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세계 산업계의 빅 이슈 중 하나는 MS(마이크로소프트)의 노키아 인수 사건이었다. 퍼스널 컴퓨터(PC)와 소프트웨어 업체로 출발해 이미 스마트폰 업계의 강자로 우뚝 선 전통적 라이벌 ‘애플’ 사와 휴대폰 사업에서도 경쟁을 해보겠다는 것이다. 여하튼 한때 휴대폰 최고의 강자였지만, 애플과 삼성전자, 구글에 밀려 몰락해가던 핀란드의 노키아는 회생의 길을 열 수 있게 되었다.
자, 지금부터는 완전히 ‘인사이드 경제’가 상상하는 픽션이니 실제 상황과 혼동하지 마시길. 만약에 핀란드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해 MS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노키아 인수에 감사의 뜻을 전하며 앞으로도 더 많은 투자를 요청했다고 가정해보자. 그 자리에서 MS 회장은 “당연하죠”라며 앞으로 5년 동안 수십억 달러 투자를 약속한다. 핀란드 대통령은 투자 확대에 대한 확약을 받았다며 국내에 대대적인 선전을 한다.
그런데 MS 회장 속생각이 다른 것이라면? MS가 직접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노키아가 이윤을 만들면 그 돈으로 재투자한다는 뜻이라면 말이다.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사기술이지만 “노키아가 MS의 자회사가 되었으니, 결국 노키아 돈이 MS 돈 아닌가?”라며 항변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헤어질 때쯤 MS 회장이 핀란드 대통령에게 이런 클로징 멘트를 날린다. “핀란드의 노키아 공장으로 초청할 테니 방문을 부탁드린다.”
씁쓸한 ‘세일즈 외교’
새해 초부터 무슨 헛소리냐고? 그렇다. 위의 스토리가 실제로 벌어진다면, 핀란드 노동자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기분이 더럽겠는가. 아니, 언제부터 MS가 자기들과 인연을 맺었다고, 핀란드 대통령에게 ‘핀란드 공장에 초청’ 운운한단 말인가? 그리고 핀란드 노동자들이 벌어준 돈으로 생색은 MS가 다 내고 앉았으니 속 터질 일이다. 다행히 위 스토리는 실제 상황이 아니라 필자가 지어낸 얘기이다.
하지만 완전한 픽션이 아니라. 실제로 벌어진 어떤 상황을 모방해서 만든 ‘논픽션’이다. 안타깝게도 실제로 벌어진 상황에서는, 기분이 더럽고 속이 터져야 할 쪽은 바로 한국의 노동자들이다. 무슨 얘기냐고? 위의 스토리에서 MS를 ‘마힌드라’로, 노키아를 ‘쌍용자동차’로, 그리고 핀란드 대통령을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으로 바꿔서 읽으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인도 세일즈 외교…“쌍용차 1조원 투자”(KBS)
인도 마힌드라, “향후 4년간 1조원 쌍용차에 투자”(YTN)
인도 마힌드라 “쌍용차 미진출 협의...4년간 1조원 투자”(연합뉴스)
박 대통령, 마힌드라서 1조 투자 약속 받아(국민일보)
마힌드라 1조 투자 끌어낸 ‘세일즈 외교’(파이낸셜뉴스)
박 대통령, 마힌드라 회장 만나 “쌍용차 투자 확대” 확답 끌어내(한겨레)
위 기사 제목들처럼 언론들은 온통 ‘박비어천가’를 부르는 데 여념이 없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마힌드라 회장을 만나서 주고받은 얘기의 본질은, 앞서 필자가 지어낸 얘기에 그 실체가 모두 녹아 있다. 제발 한국의 언론사들과 기자들, 제정신 되찾고 탐사 보도의 정신으로 취재하는 저널리스트 본연의 자세로 돌아와주시길! 지금부터 차근차근 필자의 주장을 입증해 보도록 하겠다.
1년 전에 이미 공식 발표한 투자 계획, 재탕 삼탕…
우선 “4년간 1조 원 투자 계획”은 이번에 처음 나온 얘기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1년 전, 그러니까 작년 1월 쌍용차 이사회 의장 파완 고엔카가 <월스트리트 저널>과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향후 4~5년간 1조 원을 투자하겠다”는 얘기를 한 바 있다.
당시에도 지금처럼 한국의 모든 언론이 이 내용을 대서특필하면서 빅 이슈가 됐다. 사실 거슬러 올라가면 작년에 처음 나온 얘기도 아니다. 2011년에 마힌드라 그룹이 쌍용차 인수를 완료한 직후, 쌍용차 발전 전망을 밝히는 자리에서도 언급된 얘기다. 다시 말해 이번 박근혜 대통령 면담 자리에서 다시 얘기한 것이니 ‘3년째 떠들어대고 있는 투자 계획’이라는 것이다. (관련 기사 : <"쌍용차에 9억 달러 투자", 노림수는 따로 있다?> <마힌드라 먹튀 의혹, 박근혜 정권도 피해갈 수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박근혜 대통령이 마힌드라 회장을 만나 “새롭게 끌어낸 투자 계획”이 있는가? 아니다. 없다. 2011년에 발표한 투자 계획을 재탕, 삼탕 써먹고 있는 것일 뿐인데 이렇게 호들갑을 떤다. 이게 마치 ‘그분’의 높디높은 덕망과 지도력에서 비롯된 것인 양!
