은 더욱 커질 것”이라며 “정의당은 한계에 다다른 권력구조의 개편 방안을 적극 검토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3월 창당을 준비하고 있는 안철수 신당 측도 개헌에 긍정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여준 새정치추진위원회 의장은 “개헌논의를 국민에게 개방해 사회적 합의를 이뤄야 한다”며 내각제로의 개헌이 적절하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요약하자면, 민주당과 정의당을 포함한 야권의 주요 세력들은 모두 개헌을 통한 권력구조 개편을 찬성하는 입장이며 새누리당 내에서도 개헌론자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정도 조건이라면 개헌 발의는 물론 국회 의결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개헌추진 국회의원 모임’의 일부 주장대로 6.4 지방선거에서의 국민투표 부의를 통한 조기 개헌의 확정까지는 가기 어렵겠지만, 다수 개헌론자들의 바람대로 앞으로 2년 정도의 사회적 공론화 과정을 잘 이끌 수만 있다면 2016년 총선은 새 헌법으로 치러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법한 상황이다. 이는 크게 우려할 만한 상황이다.
3. 선(先)선거제도 개혁
다시 말하지만, 정당의 구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의원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의 도입은 자칫 권력구조의 개악이 될 수 있다. 지역주의가 여전히 (실재적 혹은 잠재적) 유력 변수로 남아있는 한국의 현 선거정치 환경에서 의원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에서의) 책임총리제 도입은 지역과 인물 중심의 다당제 형성을 촉진할 가능성이 크다. 군소 지역정당(들)일지라도 지역 지지기반을 잘 관리하여 필요최소한의 의원 수만 확보할 수 있다면 연립내각에 직접 참여하거나 그 형성 과정에 유의미한 영향력을 미침으로써 상당한 정치권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경우 한국정치의 고질병인 지역할거주의는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될 것이며, 권력구조는 결국 지역정당들 혹은 그 보스들 간의 ‘과두체제’로 개악되는 꼴이 된다. 그러한 방식의 권력 나눠먹기 현상이 만연하게 되면 불안정한 연립정부의 구성과 (중심 이념이나 정책이 부재한 상태에서의) 잦은 정권교체 등으로 인해 정부의 효율성과 수행능력은 크게 저하될 수밖에 없다.
그 경우엔 또한 연립정부의 장점인 타협과 합의의 정치가 정책과 이념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 인물이나 지역 이익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에 노동이나 중소상공인 등과 같은 사회경제적 약자 집단들의 선호와 이익이 정책과정에 체계적으로 반영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연정에 참여하는 정당 및 정치가들은 정책이나 이념을 좌표로 하는 책임윤리를 지키기보다는 정치적 보스의 사적 필요성이나 지역 이기주의적 요구에 타협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결국 보수, 중도, 진보 등을 표방하는 다수의 유력 정당들이 존재하여 그 정당들이 각기 자신들이 대표하는 여러 계층과 사회집단들의 이익을 적절히 집약하고 상호 절충함으로써 국가 정책을 합의로 결정해간다는, 그리하여 사회통합을 유지한다는 합의제 정치의 본연의 기능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편, 지금의 추세대로 지역 중심 (다당제가 아닌) 거대 양당제가 계속 발전해 갈 경우엔 의원내각제에서는 물론 분권형 대통령제에서도 실질적으로는 현행 대통령제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제 1당(과 심지어는 그 1인자)에 의한 승자독식 현상이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영국의 예가 보여주듯, 양당제와 의원내각제의 결합은 여당 (혹은 여당의 1인자인 수상) 독주의 ‘다수제 민주주의’로 귀결되곤 한다. 어차피 행정부는 양대 정당 중 의회의 다수당이 된 어느 한 정당에 의해 단독으로 구성되고, 그 정당의 대표인 수상은 행정부는 물론 입법부까지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양당체제에서의 분권형 대통령제에서도 여소야대 상황에서의 동거정부 형성 경우 외에는 여당이 대통령과 내각을 독점하는 ‘다수제 정치’가 통상적이기 마련이다. 양당제가 유지되는 한 의원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권력구조의 개편은 합의제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적 상황에서 ‘통합과 포용의 정치’를 구현할 수 있는 합의제 민주주의의 발전을 도모코자 한다면 권력구조의 개편보다는 선거제도의 개혁에 우선 힘써야 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정당 득표율과 의석 배분 간의 비례성이 충분히 보장되는 독일식 권역별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등의 도입은 이념과 정책 중심의 정당 간 경쟁을 촉진하여 정당의 구조화를 견인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선(先)선거제도 개혁, 후(後)권력구조 전환’의 원칙에 따라 합의제 민주주의를 위한 제도 개혁 작업을 수행해 가야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권력구조의 개편은 개헌을 요구하는 지난한 과제이지만 선거제도의 개혁은 법률 개정만으로도 이룰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사회적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헌을 무리하게 시도하기 보다는 당장은 선거제도의 개혁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것이 현실적으로도 타당한 전략이라 할 수 있다.
