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프레시안 뷰>는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만의 차별화된 고급 칼럼지입니다. <프레시안 뷰>는 한 주간의 이슈를 정치/경제/남북관계·한반도/국제/생태 등 다섯 개 분야로 나눠 정리한 '주간 뉴스 일지'와 각 분야 전문 필진들의 칼럼을 담고 있습니다.
정치는 임경구 프레시안 정치 선임기자 및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번갈아 담당하며, 경제는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 남북관계·한반도는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국제는 이승선 프레시안 국제 선임기자, 생태는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이 맡고 있습니다.
이 중 매주 한두 편의 칼럼을 공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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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론과 명분론은 늘 충돌합니다. 제 각각의 근거가 그럴싸할수록 어느 한 쪽 손을 들어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현실에 발 딛고 이상을 추구하는 과정으로 정치를 규정한다면, 정치는 현재의 모순으로부터 한 차원 높은 정상성을 도출하는 행위 예술이 될 겁니다. 하지만 정치 과정이 그렇게 순조롭게만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정치집단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죠. 욕심이 작동하고 그에 따라 투쟁합니다. 각자의 악착같은 욕심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의 이익에 부합하는 결과가 도출된다면 그게 바로 수준 높은 정치일 테고, 엉뚱한 길로 새어버리면 정치 후진국 신세를 면키 어렵습니다. 우린 어느 쪽일까요? 서두부터 뜬구름 잡는 얘기를 꺼낸 까닭은 최근의 정치 이슈들이 이 물음과 무관치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여야가 가장 첨예한 대치 전선을 긋고 있는 기초선거 정당공천제 문제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지방선거 때마다 논란이 됐을 정도로 곡절이 참 많았던 제도입니다. 다소 복잡하지만 변천사를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지방자치 선거가 부활된 1991년엔 지금과 정 반대로 새누리당 계열의 민자당이 정당공천 반대를, 민주당 계열의 평민당이 적극적인 찬성론을 폈습니다. 그 결과 광역단체장·의원에 한해 정당공천제가 도입됩니다. 1994년엔 기초단체장·의원으로까지 확대하도록 법이 바뀌었으나, 1995년 지방선거 직전 민자당의 반대로 기초선거 정당공천은 무산됩니다. 그러나 2003년 헌법재판소는 기초의원 후보자들의 정당 표방을 금지한 공직선거법 제84조에 대해 위헌 결정을 했고, 2006년부터 기초선거에 대한 정당공천이 다시 시행돼 오늘에 이릅니다. 제도 변천의 배후에는 정치세력들의 주판알 튕기기가 있었음은 물론입니다.
이게 지금 다시 논란이 되는 이유는 2012년 대선 캠페인 과정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포함한 여야의 대선 후보들이 일제히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를 공약했기 때문입니다. 정당공천제에 따른 부작용이 적지 않았던 건 사실입니다. 지역주의와 맞물려 특정 정당의 간판을 달면 당선이 보장되는 폐해가 드러났고, 중앙정치에 지방정치가 예속화되는 문제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2012년 모처럼 여야가 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실제의 배경은 대중들의 정치 혐오에 편승한 득표 경쟁이었습니다. 소위 ‘안풍(安風, 안철수 바람)’을 타고 정당공천 폐지가 ‘정치 개혁’, 혹은 ‘새 정치’라는 모자를 쓴 겁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명분론입니다. 국회의원 정원 축소가 새 정치의 내용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현실은 정치 개혁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정당공천이 사라지면 힘 있고 돈 있는 지방의 골목대장들이 발호합니다. 자연히 정치 신인들이나 여성 정치인들은 발붙일 틈이 비좁아지죠. 군소정당도 풀뿌리 정치에서 아예 배척됩니다. 책임정치도 실종됩니다. 정당이 좋은 후보를 검증해 선거에 임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본연의 정치 기능이 무너질 테니까요. 이렇게 일장일단이 있는데도 정당공천 폐지가 절대 선(善)인 양 부르짖는 야권은 자기가 마실 우물에 침을 뱉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와 안철수 의원이 1월 24일 이 문제로 만난다고 하는데, 아리송한 정치개혁의 명분으로 여권을 궁지로 몰아넣으려는 속내가 더 커 보입니다. 새누리당의 반대로 정당공천 폐지가 사실상 물 건너갔으니 박 대통령의 ‘공약 폐기’를 최대한 쟁점화해 이득을 챙겨보려는 것이죠.
