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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무덤, 잘못된 결혼…19세기 최고의 선정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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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무덤, 잘못된 결혼…19세기 최고의 선정 소설!

[하우, 미스터리] 윌키 콜린스의 <흰 옷을 입은 여인>

1.
‘소설의 시대’, 낭만주의가 화려하게 꽃피운 영국 빅토리아 시대(1837년~1901년)가 미스터리 장르의 요람이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산업혁명으로 촉발된 문화적, 사회적 변화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대중소설이 성장할 수 있는 양분이 되었다. 그 시대에는 인쇄술이 발전했고, 잡지가 유행했으며, 페니 드레드풀(Penny dreadful) 같은 싸구려 소설들이 인기를 끌었다. 또 스코틀랜드 야드(Scotland Yard)가 설립돼 범죄에 사회적 의미가 더해졌고 도서관을 장려하는 법령 덕에 독서 인구가 늘어났다. 철도의 비약적인 발달로 여행이 잦아진 사람들은 기차 안에서 무언가를 읽고 싶어했으며, 계급별 의식의 새로운 정립과 여성의 지위 상승은 창작자에게 더 풍성한 상상력을 요구했다. 빅토리아 시대는 그야말로 재미있는 소설을 위한 토대가 차곡차곡 쌓이던 시기였다.

에드거 앨런 포는 완성품을 손에 쥐고 홀연히 등장했지만, 이미 영국과 미국, 유럽 대륙 각지에서는 작가와 사회의 변화가 운명처럼 맞물리며 인상적이고도 주목할 만한 미스터리의 선조들이 속속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중에서는 당대 상업적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뒀으며, 문학사적인 의미에서도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이 있었으니……, 바로 찰스 디킨스에 버금가는 명성을 얻은 윌키 콜린스의 <흰 옷을 입은 여인>(박노출 옮김, 브리즈 펴냄)이다.

2.

▲<흰 옷을 입은 여인>(윌키 콜린스 지음, 박노출 옮김, 브리즈 펴냄). Ⓒ브리즈

19세기 중반 빅토리아 시대 독자는 새로운 소설 양식을 만나게 된다. 아름답고 조용한 저택, 막대한 유산을 둘러싼 음모, 매혹적이고 신비로운 여인, 출생의 비밀, 뒤바뀐 신분, 유괴와 살인 등 선정적인 요소가 자리 잡은 소설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다. ‘우아한 시드니 셸던’ 같은 이러한 소설들은 당시 유행했던 멜로드라마와 선정적인 저널리즘에 영향을 받았는데, 후대 비평가들은 이들을 말 그대로 ‘선정 소설(Sensation novel)'이라고 불렀다. 선정 소설에서는 전혀 범죄를 저지를 것 같지 않은, 우리 주변의 존경받는 인물이 치밀한 범죄를 저지른다. 그 범죄는 비밀스러운 베일에 싸인 채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으며, 이야기는 철저히 플롯을 기반으로 해서 진행된다.

심미적으로 저급하다고 하여 한동안 조명받지 못했던 선정 소설은 아이러닉하게도 탐정 소설의 전통과 겹쳐 있다. 미스터리 장르의 서두를 장식하는 <흰 옷을 입은 여인>은 바로 이 선정 소설의 효시로 여겨진다.

3.
이름처럼 바른 마음을 지닌 화가 월터 하트라이트(Hartright)는 우연한 인연으로 리머리지 가문의 입주 미술 교사 자리를 얻는다. 그는 리머리지 저택으로 향하던 중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 흰 옷을 입은 여인을 만나게 되고 그녀의 피신을 돕는다.

리머리지 저택에는 젊고 아름다운 상속인 로라 페어리와 지혜로운 마리안 할콤이 있었다. 둘은 아버지가 다르지만 친자매 이상으로 서로를 믿고 의지한다. 로라를 본 월터는 그녀가 ‘흰 옷을 입은 여인’과 무척 닮았다는 사실에 놀라고, (당연히) 한눈에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로라에게는 정혼 상대, 퍼시벌 글라이드 경이 있었다. 상실감을 뒤로한 채 월터는 저택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괴로움을 잊으려 남미 탐사대에 합류한다. 로라는 남편과 신혼여행을 떠나고, 마리안은 여동생의 결혼에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며 그 주위를 맴돈다.