4. 후(後)권력구조 개편
권력구조의 개편 작업은 독일식 비례대표제 등과 같은 비례성 높은 선거제도의 도입으로 이념과 정책을 기반으로 하는 (온건) 다당제가 구축되면 그 이후 정당 간 합의에 의해 자연스레 진행돼갈 것이다. 다당제와 대통령제의 결합은 ‘여소야대’라고 하는 제도 간의 부조화 문제를 수시로 발생시킨다. 그것은 사실 정당의 구조화 여부와는 관계없이 일어나는 문제이다. 지역과 인물 중심의 ‘비구조화된 다당제’가 유지됐던 시절 한국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합당(‘3당 합당’), 정당연합(‘DJP연합’), 의원 빼내기 등의 미봉책을 활용하곤 했다.1) 그런데 선거제도의 개혁으로 정당의 구조화가 이루어지면 과거의 그러한 미봉책마저도 사용하기 어려워진다. 이념 및 정책적 차이가 뚜렷한 정당들 사이에선 의원들의 당적 이동도 매우 어려운 일일뿐더러 소수 엘리트들 간의 정략적 거래를 통한 합당이나 정당 연합 등과 같은 인위적 정계개편도 (비구조화된 정당들 사이에서처럼) 쉽게 이루어질 리는 없기 때문이다. 비례대표제와 구조화된 다당제가 확립되면 여소야대로 인한 정부의 정책수행과 국정운영 상의 어려움은 과거보다 더 심해지리라는 것이다.
결국 이처럼 심각해진 제도 간의 부조화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중심제를 의원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정당들 간에 형성될 가능성이 상당하다. 대통령을 배출하겠다는 정당이라면 그 누구도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2) 구조화된 다당제는 대통령제보다는 의원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와 결합할 때 더 순조롭게 작동하며, 그때 정부의 수행능력이나 정치사회적 안정성도 더 높아진다는 사실은 이미 경험과 이론에 의해 공히 증명된 바이다. 유럽의 선진 합의제 민주주의 국가들이 예외 없이 이러한 제도 조합을 택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임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권력구조의 개편을 위한 개헌은 선거제도 개혁 이후의 추진 과제로 미루어 놓는 것이 백번 타당하다. 그렇다고 개헌 논의를 중단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손학규 민주당 고문의 제안대로 “권력구조의 개편을 위한 광범위한 공론의 장을 개설”할 필요가 있다. “의원내각제가 좋을지 분권형 대통령제가 좋을지, 만약 분권형 대통령제로 간다면 대통령과 총리 간에는 어떻게 권력을 나눌지 등은 반드시 (충분한 시간을 갖고) 국민적 공감대의 형성을 전제로 풀어야 할 중차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공론장(公論場)에서 지금부터 최소한 5~6년간에 걸쳐 사회 구성원들 모두가 진지한 노력을 꾸준히 경주한다면 사회적 합의에 기초한 나름 최적의 권력구조 개편안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아무리 빨라야 (2016년이 아닌) 2020년 총선이 새 헌법에 의해 치러지는 첫 선거가 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리라는 것이다.
요컨대, 합의제 민주주의를 향한 정치제도의 개혁은 비례대표제의 획기적 강화, 정책과 이념 중심의 온건 다당제 확립, 그리고 의원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권력구조 개편 등과 같은 순서로 추진돼야 한다. 다만, 비례대표제 개혁과 권력구조 개편은 둘 간의 제도적 상보성을 고려할 때 하나의 패키지로 동시에 진행돼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정치제도 개혁 일정은 다음 두 가지 안(案)중의 하나에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A안은 새 선거제도는 2016년 총선부터, 새 헌법은 2020년 총선부터 적용되도록 하는 2단계 개혁 일정이다. B안은 A안이 불발될 경우, 즉 2016년 총선 이전에 선거제도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2020년 총선을 새 선거제도와 새 헌법의 적용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2020년 체제’의 정초선거로 만드는 방안이다. 어느 안을 염두에 두든 개헌을 위한 공론의 장은 하루라도 빨리 개설돼야한다.
1) 노무현 대통령은 여소야대 상황에서의 국정 운영이 너무나 어려운 나머지 제도 조건이 전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한나라당과의 인위적 ‘대연정’을 시도하기도 했다.
2) 물론 비례대표제-다당제-대통령제를 택하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에서처럼 대통령 결선투표제를 도입할 경우 연정형 대통령제의 작동이 수월해질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그것이 과연 연정의 안정성이나 제도화 수준의 측면에서 의원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에 비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의원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와는 달리 대통령중심제에서의 연립정부란 제도적 구속력보다는 행위자들의 전략이나 상황 판단에 의해 운영되는 다소 불안정한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