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편집도, 일반인 지원자의 눈물 나는 사연도 없다. 심지어 퍼포먼스도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노래만 부른다. 그것도 완곡도 아닌, 한 소절 혹은 길어야 2~3소절 부르는 것이 전부다. 심지어 얼굴을 가린 채 말이다. 방송 중 대부분의 시간을 블라인드 뒤에서 보내며, 방송 중반까지는 노래 외에 실제 목소리를 내지도 못한다.
보는 음악에서 듣는 음악으로. 이는 JTBC <히든싱어>의 캐치프레이즈다. 진짜 가수와 모창 능력자들의 목소리만 듣고 진짜 가수를 찾아내는 <히든싱어>는 사람이 아닌 노래, 사연이 아닌 목소리를 전면에 내세운 프로그램이다. 3라운드에서 모창 능력자들의 정체를 밝히긴 하지만, 원조 가수를 언제부터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들어볼 뿐 출연자들의 이야기를 도구 삼아 신파를 만들지 않는다. 트로트 가수로 데뷔한 지 10년 가까이 된 무명 가수들도 많이 출연했지만 그들의 눈물겨운 이야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모창능력자들은 그저 ‘여고생 아이유’, ‘팝페라 신승훈’ 등 원조 가수 이름을 꼬리표처럼 달고 나올 뿐이다.
심지어 조성모 편의 우승자인 임성현 씨는 2라운드에서 조성모가 탈락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는 바람에 자기소개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MC 전현무가 왕중왕전에 와서야 “그런데 뭐하시는 분이세요?”라고 물었고, 그제서야 임성현 씨가 뮤지컬 배우라는 사실이 공개됐다. 그만큼 <히든싱어>에서 출연자의 직업이나 사연은 판정단 평가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룰은 오로지 하나다. 원조 가수와 모창 능력자 중에서 가장 원조 가수 같지 않은 사람 혹은 가장 원조 가수 같은 사람을 뽑는다. 오로지 목소리만으로 예능을 완성시킨다. 진짜 가수의 목소리를 따라하는 능력 그 자체에 집중하는 <히든싱어>는 냉정히 말해 “노래 잘하는 친구들이 모인” 경연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역주행 편집’이나 매주 기사거리를 만들어내는 ‘독설 심사’가 없기 때문에 자칫 지루할 수도 있다. 하지만 <히든싱어>는 진짜 가수에게 노래하는 것의 뿌듯함, 모창 능력자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와 함께 노래할 수 있는 행복감을 전해줌으로써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경연대회를 가장 순수하고도 정직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으로 끌어올렸다.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는데, 사연이 아닌 목소리만 듣고 평가하는 룰은 음악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가장 중요한 심사기준이다.
무엇보다 <히든싱어>의 가장 큰 공은 모창의 재해석이다. 사실 모창은 그동안 장기자랑 혹은 개인기에 지나지 않는 재주였다. 대표적으로 휘성을 흉내 내는 케이윌과 조세호(양배추)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들은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절규하는 휘성의 음성, 그 순간 커지는 입모양이나 일그러지는 표정을 캐치했다. 그들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휘성을 흉내 낼 때마다 터져 나온 건, ‘와’라는 감탄사가 아닌 ‘하하하’라는 웃음이었다. 그것은 그동안의 수많은 모창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이기도 했다.
<히든싱어>는 모창이 단순한 흉내가 아니라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기 위한 첫걸음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신승훈도 “내가 원래 모창가수였다. 열심히 모창을 하다가 지금의 신승훈 목소리를 찾게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신승훈 편에서 모창능력자 장진호 씨는 원조가수를 누르고 최종 우승했다. 모창은 더 이상 특정 대상을 희화화하는 것이 아니다. 특정 대상에 대한 존경, 애정에서 비롯된 재능이다.
모든 연출적 장치를 음악 자체에 맞춘 <히든싱어>는 그럼에도 여전히 예능 프로그램이라 명명할 수 있다. 예능적인 재미를 철저히 연예인 판정단과 MC 전현무의 몫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전현무 씨는 사람 심장을 오그렸다 폈다 하는 재주가 있다”는 휘성의 말처럼, 전현무는 원조 가수의 목소리를 찾지 못하는 ‘절친’ 패널을 구박하기도 하고, 모창 능력자들의 출중한 실력에 “입이 바싹바싹 마르는” 원조 가수들을 더욱 당황시키는 역할을 도맡고 있다.
원조 가수와 모창 능력자들은 그저 노래 부르는 것에만 집중하면 된다. <히든싱어>는 음악 본연의 매력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예능의 재미를 놓치지 않는 정직한 음악 예능 프로그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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