사실 마힌드라 사례는 좀 심한 편이다. 마힌드라가 3년째 말로만 떠든 이 투자 계획 중 실제 현실화된 것은 작년 800억 원 유상증자뿐이다. 나머지 9000억 원 이상의 투자 계획은 어떻게 할 것인지, 쌍용차 노동자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묻지 않았다.
그런데 마힌드라가 말로만 떠드는 투자 계획을, 그것도 재탕 삼탕 우려먹을 때마다 한국 언론들과 정부는 환호성을 질러댔다. 작년 1월에 파완 고엔카가 <월스트리트 저널>과 인터뷰한 기사가 나왔을 때, 일각에서는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니 투자가 활성화되는 좋은 지표라는 추정 보도까지 나왔다. 박근혜 당선 이전인 2011년부터 얘기해온 투자 계획을 재탕한 것에 불과한데 말이다.
작년 2월 쌍용차 이사회에서 800억 유상증자 결정이 나왔을 때에도 “1조 원 투자 계획의 스타트”라며 환호성을 질렀다. 이사회 결정이 실제 집행된 것은 작년 5월 말이었는데, 이때에도 언론과 정부는 만세를 불렀다. 그때마다 주식 시장에서 쌍용차 주가도 뛰었다. 일부 애널리스트들은 “이미 예고된 유상증자인데, 이사회 결정 날 때도 주가가 오르고, 실제 집행될 때도 오르는 기현상”이라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그러니 마힌드라 자본 입장에선 한국이란 나라가 얼마나 신기하겠는가! 실제 들인 돈은 800억 원뿐인데 “4년간 1조 원 투자할 것”이라는 말만 해도 그때마다 마치 새로운 투자 계획이 나온 것처럼 증권 시장에서 나날이 돈을 긁어모으니 말이다. 게다가 국가원수를 만난 자리에서 똑같은 말을 해도 전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니!
더 웃기는 것은, 이러한 보도 행태는 오직 한국 언론에서만 볼 수 있을 뿐 외신에서는 거의 구경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번 박근혜 대통령과 마힌드라 회장이 만난 자리에서 투자 계획을 밝혔다는 얘기는 외신에서 거의 구경하기 힘든 보도이다.
쪽팔리게 이런 내용까지 얘기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긴 하지만, 내친김에 한 가지 더 짚어야 하겠다. 심지어 쌍용차나 마힌드라 측에서는 이번 면담과 관련해 1조 원 투자 어쩌구 하는 보도자료나 브리핑 한 장 내보내지 않았다! 청와대와 한국 언론들만 떠들고 있을 뿐이다.
그들도 재탕, 삼탕을 해온 투자 계획 발표를 다시 해야 하는 것이 멋쩍어서일까? 아니, 자본가들에게 무슨 양심이 있다고 그런 걸 따지겠는가. 문제는 다른 데에 있다. “1조 원 투자 계획” 자체에 다른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주어 생략’? 투자금은 마힌드라가 아니라 쌍용차 부담!
사실 쌍용차의 많은 노동자들은 이 대목에 깊은 의심을 품어왔다. 마힌드라가 정말 쌍용차에 대한 장기 발전 전망을 갖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상하이차처럼 또다시 쌍용차의 기술만 이전받으려는 것인지 말이다. 상하이차도 1조2000억 원 투자를 약속했지만 결국 먹고 튀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동안 쌍용차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의혹을 제기해왔다. 정말로 마힌드라가 직접 투자하는 것이 맞는가? 하지만 이미 1년 전부터 마힌드라 측의 답은 분명했다. “800억 원 유상증자 외에 현금은 더 못준다. 나머지 9000억 원은 쌍용차가 자체적으로 수익을 내서 투자금을 충당하라”는 것!
오죽했으면 <조선일보>가 쌍용차 이사회 의장인 파완 고엔카를 만난 뒤에 “1조 원가량이 필요한데, 800억 원 이외엔 쌍용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는 게 인도 본사의 방침”이라는 그의 말을 인용하며 쌍용차에 현금을 더 못 준다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겠는가!
두 번 세 번 반복해 확인한 마힌드라 그룹의 방침
고엔카 이사장의 말은 작년 초부터 마힌드라의 ‘먹튀’ 의혹에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너무 어이가 없는 얘기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현대차 정몽구 회장이 러시아 현지 공장에 가서 “러시아에 1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하면, 누구나 본사 차원의 투자를 생각하는 게 상식 아닌가? 하지만 마힌드라 그룹의 방침은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공식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아예 쐐기를 박는 확인 작업이 있었는데, 박근혜 대통령과 마힌드라 회장이 만나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안정적 노사 관계’의 한 축인 쌍용차노동조합이 그 주인공이다.