그럼 정당공천제 폐지 불가를 주장하는 새누리당은 야권의 부당한 주장에 맞선 책임정치의 수호자일까요? 잘 알다시피 새누리당은 그런 정당이 아닙니다. ‘기득권을 지키는 데에 귀신같은 촉을 가진 사람들의 집합체’라는 규정이 새누리당의 본질에 좀 더 가까울 텐데, 계산기를 두들겨본 결과 정당공천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게 6월 지방선거에 유리하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에 대선 공약 폐기에 따른 비판의 화살을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버티는 겁니다. 당 지지율이 40%를 웃도는데, 이 값나가는 간판을 뗄 이유가 없는 것이죠. 게다가 안철수 신당이 출현하면 정당공천제는 야권의 분열 구도를 십분 활용할 수 있는 방편이 됩니다. 한 마디로, 선거를 향한 집요한 목표의식이 정당공천제에 대한 새누리당의 태도를 강제하는 겁니다.
그렇더라도 대선 공약을 백지화하는 일인데, ‘기초선거 정당공천제 폐지는 위헌 소지가 있다’는 핑계 뒤에 숨는 건 비겁하고 남루해 보입니다. 폐지 반대 결정을 내려놓고도 이젠 정개특위로 책임을 미루는 꼼수까지 부립니다. 새누리당이 이렇게 쩔쩔매는 건 박 대통령이 명분 있는 퇴로를 열어주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됐건 공약 백지화는 대통령의 ‘사과’가 당연히 필요합니다. 설령 그것이 나쁜 공약이라도 그렇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조차 (곧 거짓임이 드러났지만) 한반도 대운하 공약을 포기하면서 사과하지 않았습니까. 해외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박 대통령이 이 문제를 피해 가기 어렵게 됐지만, 사과를 기대하는 건 현재로선 무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학계에서도 정당공천제에 대한 입장이 엇갈리고 있고 보수·진보 진영 내부에서도 찬반론이 뒤섞여 있는 문제인지라 그저 오불관언(吾不關焉)하며 시간을 보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어렵고 복잡한데다 대중들의 실생활과는 다소 유리된 이슈이니 더욱 그렇습니다. 이처럼 기초선거 정당공천제 논란을 둘러싸고 현실론도, 명분론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여야 정치권의 요즘 모습에 대해 경향신문 이대근 논설위원의 논평은 간명합니다. ‘나쁜 정치’!
정당공천제 자체에 관해 좀 더 발전적이고 확장된 논쟁을 바라는 조합원이시라면,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이 지난해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을 살펴보는 것도 보탬이 될 듯합니다.
(☞ 정당공천제 폐지 논의를 넘어 근본적 변화를 꿈꾸자)
이야기를 좀 돌려보겠습니다. 안철수 의원이 ‘3월 신당 창당’을 선언했습니다.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에 이어 김성식 전 의원까지 재결합해 전력을 보강하고 창당에 가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17개 광역단체장 선거에 모두 후보를 내겠다는 포부도 밝혔습니다. 6월 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과 민주당, 안철수 신당의 3자 구도가 현실이 되어가는 형국입니다. 1998년 2기 지방선거 이후 16년 만에 첫 3자 구도라고 하는데, 사실 그때도 공동정부를 구성한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선거 공조를 해 한나라당을 제압했으니 엄밀한 의미의 3자 구도는 아니었습니다. 당시는 김대중 정부 출범 100일 만에 치러진 선거라 정권에 대한 중간 평가 의미가 적용되기도 어려웠습니다. 오히려 민자당-민주당-자민련이 경쟁한 1995년 지방선거, 열린우리당-한나라당-민주당이 경합한 2006년 지방선거가 3자 구도에 더 부합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집권 중반기 이후에 치러진 선거였던 탓에 여당이 참패한 대가를 두 야당이 나눠 먹는 뻔한 전개였습니다.