글라이드 부인이 된 로라는 퍼시벌 경의 영지인 블랙워터파크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그곳에는 언니 마리안과 퍼시벌 경의 친구인 포스코 백작 내외도 함께 머무르고 있다. 로라의 고모인 엘레노어와 결혼한 포스코 백작은 이탈리아인으로 유쾌하고 활달하지만 왠지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이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퍼시벌 경은 드디어 난폭한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퍼시벌 경이 노린 건 로라가 상속받은 유산이었다. 경제적으로 위태로운 퍼시벌 경과 포스코 백작에게 로라는 일종의 돈줄이었던 것이다.

▲<흰 옷을 입은 여인> 출간 당시 삽화. 월터와 '흰 옷 입은 여인'의 첫 만남.
‘흰 옷을 입은 여인’ 앤이 퍼시벌 경에 의해 정신병원에서 감금됐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퍼시벌 경과 앤 사이의 비밀스러운 관계가 막 드러나려던 찰나, 두 귀족은 교묘한 술수로 앤과 로라의 신분을 바꿔치기한다. 결국 로라가 돼버린 앤은 사망 처리되고 앤이 된 로라는 정신병원에 갇힌다. 최선을 다해 로라를 지켜왔던 마리안은 여러 차례 실패를 겪지만 기지를 발휘해 정신병원에서 가까스로 진짜 로라를 빼돌린다.

탐사대에서 돌아온 월터와 로라 자매는 ‘(가짜)로라’의 무덤 앞에서 극적으로 재회한다. 그들은 교외의 허름한 하숙집에 몸을 숨기고 이미 죽은 것으로 돼 있는 로라의 신분과 지위를 되살리기 위해 반격에 나선다. 로라와 결혼한 월터 하트라이트는 신중하고도 끈질긴 추적을 통해 흰 옷을 입은 여인 앤의 존재와 그에 얽힌 퍼시벌 경의 수상한 과거를 밝혀내고, 사악한 악당 포스코 백작마저도 물리친다. 결국, 월터 부부는 신분과 지위를 되찾고 진정한 동반자 마리안과 밝고 희망찬 미래를 꿈꾼다.

4.
순정적이면서도 성실한 남자, 비련의 여주인공, 복잡한 음모와 안타까운 희생자, 카리스마 넘치는 악역 그리고 해피엔딩까지. 줄거리만 봐도 알 수 있듯, <흰 옷을 입은 여인>에는 저녁 시간 드라마 한자리는 너끈히 차지할 만한 흥미로운 요소가 가득하다. (1997년 BBC에서 드라마로 방영됐다.) 윌키 콜린스는 다양한 교차 서술을 이용해 굽이굽이 긴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며, 중요한 분기마다 ‘절단 신공’을 발휘해 독자를 안달 나게 하는 능숙함도 보여준다.

또 한 가지, <흰 옷을 입은 여인>이 흥미로운 이유는 새로운 유형의 등장인물 때문이다. 최후까지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저버리지 않는 마리안 할콤은 굳이 여성으로서 한정 지을 수 없을 정도로 중성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처음에는 못생긴 모습으로 독자 앞에 등장하지만, 점점 진정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지혜로운 여성으로 그려진다.

마리안 할콤의 아름다움을 인정하는 유일한 사람은, 역시 전형적인 남성성에서 벗어난 포스코 백작이다. 예술을 숭배하고, 작은 애완 동물을 길들이길 좋아하며, 사람에 대한 기이한 지배력을 발휘하는 이 신사는 비열하면서도 대담하게 승부에 임하는 타고난 악당으로, 셜록 홈즈의 맞수 모리어티 교수를 가뿐히 넘어설 정도의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흰 옷을 입은 여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전형적인 등장인물과 새로운 등장인물의 흥미로운 대비는 후대 연구자들에게 많은 연구거리를 제공했으며, 무시받기 일쑤였던 선정 소설에 ‘사회적 의미’라는 무게감을 실어주었다.

▲1997년 방영된 BBC 드라마 <흰 옷을 입은 여인>.