마힌드라 및 쌍용차의 교섭 파트너인 쌍용차노조는 지난해 11월 말, 인도를 방문해 마힌드라 회장을 면담한 바 있다. 위 소식지에서 쌍용차노조는 면담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붉은색 밑줄은 필자가 강조를 위해 그은 것임). 그 자리에서 노조 위원장은 “투자를 누가 할 것인지 명확히 해야 한다”, 즉 ‘도대체 주어가 뭐냐’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게 된다.
마힌드라 회장의 답변도 명쾌했다. “쌍용차에서 이익이 발생하면 투자하겠다고 3번이나 강조했지만, 언론에 보도된 내용이 달라 즉각 정정 기사를 요구했고, 이는 정정됐다.” 쌍용차에서 수익이 나면 그 돈으로 투자한다는 것인데, 즉 투자의 주체는 마힌드라가 아니라 쌍용차라고 누누이 설명했는데, 도대체 한국 언론들이 알아먹지 못해서 정정 보도까지 요청했다는 것이다!
정말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 아닌가? 홍보물에 나온 노동조합의 주장은 매우 정당하다. 자꾸 국민들이 착각하니까 투자의 주체를 분명히 하라는 것! 그래서 마힌드라 회장도 쿨~하게 인정했다. ‘마힌드라가 아니라 쌍용차 돈으로 투자하는 거라니깐?’ 상황이 이러한데도 여전히 1조 원짜리 투자를 유치했다고 글을 써대는 자들은 도대체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이들인가?
결국 투자금 빌려달라고 한국의 은행을 찾아올 텐데…
마힌드라 그룹은 또한 투자 계획에 대해 이렇게 얘기해왔다. 쌍용차의 자체 수익금으로 하든지, 아니면 쌍용차가 자체 대출을 내든지 해서 마련할 것이라고 말이다. 아직 지난해 실적 발표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작년 쌍용차는 소폭의 적자를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흑자가 났더라도 액수는 그리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자체 수익금으로는 투자 재원 마련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그렇다. 은행 대출 말고는 없다. 그럼 쌍용차가 어느 은행에 가겠는가? 외국의 은행에선 돈을 빌려줄 가능성이 없으니 결국 한국의 은행을 찾아갈 것이다. 그럼 이게 도대체 뭔가? 마힌드라는 한국인들의 돈을 갖고 투자하면서 온갖 생색을 다 내고 있는 것이다!
‘4년간 1조 원 투자한다고 했지, 우리 돈으로 한다는 말은 안 했는데요? 애초부터 한국인이 저축해놓은 돈으로 투자할 예정이라고 언론에도 다 발표했는데 말이죠. 1조 원의 투자금을 빌려달라는 말에 당황하셨어요?’ 이게 마힌드라가 준비해놓은 답변이다. 그런데 여전히 청와대도, 언론들도 재탕 삼탕 써먹는 마힌드라의 말에 ‘열렬히’ 속아주고 있으니 나 원 참!
어디 그뿐인가. 마힌드라 회장이 “안정된 노사 관계가 정착되어 있으니 평택 공장을 한번 방문해주시면 더 큰 힘이 될 것”이라며 초청 의사를 밝혔다는 얘기도 미담처럼 보도되고 있다. 아니, 도대체 마힌드라 회장은 평택 공장에 몇 번이나 와봤다고 한국의 대통령 초청 운운하나? 청와대에서 헬기 한 번 띄우면 십여 분 만에 갈 수 있는 평택 공장에? 이건 뭐 정몽구 회장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시간 되면 우리 미국 공장에 한번 들러요. 내가 초청할게. 어려워말고”라고 말하는 격이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정말로 속상하다. 상하이차 시절에도 1조2000억 원을 투자한다는 계획을 ‘4년 동안’ 말로만 들어왔다. 그런데 또다시 ‘4년간 1조 원 투자 계획’을 3년째 말로만 듣고 있다. 이건 뭐 한술 더 떠서 그 투자금을 노동자들이 등골이 휘도록 일해서 마련하라는 말을 듣고 있다. 그런데 다른 나라도 아니고 한국의 대통령과 언론들은 그 계획을 찬양하며 마힌드라의 주가만 높여주고 있으니~!
도대체 누구를 위한 세일즈 외교인가? 마힌드라는 남의 돈과 한국 노동자 피땀, 그리고 한국 기술진이 가진 테크놀로지에서 엄청난 이윤을 누리고 있다. ‘인사이드 경제’를 쓰면서 이토록 화가 나고 자존심이 상해서 글을 쓴 것은 처음인 듯~!
‘인사이드 경제’ 독자 여러분, 속이 타들어가는 시국, 오는 22일 저녁에 평택 공장 앞으로 오셔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그리고 저와 함께 술이나 한잔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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