그에 비춰 올해 지방선거는 사뭇 다릅니다. 박근혜 정부 출범 1년 4개월 만에 치러지는 선거입니다. 정당 지지율도 새누리당이 가장 앞서 있습니다. 새누리당이 절대 강자라는 건 객관적인 사실이라는 얘깁니다. 여기서부터 야권의 현실론과 명분론이 또 충돌합니다. 다급한 쪽은 민주당입니다. 일부 광역 단체장들의 후보경쟁력을 빼곤, 형편없는 당 지지율을 비롯해 내세울 게 없습니다. 민주당이 "견제세력을 약화시키는 분열은 새 정치가 될 수 없다"(전병헌 원내대표)고 안철수 신당을 견제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민주당이 주장하는 현실론은 지난 대선 때 ‘정치개혁’은 안철수 후보에게, ‘경제민주화’는 박근혜 후보에게 빼앗기고 갈팡질팡하던 모습을 다시 보는 것 같습니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는 “이럴 때 선거제도 개혁 등을 통해 호남에서 기득권을 내려놓고 새로운 정치세력에 더 공간을 열어주면 유권자들로부터 박수를 받을 텐데 똘똘 뭉쳐서 기득권에 안주하는 모습이다. 새누리당 같은 보수 정당은 원래 그렇다 치고 변혁과 진보를 얘기해야 할 정당이 전혀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대선이 끝난 지 1년이 넘도록 새로운 가치를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 “영국 자유당처럼 민주당도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다”)
물론, 분열은 곧 패배인 현실에서 선거 공조를 통해 야권 전체의 이익을 도모해 실리를 취하자는 주장을 무조건 틀렸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선거 전술의 측면에서 이념과 노선이 비슷한 세력끼리의 공조는 일상적인 일인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야합’ 프레임이 강하게 작동합니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 소장이 “문제는 연대의 당위성을 제시하지 못한 채 승리의 방편으로만 삼는 편의주의다. 따라서 이런 편의주의를 가리기 위해 연대 불가론을 외치는 건 또 다른 오류, 즉 명분주의에 매몰되는 것”이라고 한 지적은 새겨봐야 합니다. 여권이 덧씌운 야합 프레임을 깰만한 연대의 당위성을 보여주는 게 관건이라는 거죠. 타당한 지적입니다.
안철수 세력에게 이런 명분주의의 오류가 엿보이기도 해서 하는 말일 겁니다. 안 의원이 기존의 여와 야, 보수와 진보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정치의 새판을 짜보려는 시도 자체는 박수를 받을 만합니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적대적으로 공존하며 양산해 내는 양당제의 폐해가 대중들의 정치 혐오를 부추기고 정치혁신을 가로막는 구조적인 방해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제3신당의 출현이 양당의 기득권 온존 구조를 뒤흔들 수 있다면, 안 의원이 차기 대통령이 되느냐의 여부와 상관없이 이 실험은 정치 발전의 디딤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3 신당 실험의 성공 조건은 그 신당이 충분히 건강한가에 있습니다. 말이 아닌 실력이 중요한 것이고, 선거에 당면해서는 내세우는 인물로 판가름납니다. 아직까지 안철수 신당의 실력이 불투명하고 주변에 이를 뒷받침할 만한 인물이 눈에 띄지 않기에 명분주의의 오류 가능성이 여전히 거론되는 이유일 겁니다. 또한 안 의원의 주된 경쟁 상대가 시간이 갈수록 민주당, 즉 야권 내부로 좁혀지는 것도 위험해 보입니다. 야권 내부의 제로섬 게임을 우리 정치의 근본적인 변화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17개 광역단체장 선거에 모두 후보를 내겠다는 포부에 비해 당선 목표치를 3곳 안짝으로 낮게 잡은 것도 석연찮습니다. 신생 정치세력의 목표가 과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지방선거 그 자체보다 향후 대선까지 이어지는 정치일정을 염두에 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살 만합니다.
야권 주변에서 두루 나오는 이 같은 지적들을 아울러 민주당과 안철수 신당이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기는 새로운 3자 구도의 선거 방정식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지방선거 예비후보 등록은 설 명절 직후인 2월 4일부터 시작됩니다. 조만간 선거 정국이 가팔라질 텐데, ‘여/야’의 대치선보다 ‘야/야’의 대치선이 보다 선명해지는 분위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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