<흰 옷을 입은 여인>의 인기에 대한 후일담은 허풍선이의 호들갑이라고 생각될 정도이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연재가 끝나고 영국과 미국에서 동시 연재됐던 이 작품은 초판 1500질(3권 분권)이 출간됐는데 단 하루 만에 매진됐고, 미국의 한 출판사에서는 13만 부 가까이 팔렸다.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앨버트 공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글래드스턴 수상은 책을 읽느라 업무를 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흰 옷을 입은 여인을 위한 OO’ 같은 관련 상품도 불티나게 팔렸다니, 현재의 베스트셀러 못지않은 인기를 누린 작품이었다.

물론, <흰 옷을 입은 여인>은 지나치게 길다는 단점이 있다.(본문마저 빽빽한 국내 출간 도서는 774페이지로, 한 손으로 들고 읽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윌키 콜린스는 결말의 카타르시스까지 단숨에 내달리지 않고 다양한 시점을 오가며 천천히 에두르는 방법을 선택했는데, 덕분에 분량은 한없이 늘어났다. 특히 주로 일기로 쓰인 2부는 여러 가지 암시와 긴장을 주는 요소가 과잉돼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문학사적으로 정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것은 분량 문제가 어느 정도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미스터리의 관점에서 볼 때 <흰 옷을 입은 여인>의 가치는 복수 부분에 해당하는 3부에서 찾을 수 있다. 일종의 서스펜스로 시작된 작품은 월터 하트라이트가 다시 등장하면서 현대적인 미스터리 구조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월터 하트라이트는 탐문과 조사, 그리고 상식적인 추리와 우연의 도움으로 두 악당의 실체에 다가서는데, 미스터리 장르의 필수 요건이라 할 수 있는 현실성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윌키 콜린스는 더 많은 독자를 위해서 주변에서 매일매일 일어나는 동시대의 이야기를 쓰겠다고 공언했는데, 덕분에 그로부터 시작된 선정 소설은 먼 나라 이야기 같은 고딕 소설의 전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러한 토대 위에 변호사 자격을 지닌 윌키 콜린스의 전문적인 지식이 녹아들면서, <흰 옷을 입은 여인>은 미스터리의 선조 중 하나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에드거 앨런 포와 허먼 멜빌, 프랑스의 에밀 가보리오, 영국의 윌키 콜린스 같은 19세기 중반 작가와 그 작품들은 아서 코넌 도일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초기 미스터리의 다양한 물줄기들은 ‘셜록 홈즈 시리즈’로 모아졌고 하나의 큰 흐름이 돼 황금기로 향하게 된다.

함께 읽어볼 만한 작품들

<월장석>(윌키 콜린스 지음, 강봉식 옮김, 동서문화사 펴냄)
<월장석>(1868) 역시 유력한 ‘미스터리의 선조’ 중 한 편으로, 문학사적 의미에서 최초의 미스터리로 꼽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약탈당한 인도의 보석 ‘월장석’을 찾는 미스터리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탐정 역으로는 ‘커프 경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윌키 콜린스는 서간체 형식을 가져와 다양한 등장인물의 1인칭 시점을 통해 복잡한 이야기를 풀어간다.

<르콕 탐정>(에밀 가보리오 지음, 한진영 옮김, 국일미디어 펴냄)
1869년 작. 신문 소설에서 시작된 프랑스 미스터리의 출발점에는 에밀 가보리오가 있다. 당시 ‘르콕 시리즈’의 인기는 실로 대단해서 러시아 미스터리의 발아에까지 영향을 끼쳤을 정도였다. 르콕은 <주홍색 연구>에서 셜록 홈스가 짓궂게 평했던 바로 그 탐정이기도 하다. 젊은 르콕의 분투를 담은 <르콕 탐정>은 시리즈 마지막 작품이다.

<골든에이지 미스터리 중편선>(윌리엄 윌키 콜린스 지음, 한동훈 옮김, 하늘연못 펴냄)
셜록 홈스 이전 시기의 작품들은 국내에 그리 많이 소개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의 작품을 모은 <골든에이지 미스터리 중편선>은 독특하면서도 흥미로운 기획이다. 프랭크 보스퍼, 윌키 콜린스, 리처드 하딩 데이비스, 메리 로버츠 라인하트, A. E. W. 메이슨의 작품이 각각 한 편씩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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